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사

이탈리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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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역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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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이탈리아의 형성
  2. 로마의 멸망과 중세의 시작
  3. 중세 이탈리아의 확립
  4. 중세 이탈리아 도시와 상업의 발달
  5.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와 르네상스
  6. 이탈리아에 대한 열강의 진출
  7.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사르데냐 왕국의 성장
  8.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의 등장과 이탈리아
  9. 이탈리아 구체제의 복고와 급진파의 대두
  10. 이탈리아의 개혁과 1848년 혁명
  11. 카보우르와 가리발디
  12. 통일 이탈리아 왕국 초기
  13. 이탈리아 좌파 정권의 출범
  14. 크리스피 정권
  15. 졸리티 시대
  16.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고조와 제1차 세계대전
  17. 전후의 위기와 파시스트의 진출
  18. 파시스트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19. 전후시대의 이탈리아
  20. 1970년대 이후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861년 통일왕국이 이루어지기까지 여러 통치체제에 의해 다스려졌다. 11세기에는 유럽 전반의 정치·경제적 안정으로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반면, 14세기에는 국토 전역이 패권의 각축장이 되었다.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1789년 이후로는 프랑스혁명 등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통일운동인 리소르지멘토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국민의 실질적인 통합에 힘을 기울였으나 개혁은 더디게만 진행되었다. 1923년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강권 통치가 이루어졌고, 1936년 스페인 내란에 공동개입함으로써 독일과 가까워졌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히틀러의 전쟁계획에 말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사회는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헌법 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유럽에서의 변화된 위치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탈리아의 형성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송아지의 땅이라는 뜻의 고대 이탈리아어 Vitelia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의 발부리에 해당하는 남부를 가리키던 것이 차츰 확대되어 BC 2세기 중반 이래 알프스 이남 지역 전체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해 청동기시대에는 중부의 아펜니노 문화와 북부의 포 문화를 이루었다.

BC 10세기 전후 철기시대로 진입한 이탈리아 반도에 BC 8세기 이래 에트루리아인·그리스인·켈트인 등이 이주해왔으며 BC 7, 6세기에는 로마인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함에 따라 로마가 일어나게 된다(→ 로마사).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 후 1861년 통일왕국이 수립되기까지 이탈리아의 역사는 다양한 통치체제에 의한 권력의 분열이 특징이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로마의 멸망과 중세의 시작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뒤,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르스를 폐위하고 이탈리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비잔틴의 동로마 황제 제노에게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탈리아에는 이중구조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로마식 제도가 유지되었다. 493년 제노의 사주를 받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 왕은 오도아케르를 밀어내고 이탈리아의 왕으로 눌러앉았다. 그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다시 동고트족을 치고 이탈리아를 잠시 지배했으나 568년에는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이 침입해 좁은 비잔틴령을 제외한 반도의 대부분을 크고 작은 공작령으로 나누어 지배했다. 이때 공작령이라는 행정단위 명칭은 그들의 군대가 공작의 통솔을 받았던 데서 비롯했다.

롬바르드족은 서로마 제국의 유산을 이어받은 동고트를 해체해 로마적 요소와 게르만적 요소를 융합함으로써 중세의 장을 열었다. 로마인을 피정복민으로 가혹하게 취급하던 롬바르드족도 7세기 후반 가톨릭을 받아들임에 따라 로마 문화에 동화하기 시작했다.

754∼756년 교황에게서 도움을 요청받은 프랑크족의 단신왕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공격해 정복지를 교황에게 기증함으로써 교황령의 토대로 놓았다. 이어 그의 아들 샤를마뉴 대제는 롬바르드족의 영토를 완전히 병합, 카롤링거 왕조를 열고 800년 황제에 즉위해 프랑크족의 지배를 확립했다.

중세 이탈리아의 확립

샤를마뉴 대제는 종래의 공작 대신 백작을 중심으로 지방행정을 개편하고 이들에게 토지와 특권을 수여함으로써 봉건제의 기틀을 다졌다. 843년에는 로타르 왕과 두 아우 사이의 베르됭 조약으로 영토가 분할되어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원형이 이루어졌다.

베르됭 조약 (Treaty of Verdun)
베르됭 조약 (Treaty of Verdun)

887년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린 후 제후들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그치지 않았으나 이를 평정한 독일 왕 오토 1세는 샤를마뉴 대제 시대의 부흥을 꿈꾸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임을 선포했다(962). 11세기 후반에는 성직자의 서임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 황제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공격해 로마를 점령하는 사태를 낳기도 했다.

