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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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50년 11월 11일
사망 1106년 8월 7일, 로렌 리에주
국적 독일

요약 하인리히 4세는 당시 정점에 달한 교황권과 추락한 왕권을 보여준 사건인,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3세의 요절로 6세에 즉위했다. 어머니 아그네스 왕후가 섭정하는 동안 실정을 거듭해 대부분의 왕령이 귀족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친정을 시작 후에는 잃은 왕령들을 되찾으며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서 성직 임명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거부되자 교황을 폐위했다. 그러나 교황에게 역으로 파문당하자 결국 1077년 카노사에서 3일간의 굴욕적인 속죄를 한 끝에 사면 받았다. 이로 인해 교회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권위를 가졌던 왕의 전통적 지위를 포기했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그 후 영원히 바뀌게 되었다. 이후에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 콘라트와 대립하며 말년을 보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성직 임명권 문제
  4.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그후의 위기
  5. 평가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개요

속인의 성직 임명권 문제를 둘러싸고 힐데브란트(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오랫동안 싸우다가 결국 파문당하고, 카노사에서 굴욕적인 속죄 행위를 했다(1077). 그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 콘라트와 하인리히(나중의 하인리히 5세)와 싸우면서 말년을 보냈다.

초기생애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는 교회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유지했고, 로마의 분열을 해결하여(1046) 개혁가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의 길을 텄다.

1050년 크리스마스에 독일 군주들이 하인리히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한 뒤, 1051년 부활절에 어린 하인리히는 세례를 받았다. 1053년 7월 17일에 그는 공정한 왕이 된다는 조건으로 트리부르(지금의 독일 트레부어)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1054년에 엑스라샤펠(지금의 독일 아헨)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이듬해에는 토리노 변경백의 딸 베르타와 약혼했다.

1056년 10월 황제 하인리히 3세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뿐인 정부가 6세 소년의 손에 넘어갔을 때, 왕국의 군주들은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신앙심이 깊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년의 어머니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의 요절은 아들의 통치 전체를 특징지은 중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황제는 유언장에서 교황 빅토르 2세를 황후의 조언자로 지명했고, 교황은 제국의 평화를 위협한 군주들과 제국 궁정 사이의 분쟁을 일부 해결했다.

그러나 빅토르 교황이 일찍 죽자(1057), 정치적으로 무능력한 황후는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질렀다.

상설 자문위원회의 조언도 얻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국사를 처리했으며, 여러 압력에 쉽게 굴복했다. 황후는 하인리히 3세가 1055년 아들에게 물려준 바이에른 공작령을 작센 백작인 노르트하임의 오토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왕은 중요한 권력 기반을 빼앗겼다. 또한 황후는 슈바벤 공작령을 라인펠덴의 루돌프 백작(이 사람은 황후의 딸과 결혼했음)에게 주고, 케른텐 공작령은 체링겐의 베르톨트 백작에게 주었다.

두 백작은 결국 하인리히 4세의 반대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3세의 죽음으로 이탈리아에서 독일이 행사하던 영향력은 무너졌고, 왕과 개혁파 교황들의 밀접한 관계도 깨졌다. 스테파누스 9세와 니콜라우스 2세가 하인리히 3세 시대와는 달리 독일 궁정의 영향을 받지 않고 교황으로 선출된 일, 새로운 교황 선출 절차가 마련된 일(1059),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에 거주하는 노르만족과 방어동맹을 맺은 일 등을 통해 교황의 독립이 분명해졌다. 이 동맹은 교황에게는 로마인들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책의 필요로 이루어진 것이지 독일 왕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신성 로마 제국의 권리를 침해하는 적으로 여겼다. 따라서 교황과 노르만족의 협정은 교황과 독일 궁정의 관계를 긴장시켰고, 이런 긴장관계는 니콜라우스 2세가 독일 군주들에게 내린 징계 조치와 교황의 권리 주장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 왕은 그때까지 개혁가들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황후는 교회 개혁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파르마 주교인 카달루스를 개혁가들이 선출한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 맞서는 대립 교황(호노리우스 2세)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황후가 호노리우스를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렉산데르는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교황제). 황후의 어리석은 교회 정책은 동기가 모호한 굴욕적인 국내 정책과 맞물렸다. 황후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왕의 소유지를 할양함으로써 왕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던 물질적 토대를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귀족들의 탐욕을 부추겼다.

