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1세

오토 1세

다른 표기 언어 Otto I 동의어 오토 1세 데어 그로세
요약 테이블
출생 912. 11. 23
사망 973. 5. 7, 튀링겐 멤레벤
국적 신성 로마

요약 작센의 공작이자 독일과 이탈리아의 왕이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첫 황제였다. 작센 왕조의 왕인 하인리히 1세의 아들로 태어나 936년 왕이 되었다. 형제들인 탕크마르와 하인리히가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제압하고 독일제국을 굳건히 한 그는 왕국의 영토를 강화,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960년 엘베 강 중류와 오데르 강 중류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다. 베렝가리오에게 핍박을 받고 있던 교황 요한 12세의 호소에 응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그는 베렝가리오를 물리치고 962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이때 황제가 교황 선출을 인준할 수 있게 만든 오토의 특권이라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신성 로마제국은 하나의 세력으로 군림하며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부흥을 주도하기도 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외국정복
  4. 황제 즉위
  5. 오토 1세에 대한 평가
오토 1세(Otto I)
오토 1세(Otto I)

개요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을 제압하고 헝가리인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독일제국을 강화했다.

교회를 체제안정의 지원세력으로 활용해 공고한 제국을 건설하고 문예부흥을 촉진시켰다.

초기생애

장차 리우돌핑 왕조, 즉 작센 왕조의 왕인 하인리히 1세가 될 아버지와 그의 둘째 부인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기생애에 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한때는 전투를 치르는 아버지를 따라다닌 것으로 보인다. 930년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Edward the Elder)의 딸 이디스(에디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지참금으로 번창하는 마크데부르크 성읍을 받았다. 하인리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가 죽기 1개월 전인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독일 공작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고 마인츠와 쾰른의 대주교들에 의해 왕관을 썼다.

하인리히 1세가 자기 수하의 공작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은 반면 새 왕은 그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때문에 바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프랑켄의 에버하르트와, 같은 이름인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를 상대로 벌어진 전쟁에서는 불만을 품은 작센의 귀족들이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마르는 패배해 살해되었으며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왕에게 항복했고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는 직위에서 쫓겨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939년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프랑켄의 에버하르트 및 로렌의 지젤베르와 합세했으며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을 받았다.

오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에버하르트는 전투중에 쓰러졌고 지젤베르는 달아나다가 익사했으며 하인리히는 형에게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1년에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지만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947년에 바이에른 공작작위를 받았다. 다른 독일 공작작위도 비슷하게 오토의 친척들에게 증여되었다.

외국정복

이와 같은 내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시간을 내어 왕국의 변경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쪽에서는 변경백(邊境伯)인 게로와 헤르만 빌룽이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들의 전과는 937년 마크데부르크에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을 건립하고 948년에는 2곳의 주교관구를 창설함으로써 공고해졌다. 북쪽에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덴마크로 확대하기 위해 3곳에 주교관구가 창설되었다(968년에는 4번째로 대주교관구가 만들어졌음). 그러나 오토의 제1차 보헤미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보헤미아 군주 볼레슬라프 1세는 계속 버티다가 95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난 뒤 오토는 프랑스의 로렌 영유권 주장을 물리치고 나아가서 프랑스 내분의 중재자 역할까지 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부르고뉴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게다가 홀로 된 이탈리아의 왕후 아델라이데(아델하이트)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 변경백에게 포로가 되어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 오토는 951년 이탈리아로 진군해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하고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오토의 첫번째 부인인 에디트는 946년에 죽었음). 952년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그의 봉신(封臣)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독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토는 첫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중단해야 했다.

에디트에게서 난 아들 리우돌프가 몇몇 유력자들의 지원을 얻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형세가 불리해 작센으로 퇴각해야 했으나 954년 마자르족이 독일을 침공하면서 반군의 입장이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반군은 독일제국의 적들과 공모한다는 비난을 받기 쉬웠던 것이다(→ 라이히). 장기간의 전투 끝에 955년 리우돌프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 덕분에 오토는 955년 8월 아우크스부르크 부근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은 다시는 독일을 침공하지 않았다. 오토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960년에 이르러 엘베 강 중류와 오데르 강 중류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다. 968년에는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관구가 3곳의 부주교관구와 더불어 창설되었다. 폴란드의 미에슈코까지도 독일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

황제 즉위

961년 5월 오토는 아델하이트에게서 난 큰아들인 6세된 오토 2세가 독일 왕으로 대관식을 갖도록 주선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에게 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교황 요한 12세의 호소에 응해 2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962년 2월 2일 로마에 당도한 오토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11일 후에 황제와 교황 간의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오토의 특권'(Privilegium Ottonianum)이라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교황청의 세속적인 권한을 확인하고 확대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교황선출을 인준할 수 있게 만든 단서조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963년 12월 오토가 요한 12세를 베렝가리오와 내통한 혐의로 폐위시키고 레오 8세를 교황으로 앉혔을 때 추가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교황제). 베렝가리오는 생포되어 독일로 압송당했으며 964년에는 레오 8세에 반대하는 로마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965년 레오 8세가 죽자 황제는 요한 13세를 교황으로 선택했으나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래서 오토는 3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 966~972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로마를 진압했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영토까지 진격해들어갔다. 비잔티움 제국과 오랜 협상 끝에 972년 오토 2세와 비잔티움 공주 테오파노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독일로 돌아와서 황제는 973년 3월 23일 쿠에들린부르크에서 대궁정회의를 열었다. 몇 주 후에 그는 멤레벤에서 죽었고 첫번째 부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오토 1세에 대한 평가

오토 1세의 업적은 주로 제국을 강화한 데 있었다. 그는 주교들을 계획적으로 이용해 통치를 강화했으며 그럼으로써 '독일제국의 오토식 교회체제'를 창출해내어 독일에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기틀을 제공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는 독일이 외세의 침공을 겪지 않고 평화와 안정을 누리도록 했으며 통치자로서 탁월한 지위를 확보해 유럽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의 이탈리아 정책과 황제즉위는 옛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과 맥을 이었으며 장차 독일 사람들에게 커다란 책임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오토의 통치 아래 있던 모든 지역이 번창했으며 그에 따른 문화의 발전은 오토 시대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