오토 1세 (Otto I)
오토 1세 (Otto I)

한편 9세기초부터 아랍인이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에는 이즈음 노르만족이 밀고 들어와 1130년 시칠리아와 반도 남부를 통일해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그리스·아랍·노르만의 요소가 융합된 강력한 왕권제도를 발전시켰다.

중세 이탈리아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에 뻗어나와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역사상 상업과 도시의 발달이 두드러진 곳이다. 11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안정과 경제 발전을 배경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밀라노 등의 내륙도시도 번영했다. 또한 헝가리·아랍 등이 침입할 때 피난처로 세웠던 성벽을 둘러싼 취락이 전역에 퍼져 도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도시가 번영하면서 귀족과 상인들은 자치조직을 만들어 자치도시 운동을 벌였다.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탄압하고자 출병했으나 북부 도시들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롬바르디아 동맹을 맺어 황제군을 물리치고 1183년 콘스탄츠 평화협정으로 자치권을 획득했다. 한편 시칠리아가 혼인 관계로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귀속된 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의 강력한 왕권제도를 이탈리아 전역에 확대하려 했다.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다시 동맹을 맺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4세의 지원을 받아 황제에 맞서 싸웠다. 13세기를 소란스럽게 한 이 투쟁에서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구엘프와 기벨린). 11세기말 이후의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교역의 발달 및 도시 인구의 확대를 배경으로 귀족 지배에 도전하는 중소 상공업자의 포폴로 운동 및 도시간의 세력다툼이 격렬해진 것도 13세기 후반의 특징이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샤를 1세의 정복에 따른 프랑스 귀족의 이주에 반발한 시칠리아인의 반란이 일어나(1288) 아라곤 왕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와 르네상스

프리드리히가 죽은 뒤 제위 계승이 순조롭지 못한 가운데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져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천도(1309∼77)하고 도시간의 충돌이 커지는 등 혼란이 계속되자 도시는 공화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밀라노 등지에서는 유력한 시민이나 봉건 영주가 강한 권력을 가진 시뇨리아로 선출되고 이것이 세습됨으로써 군주국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유지한 피렌체도 사실상 메디치 가문의 전제적 지배하에 들어갔다. 14세기에는 구엘프와 기벨린의 투쟁 및 도시국가간의 세력다툼이 겹치고 시뇨리아제와 공화제도 안정되지 못해 이탈리아 전역은 패권의 각축장이 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 드 (Giovanni di Bicci de)
조반니 디 비치 드 (Giovanni di Bicci de)

15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이러한 전란시대 속에서 르네상스가 막을 열게 되었다. 즉 도시 경제의 발달과 도시 상호간의 대항의식을 배경으로, 비잔틴과 아랍 지역에 남아 있던 고대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재발견하고 여기에 기초를 둔 새로운 시민 문화가 싹트게 된 것이었다(→ 르네상스). 1454년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맺어진 로디 평화조약은 이탈리아의 오랜 전란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로디 평화조약 (Peace of Lodi)
로디 평화조약 (Peace of Lodi)

여기서 수립된 이탈리아 동맹에 피렌체·나폴리·교황령이 가담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르네상스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전제적 경향이 강화된 시기로서 밀라노에는 비스콘티 가문의 전제적 지배에 이어 용병대장 출신의 스포르차가 새로운 전제군주로 등장했고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이어졌다. 유력 가문의 전제군주들이 배출된 이 시기에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씌어졌다.

이탈리아에 대한 열강의 진출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밀라노의 야심가 로도비코와 나폴리의 아라곤 왕가 사이의 불화를 틈타 나폴리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로 남하했다(→ 이탈리아 전쟁).

샤를의 침입은 피렌체에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의 공화정 수립을 외친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반란을 가져왔을 뿐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이후 잇따른 외세 개입의 서곡이 되었다. 샤를의 뒤를 이어 루이 12세가 나폴리에 개입,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함께 나폴리 분할에 합의했으나 곧 프랑스와 스페인의 불화로 프랑스인은 추방되고 페르난도에 의해 시칠리아와 나폴리가 재통합되었다(→ 양시칠리아 왕국). 외세를 등에 업고 세력의 확장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프랑스군의 지원을 얻어 로마냐 정복에 나섰으나 교황이 급사함으로써 국가 수립에는 이르지 못하고 정복지를 교회에 남겼다. 다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스페인·독일과 캉브레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에 대항, 교황령의 확대에 성공했으며 이후 교황령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프랑스 세력의 축출을 위해 영국·스페인·스위스 등과 신성동맹을 맺고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이즈음 이탈리아 땅에는 프랑스 대신 스페인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1521∼44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5세가 발루아 왕가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굴복시켜 이탈리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권에 떨어지게 되었다. 1559년에는 카를의 아들이며 스페인 왕인 펠리페 2세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주요지역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독립을 잃었다. 그나마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베네치아도 신항로의 발견으로 무역상의 우위를 잃고 해외 식민지도 투르크에 빼앗겨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지중해 무역의 상대적 쇠퇴는 스페인 지배 시대 이탈리아의 다른 대(大)상업도시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사르데냐 왕국의 성장

1700∼13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사이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종결지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이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우세하게 되었다.

