하인리히 1세

하인리히 1세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I
요약 테이블
출생 876경
사망 936. 7. 2, 작센 멤레벤
국적 독일

요약 작센 왕조(918~1024)를 창시한 독일의 왕.
(영). Henry I. 새사냥꾼왕 하인리히(Heinrich der Vogler)라고도 함.

동프랑크(독일)의 군대를 강화하고 도시의 성장을 장려했으며 로트링겐(로렌)을 다시 독일의 지배에 두었고(925) 이교도의 침입에 맞서 독일 국경을 지켰다.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오토의 아들로 912년 아버지가 죽자 공작이 되었다.

메르제부르크 백작 에르빈의 딸 하테부르크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첫 남편과 사별한 뒤 수녀가 되었던 점 때문에 결혼이 무효가 되자 베스트팔렌 백작 디트리히의 딸인 마틸다와 재혼했다(909). 그들의 맏아들은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936~973 재위)가 되었다. 튀링겐의 영지를 놓고 프랑켄의 콘라트 1세(903~918 독일의 왕 재위)와 전쟁(912~915)을 벌이기도 했으나 콘라트 1세에게서 임종 때 후계자로 임명받았다. 독일에서 가장 세력이 큰 4개 공작령 가운데 작센과 프랑켄의 귀족들에 의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919. 5) 나머지 공작령인 슈바벤과 바이에른은 하인리히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독일을 국가라기보다 여러 공작령의 연합체로 여겼다. 그는 작센에서는 완전한 군주권을, 프랑켄에서는 명목상의 권리만을 행사했으며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굴복시켰지만(919), 부르하르트에게 공작령의 민사행정권을 허락했다. 바이에른과 동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독일의 왕으로 뽑힌(919)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왕위를 요구했다. 2차례 전투를 치른 하인리히는 921년 아르눌프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그의 왕위 주장을 철회시켰다. 그러나 아르눌프는 바이에른 내부에서는 여전히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925년 로트링겐 왕인 기젤베르트를 패배시키고 이전 독일로부터 독립했던(910) 로트링겐을 다시 독일의 지배에 두었다. 로트링겐 공작의 지위로 격하된 기젤베르트는 하인리히의 딸 게르베르가와 928년 결혼했다. 헝가리 지방의 전사들인 마자르족이 독일을 침략하자(924) 하인리히는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전에 생포했던 마자르 족장을 넘겨주었다. 이 기간에 하인리히는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하고 여러 슬라브족들을 제압한 경험을 가진 기병대의 훈련을 강화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의 헤벨리족과 마이센의 달레민치족을 928년 정복했으며 929년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하인리히는 9년의 평화기간이 끝난 933년에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마자르족에게 알렸다. 그는 잘 훈련된 기병대를 거느리고 3월 15일 리아데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했다. 하인리히는 또한 마지막 원정이 된 덴마크 침공(934)을 통해 슐레스비히를 독일 영토에 합쳤다. 하인리히의 별명인 '새사냥꾼왕'은 그가 새 잡는 덫을 놓던 중 왕에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