이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등 유럽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이탈리아 각지는 열강의 세력다툼의 희생이 되어 역사와 전통에 관계없이 새로운 지배자에게 양도되었다.

예컨대 스페인 치하에 있던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각기 다른 통치자에게 주어져 주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는데 이러한 역경 속에서 유일하게 성장한 것이 북서부의 사르데냐 왕국이다. 즉 사보이 공작은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를 빼앗긴 대신 남서부의 사르데냐 섬을 받는 동시에 왕위를 칭할 수 있게 되어 사르데냐 왕이 되었는데 이 사르데냐 왕국이 훗날 외세축출과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사보이 왕가).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스페인계 부르봉 왕가 치하의 나폴리에서는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재정 분야, 군대·사법 제도 등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체사레 베카리아가 〈범죄와 형벌 Dei delitti e delle pene〉을 저술, 고문 등 재판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외국인 지배 아래 개혁의 한계는 뚜렷했으나 이탈리아인의 정치적 각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의 등장과 이탈리아

나폴레옹
나폴레옹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은 이탈리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계몽군주의 미온적 개혁에 반발하고 있던 자코비노(이탈리아의 자코뱅파)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환호하고 각지에서 혁명 이념의 전파에 앞장섰다.

1792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사르데냐를 필두로 이탈리아 각지의 지배자들은 대(對) 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은 1796년 이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에 침공, 중북부의 소국들을 묶어 치스파다나라는 혁명공화국을 세우고 밀라노에는 치살피나 공화국을 세웠다. 한편 각지의 자코비노들을 선동, 소란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개입하는 수법으로 제노바·베네치아·피에몬테 등을 손에 넣었다. 또 나폴레옹군에 의해 로마에는 괴뢰정부가 서고 교황은 유배되었다.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4세가 저항, 프랑스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파르테노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수의 급진적 지식인을 제외한 이탈리아 민중은 점령군의 횡포와 교황의 유배에 적대감을 품었다. 특히 농민은 공동체의 전통적 권리를 제한하는 토지 부르주아지의 세력 확대에 반발했다. 곳곳에서 반프랑스·반혁명의 소요가 일어났다. 특히 남부에서는 무장대의 반란이 극심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중에 결성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한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듯했다. 그러나 1800년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로 통령정부를 수립하고 제2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이 제2차 원정군은 약탈을 삼가해 민심을 누그러뜨리고 봉건제 폐지, 나폴레옹 법전의 도입, 행정개혁, 종교의 자유 등을 추진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직후, 롬바르디아인들은 코르시카 출신의 이 황제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상황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고 나폴레옹을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했다(1805). 나폴레옹 체제에서 산업의 싹이 트고 부르주아지의 입장이 강화된 한편, 반도 전체에 걸쳐 시행된 공통의 행정·군사·교육 제도는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해 이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대두에 기여했다.

이탈리아 구체제의 복고와 급진파의 대두

나폴레옹의 몰락과 빈 회의(1814∼15) 결과 이탈리아에도 구체제가 복원되었다. 롬

바르디아와 베네치아가 통합되어 오스트리아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이 오스트리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오직 사르데냐 왕국만이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면한데다 리구리아를 병합해 영토를 확대했다.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나폴레옹 체제에서 형성된 급진적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숯굽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초기 당원들이 숯굽는 사람으로 변장해 숲에서 만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는 나폴레옹 체제에 항의해 1820, 1821년 나폴리와 피에몬테에서, 1830년 파르마와 볼로냐에서 입헌혁명을 시도했으나 오스트리아군에 진압되었다.

카르보나리의 실패 후 주세페 마치니는 민중봉기로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구상으로 1831년 망명지 마르세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농민을 배제한 마치니의 공화주의는 군대와 대학의 지식인 및 일부 중산층 이외에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1833년 이래 거듭된 마치니파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1845년 무모한 남이탈리아 원정으로 몰락을 자초했다.

이탈리아의 개혁과 1848년 혁명

마치니의 급진적 통일주의의 실패 및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배경으로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연방제로 해결하려는 온건파가 등장했다. 그중 빈센초 조베르티는 교황을, 체사레 발보는 세속 군주를 중심으로 연방제를 추진하려 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이 열망하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사르데냐 국왕 알베르토는 자유주의 내각을 구성해 헌법을 제정했다(이는 훗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헌법으로 채용됨). 각지의 입헌운동이 활발해지고 이것이 반오스트리아 해방전쟁으로 발전하려는 즈음, 1848년 파리와 빈 혁명의 소식에 고무된 밀라노 시민들이 봉기해 오스트리아 군사령관 라데츠키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르데냐 왕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자 교황을 비롯한 각지의 지배자들이 이에 가담하고 입헌혁명의 물결이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로마 교회 이탈을 두려워한 교황의 탈퇴를 계기로 민족전선은 깨어지고 사르데냐군은 라데츠키의 반격에 무릎을 꿇었다. 1849년 알베르토 왕이 퇴위당한 후 새로운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마치니주의자들이 수립한 로마와 베네치아의 공화국도 주세페 가리발디의 영웅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이렇게 제1차 독립전쟁이 패배로 끝나면서 리소르지멘토는 혁명운동의 국면에서 외교의 국면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카보우르와 가리발디

이탈리아 전역에 구체제가 부활한 가운데 유일하게 1848년 혁명의 결과 자유주의 헌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르데냐 왕국에는 의회정치가 싹트고 각지의 망명자가 모여들었다. 라타치가 이끄는 의회의 중도 좌파와 자신이 이끄는 중도 우파의 연합으로 다수파를 장악해 1852년 총리가 된 카밀로 디 카보우르는 혁명파의 실패를 교훈삼아 이탈리아 국내의 주도권을 확실히 하고 국제 정세를 이용하는 것이 현실적 통일책이라고 믿었다.

그는 중세주의와 자유무역주의를 기본으로 부국강병의 국정 개혁에 착수하는 한편 크림 전쟁 참가로 영국의 호의를 얻어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점령에 대한 부당성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불가결하다고 본 그는 1858년 플롱비에르에서 나폴레옹 3세를 극비리에 만나 도움을 약속받고 이듬해 제2차 반오스트리아 독립전쟁을 개시했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일거에 롬바르디아를 제압했으나 사르데냐가 예상 외로 강력해질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폴레옹 3세가 돌연 오스트리아와 강화조약을 맺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중부에는 피에몬테에 망명해 있던 각지의 망명가들의 모임인 '국민협회'를 중심으로 피에몬테와의 통합을 열망하는 여론이 조성되어, 통합을 지지하는 지방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나폴레옹 3세는 결국 당초의 약속대로 사보이와 니스를 할양받는 대가로 사르데냐의 중부 통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1860년 이 지역의 주민투표에 의해 통합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급진파는 카보우르의 외교 위주의 통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부르봉 왕가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잇따르자 주세페 가리발디는 의용군 '붉은 셔츠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건너가 빈농을 동원해 부르봉 왕정을 타도했다. 가리발디는 여세를 몰아 본토에 상륙, 나폴리에 입성하고 로마 진격으로 급진적 통일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카보우르가 이를 막기 위해 사르데냐군을 교황령에 급파하고 가리발디가 점령한 남이탈리아 지방의 피에몬테 귀속을 묻는 주민투표안을 왕에게 승낙하도록 하자 가리발디에게는 이 점령지를 왕에게 바치는 길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861년 3월에는 토리노에서 새 의회가 소집되어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일단 대망의 통일과 독립이 이루어졌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 초기

1861년 6월 카보우르가 죽은 후 국정을 담당한 것은 온건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우파 정부였다. 통일 초기의 최대 과제는 바티칸 문제와 남부 문제로서 국가의 형식적 통일에 이은 국민의 실질적인 통합이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신생 이탈리아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도들에게 국정에 협력하지 말도록 종용하고 있었고 남부에서는 통일로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한 빈농들이 비적이 되어 구(舊)부르봉 왕가의 비호 아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에 우파 정부는 북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의 강행으로 대처했다. 북부에 유리한 자유무역제와 간접세가 전국에 확대되자 부르봉 왕가의 보호주의 아래에 성장한 남부 공업과 빈농이 큰 타격을 입어 통일에 대한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4∼5년간 이어진 남부의 내란은 리소르지멘토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우파 정부는 이러한 남부의 희생과 외자 도입으로 북부 공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한편 1866년에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최종적으로 몰아냈고 1870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틈타 로마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일부 국경지대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되어 1820년대 카르보나리의 반란에서 시작된 리소르지멘토는 일단락되었다.

이듬해 정부는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기고 내정에 주력하려 했으나 우파의 더딘 개혁에 대한 실망으로 공화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좌파가 급부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좌파 정권의 출범

1876년 선거에서 악명 높은 제분세에 대한 불만 등을 배경으로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가 이끄는 좌파가 승리, 1896년까지 이어지는 좌파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들은 이름만 좌파일 뿐 입각 후에는 왕정을 지지하는 온건파가 되어 선거권의 확대, 지방자치제, 과세형평 등 1880년대의 잇따른 개혁조치도 우파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 선에서 절충되었다.

이와 같이 1876∼87년 데프레티스 정권하에서 우파와 좌파의 전통적인 구별을 와해시켜 양극단을 피한 다수파를 형성하는 정책이 취해졌는데 이를 트라스포르미스모(변형주의 또는 다수파 공작)라고 한다. 카보우르 시대의 연합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이 정책은 이후 이탈리아 정치의 기본틀이 되었다. 한편 이즈음 유럽 열강이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데 자극받아 이탈리아도 지중해 연안에 진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통일과 독립 달성의 원동력이 되었던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이제는 팽창주의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외교는 전통적으로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즉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을 이용하는 것으로, 프랑스를 구슬려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냄으로써 독립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비스마르크 치하의 강국 독일과 동맹할 필요가 생겼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프랑스와 대립하게 된 이탈리아는 숙적 오스트리아와도 손잡고 1882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으로 프랑스에 대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튀니지 등에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으나 미수복의 트렌토 및 트리에스테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인정한 셈이 되어 미수복지역 회복운동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크리스피 정권

1887년 데프레티스가 죽은 뒤 총리가 된 크리스피는 비스마르크를 숭배하는 인물로서 내무장관과 외무장관을 겸임,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하고 대외적으로는 식민주의를 노골화했다. 오랜 라티푼디움 경영과 통일 정부의 무거운 세금으로 1880년대 남부에는 농업 위기가 만성화하고 북부의 공업도 외국과의 경쟁심화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

크리스피는 보호관세를 도입하고, 군수산업을 건설해 해외팽창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려 했다. 1887년 신관세법의 도입에 따른 보호주의로의 전환은 북부의 공업가와 남부 대토지 소유자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부의 농민은 프랑스의 무역 보복으로 포도 등의 중요한 해외 농산물 시장을 잃는 동시에 북부의 값비싼 공산품의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북부의 자본주의와 남부의 반(半)봉건제의 이중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어지고 남부에서는 대다수의 이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던 바쿠닌의 영향을 받은 1870년대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도, 1880년대 조직화하기 시작한 노동자당도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에 대해 소홀했다.

1892년에는 크리스피 내각의 각료이던 자유주의자 조반니 졸리티가 총리에 발탁되었으나(제1차 졸리티 내각), 시칠리아의 농민 조직 파쇼(fasci)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1893년의 반란에 직면해 강권 통치의 크리스피가 복귀했다. 시칠리아 출신이면서도 남부 문제에 전혀 이해가 없던 크리스피는 농민의 토지 점거를 계엄령으로 분쇄하고 아프리카 경영에 열중했으나 1896년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의 반격을 받아 아도와에서 대패함으로써 사임했다.

졸리티 시대

크리스피의 뒤를 이은 루디니의 우파 정권은 크리스피 시대의 계엄령 체제를 완화하려 했으나 1898년 흉작과 불황으로 밀라노에서 폭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자 다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이에 1892년에 창당된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입헌 좌파가 손잡고 반격에 나서 우파 정부의 퇴진을 가져왔다. 1900년 국왕 움베르토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고 이듬해 새 국왕 에마누엘레 3세의 위촉으로 좌파의 차나르델리가 정권을 맡게 됨으로써 이탈리아 사회를 뒤흔들었던 세기말의 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차나르델리 내각의 실력자인 내무장관 졸리티는 1903년 총리가 된 이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피에몬테 출신인 그의 정책 기조는 크리스피와 같은 강권과 탄압 대신 자본가에게는 노동자에 대한 양보를 종용하고, 사회주의 세력에는 개량주의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사회당 혁명파와 분리시키려는 졸리티의 노동운동 장려정책에 힘입어 이 시기에는 파업이 일반화되었다. 빈발하는 파업의 수습에 몰린 졸리티가 일시 퇴진하고 포르티스·손니노 내각이 잇따라 등장했으나 단명으로 끝나 1906년 다시 졸리티가 복귀했다.

졸리티의 3차 내각은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드물게 보는 장수 내각(3년)이었다. 1900년 이래의 호황을 배경으로 한 졸리티의 노동자·자본가 연합노선 아래 정부는 건전재정을 유지했고 임금향상으로 노동자의 생활수준도 나아졌다. 피아트 자동차공장으로 대표되는 북부의 대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남부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는 남부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남부에 대한 얼마간의 지원책이 마련되었다. 또한 매년 50만 명에 달하는 이민은 농업의 과잉인구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교회는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개혁에 관심을 보이고 의회에도 진출해 1905년에는 가톨릭교도의 참정을 금지하는 교황의 칙령이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도 개선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점차 불황과 독점의 진행으로 졸리티에 대한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09년말 사임한 후 1911년 제4차 내각을 조직한 졸리티는 사회당 개량파에게 입각을 요청했으나 PSI 지도자 투라티는 이를 거절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고조와 제1차 세계대전

외교면에서 졸리티는 3국동맹을 계속 유지하기는 했으나 프랑스와 유화를 꾀하는 등 선린 외교와 비개입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1893∼96년의 에티오피아 전쟁 때와는 달리 금융자본의 북아프리카 진출에 따라 북부 공업가층이 전쟁을 적극 지지하고 민족주의 협회를 중심으로 여론이 고조되자 1911∼12년 투르크와 전쟁을 벌여 리비아를 획득했다.

리비아 전쟁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PSI 내에 분열이 격화되어 1912년에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무정부주의자의 혁명파가 주도권을 잡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PSI 기관지 〈아반티 Avanti!〉('전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생디칼리슴). 졸리티는 1911년 선거법을 개정, 이듬해 가톨릭과의 제휴로 새로운 연합을 모색하려 했으나 유권자를 30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대폭 늘린 선거법은 사회주의자·가톨릭교도·파시스트 등 새로운 대중 정당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가톨릭과의 제휴가 반교권주의자들의 반발을 사 1914년 봄 사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유럽에 전운이 짙어가는 가운데 졸리티의 뒤를 이어 출범한 살란드라의 우파 내각은 6월 징병제에 항의하는 안코나의 폭동이 중부 전역에 확대되자(6월 8∼12일의 이 투쟁 기간을 붉은 주간이라 함) 이를 무력진압했다. 7월 오스트리아의 대(對) 세르비아 선전포고에 의한 개전 초기, 이탈리아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3국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발칸 반도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고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미수복지역의 회복과 달마치야 연안 진출을 위해 협상국측에 가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살란드라 (Antonio Salandra)
살란드라 (Antonio Salandra)

리비아 전쟁 당시에는 제국주의를 비난했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참전 옹호로 선회함으로써 당에서 제명된 것은 이 시기 민족주의의 급격한 고조,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국가주의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수적 국가주의자 살란드라 총리와 손니노 외무장관은 1915년 4월 중립파가 다수인 의회의 자문을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협상국과 런던 조약을 맺어 3국동맹을 폐기하고 5월에는 참전파의 시위를 무기삼아 의회에서 참전결의를 통과시켰다. 참전 후 이탈리아에는 전쟁의 장기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궤멸로 반전 기운이 고조되기도 했으나 1918년 비토리오베네토에서 대승, 오스트리아와 휴전협정을 맺었다.

전후의 위기와 파시스트의 진출

1919년 파리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미수복 지역을 돌려받기는 했으나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은 피우메를 얻지 못해 전후의 베르사유 체제에 불만이었다. 윌슨의 냉대에 항의하여 평화회의에 참석중이던 이탈리아 대표단이 철수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다는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이 널리 퍼지는 가운데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투 파쇼(Fasci di Combatimento)가 결성되었다. 시인이며 정치가인 단눈치오는 9월에 의용대를 이끌고 달마치야 연안에 상륙, 유고슬라비아와 분쟁중이던 피우메를 점령해 1년 남짓 통치하는 일막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쟁의 영향은 이탈리아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국민총동원의 전쟁을 거친 대중의 정치 의식은 한껏 높아져 있었으나 전시공채의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제대병들의 대량 실업 등으로 정국은 위기 를 맞고 있었다. 비례대표제의 새 선거제도로 치러진 11월 총선에서 제1당이 된 PSI와 농촌에 기반을 둔 가톨릭의 신생 인민당이 대중 정당으로 부상해 구지배구조를 위협했다. 전쟁 직후의 니티 내각에 이어 1920년 정권을 담당한 졸리티에게 그해 4월 토리노의 금속노동자 파업이 발단이 되어 피에몬테 주 전역에 총파업이 파급되었다. 이어서 9월 이 지역 노동자의 공장평의회가 중심이 된 공장점거사태가 일어나는 등 시련이 닥쳤으나 졸리티는 노련한 조정으로 혁명의 파고를 막는 데 성공했다. 더 큰 시련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로부터 왔으나 당시까지도 졸리티를 포함한 지배층은 파시스트의 위협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중산층 이상의 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즈음 좌파 조직에 대해 시작된 파시스트의 공격을 묵인했다. 반동의 물결이 높아가던 당시 보르디가의 주도하에 그람시·톨리아티 등을 포함한 혁명파는 1921년 1월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을 창당, PSI 및 노동총동맹(CGL)과 결별하게 되었다. 파시스트가 처음 의회에 진출한 5월 선거에서 중도 연립정부 수립에 실패한 졸리티에 이어 들어선 보노미 내각, 이듬해의 팍타 내각은 무능한데다 파시스트의 방화·파괴 행위를 방관할 뿐이었다. 1922년 7월 파시스트의 테러에 맞서 일어난 최후의 총파업은 국민의 호응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고 파시스트의 총동원령을 불러일으켰다. 10월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당 대회를 마친 후 '로마에 진군한' 파시스트를 해산시키기 위해 팍타는 계엄령의 서명을 국왕에게 요청했으나 파시스트에 호의를 가진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조각(組閣)을 위촉했다.

파시스트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무솔리니는 일단 사회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파로 연립내각을 구성했으나 1923년 파시스트 돌격대의 설립, 민족주의 정당과의 합동, 최다득표 당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 등으로 강권 통치를 준비했다.

전쟁 후의 사회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산층의 지지로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는 새 선거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총투표수의 2/3를 획득할 수 있었다. 자신을 얻은 파시스트는 PSI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를 암살해 여론의 비난을 샀다. 이후 1925∼29년 파시스트 노조를 제외한 모든 노조의 해산, 파시스트 대평의회에 의한 의회의 실질적 폐기, 반대파 정당의 해산, 정치범 특별 재판소의 설치 등 파시스트 독재가 이룩되었으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독일의 나치즘에 미치지 못했다. 초기의 급진적 색채를 벗고 이미 대자본과 왕의 지지를 확보한 무솔리니는 협동조합 노선(1926)으로 노동자의 통합을 꾀하고 바티칸을 교황 치하의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1929)으로 역대 정권의 숙제였던 교회와의 화해에 성공했으며, 1929년 이래의 대공황기에는 경제의 국가 관리를 일층 강화, 일당국가체제를 굳건히 했다. 한편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에 나선 무솔리니는 국제연맹의 경제제재에 직면했으나 이를 기회로 가난한 나라 이탈리아의 설움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한편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에 접근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에 대한 공동개입으로 독일과 한층 가까워진 이탈리아는 이듬해말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에 가담한 데 이어 1939년 독일과 강철협정을 맺음으로써 이미 군비를 완료한 히틀러의 전쟁계획에 말려들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에 참전했으나 군비 부족으로 에티오피아와 그리스의 전선에서 퇴각을 거듭하다가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로마 폭격이 시작되자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며칠 후 국왕과 군부 및 파시스트 평의회 일부가 연합,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정부불신임안을 가결하고 무솔리니를 체포했다. 이어서 바돌리오 원수의 새 정부는 9월 연합군에 항복했으나 이탈리아에 독일군이 증강되자 연합군의 점령지역으로 피신했다. 나폴리 이북을 점령한 독일군의 손에 구출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공화국을 재건, 정권의 연명을 꾀했으나 10월 반파시스트 연립정권의 대(對) 독일 선전포고와 더불어 각지의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해졌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로마를 해방시킨 데 이어 파르티잔의 손에 북부 도시들이 해방되고 도피중의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바티칸시국의 영토
바티칸시국의 영토

전후시대의 이탈리아

파르티잔 출신의 페루초 파리 내각에 이어 1945년 12월 인민당의 후신인 기독교민주당(DC)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총리에 취임해 레지스탕스 운동기의 국민적 일체감에 기초를 둔 PCI·PSI·DC의 연립내각이 발족되었다. 이듬해에는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제헌의회가 소집되는 등 신생 공화국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48년 총선에서 DC가 대승한 후 구성된 제4차 데 가스페리 내각은 PSI와 PCI를 배제한 중도우파 연합내각으로 이 성격은 1963년까지 이어졌다. 디플레이션 정책과 농지개혁의 착수로 경제 재건의 토대를 다진 정부는 유전과 메탄 가스의 발견에 힘입어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경제부흥에 성공했다.

1954년 데 가스페리 사후 정부의 우익화가 가속되어 이에 대한 반발로 1963년 선거에서 DC가 후퇴하고 DC의 모로를 총리, PSI의 넨니를 부총리로 하는 중도좌파 연정이 발족되었다. 이탈리아 정치의 특징이라고도 할 내각의 잦은 교체 속에서도 DC·PSI의 연합노선이 유지되었고 정부는 1950년대 후반 이래 계속된 10여 년 간의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전력사업의 국유화, 농업개혁 등에 나섰다.

1968년 대학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은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 시위를 유발하고 이것은 뜨거운 가을이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소요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PSI·PCI계의 노동자동맹(CGIL), DC계의 기업노동자동맹(CISL), 사회민주당(PDSI)계의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UIL) 등 3대 노조의 연대가 이루어진 한편, 원외의 신좌파 세력에 대해 지도력을 발휘한 PCI가 집권 DC를 바짝 추격하고 PSI가 퇴조해 중도좌파 연립이 위태로워졌다.

1970년대 이후의 이탈리아

고도성장기에 누적된 독과점의 모순과 석유파동 등으로 고조된 경제 위기와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1973년 PCI의 베를링구에르 서기장은 PC가 정부에 협조하는 역사적 타협을 제의했다.

1970년 주(州) 자치제 실시에 따른 좌파 자치체의 대두, 1974년 이혼법 폐기를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DC의 패배, 1976년 선거에서 PCI의 대승 등을 배경으로 PCI의 입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으나 이것은 1978년 극좌 테러단 '붉은 여단'이 DC 총재인 모로를 암살함으로써 무산되었다.

1974년 이래의 PCI의 협조는 내핍 경제에 대한 노동자의 반발로 철회되고 그직후 실시된 1979년 선거에서 PCI는 크게 후퇴했다.

만성화된 불황과 리라의 하락, 신(新) 파시스트의 세력확대, 정치의 구조적 부패에 기인한 잇따른 오직 사건 등 정치적·경제적 위기 속에 치러진 1983년 선거에서는 DC의 득표율이 1/3 이하로 떨어지고 남부에 기반을 둔 극우파 이탈리아사회운동과 신좌파가 진출해 정국의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에 1983년 DC는 총리의 지위를 PSI 당수 크락시에게 양보함으로써 PSI의 우익화를 유도하고 중도 좌파 내의 연대를 강화했다. 크락시를 수반으로 한 5당연립(DC·PSI·PDSI·공화당[PRI]·자유당[PLI]) 정부는 1987년 3월까지 전후 최장수 연립각으로서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기회복에 힘써 1987년에는 영국을 제치고 프랑스를 따라잡을 기세가 될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한편 1970년대 유럽 공산주의의 기수로 서유럽 최대의 당세를 자랑했던 PCI는 1980년대의 당세 퇴조,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의 역사적 변화에 적극 대처, 1990년 3월 오케토 서기장의 당개혁안을 가결하고 1991년 2월 제20회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좌파민주당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이해 8월의 소련 쿠데타 이전에 자기개혁에는 성공했으나 1992년 4월 선거에서는 DC와 함께 퇴조를 면치 못했다.

독일의 통일과 유럽 공동시장 창설에 따른 경기침체가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1991년 이후 이탈리아의 경제상황도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산업생산이 감소하는 등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정치적으로는 1992년 밀라노 검사들의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 부패추방운동(이른바 '깨끗한 손')으로 수많은 정치지도자들과 공무원, 기업가들이 구속·수감되었다. 1993년 중반까지 부패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공무원은 전직 장관 7명을 비롯해 200여 명에 달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를 이끌어 오던 기존 정당들이 불명예스럽게 해체되거나 혹은 당명을 변경하고 당수를 교체했다.

DC는 이탈리아인민당으로, 신파시스트 세력은 국민연합(National Alliance)으로 변신을 꾀했다. 1993년에는 국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각료와 상원의원의 3/4을 1인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초 북부지역에서는 높은 세율과 형편없는 공공 서비스, 조직범죄, 이민정책, 부패한 정당의 집권에 반대해 지역 동맹들이 결성되었는데, 1991∼92년 많은 PSI 및 DC 당수들이 구속되고 소련의 붕괴로 PCI의 지지율이 급락함에 따라 이들 다양한 지역 동맹들이 모여 북부동맹(Northern League)을 결성했다.

이들은 기존 정당들이 고전한 1992년 총선에서 북부 특히 도시 지역에서 선전하며 주요정당으로 부상했으며, 3개 자치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를 주창해 지역주의의 갈등이 부각되기도 했다. 1994년초에는 포르차이탈리아(Forza Italia : 전진이탈리아당)를 창당한 언론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북부동맹·국민연합과 우파 연립을 결성, 3월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등장한 이 신(新)파시스트 정부는 그해 12월 북부동맹이 연립정권에서 탈퇴함에 따라 붕괴되었다.

기존 정당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정치는 정쟁을 일삼는 정당과 파벌, 단명하는 연립정부, 각료의 임명을 둘러싼 대립 등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헌법 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성이 커지고 활동영역이 넓어졌으며,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유럽에서의 변화된 위치에 적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