갈수록 커지는 불만은 1062년 4월에 쾰른 대주교 안노가 주도한 군주들의 음모로 절정에 이르렀다. 카이제르스베르트에서 궁정회의가 열렸을 때, 안노 대주교는 어린 왕을 납치하여 배에 태워 쾰른으로 데려갔다. 하인리히는 라인 강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아그네스 황후는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고, 정부는 안노 대주교의 손에 넘어갔다.

안노는 알렉산데르 2세를 승인하여 교회와 독일 궁정의 불화를 해결했다(1064). 그러나 안노는 독재적이고 융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소년 왕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준 브레멘 대주교인 아달베르트가 점점 득세하여 결국에는 왕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아달베르트는 이 영향력을 함부로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1065년 성년이 된 하인리히는 1066년초에 그의 궁정 출입을 금지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왕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지만, 왕은 나라를 다스릴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제국 정부에 일어난 변화의 영향을 받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가정 교사들의 이기심, 측근들의 무절제한 성격,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준 납치 경험 때문에 왕은 사춘기에 정신적 안정을 얻지 못했다.

왕은 권력을 좋아해 이때문에 무모하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잘리어 왕조 모든 통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결혼한 지 3년 뒤인 1069년에 그는 아내 베르타와 이혼할 작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이 항의하자 그는 이혼 계획을 포기했으며 그의 변덕스러운 처신은 개혁가들의 불만을 샀다. 이무렵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이 문제는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줄곧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머니가 섭정을 맡고 있는 동안 땅을 마음대로 분배해버린 뒤, 하르츠 산맥에 왕의 소유지를 늘리고 성을 세워 그 땅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성들을 슈바벤 미니스테리알(ministerial : 왕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고위관리)들에게 넘겨주었다. 작센의 농민과 귀족들은 오래전에 귀족들이 차지했거나 쓸모 없어진 왕의 권리를 하인리히가 무자비하게 되찾은 것에 흥분했다. 하인리히는 소요를 막기 위해 작센 공작 마그누스를 투옥하고, 널리 존경받는 바이에른의 오토에게 왕의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씌운(1070) 뒤 바이에른 공작령을 박탈했다.

그러자 작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073년에 급속히 퍼졌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보름스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는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인 벨프 1세(또는 4세) 및 슈바벤 공작 루돌프와 협상을 벌인 뒤 1073년의 반란자들을 사면해야 했고, 1074년 2월에 맺은 최종 강화조약에서는 왕의 하르츠 성을 파괴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성을 파괴하면서 교회와 왕자의 무덤까지 모독하자, 하인리히는 강화조약을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제국 전체의 지지를 얻었고, 1075년 6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작센 사람들을 굴복시켰으며 이 사건 때문에 군주들은 크리스마스 때 1세밖에 안 된 하인리히의 아들 콘라트의 왕위계승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벨프 왕조).

성직 임명권 문제

이 반란은 하인리히와 교항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밀라노에서 이 도시의 부패한 고위 성직자들을 개혁하는 데 헌신하는 파타린 일파가 독자적으로 대주교를 선출했고, 교황은 이를 승인했다. 하인리히가 이에 맞서서 롬바르디아 주교들로 하여금 그가 지명한 사람을 밀라노 대주교에 임명하게 하자, 교황은 주교들을 파문했다. 그래도 하인리히는 굴복하지 않았다. 작센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 비로소 그는 교황과 협상할 각오를 굳혔다.

1073년에 그는 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밀라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겸손하게 요청했다. 그리하여 왕은 자신의 성직 임명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파타린 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소집된 로마 종교회의는 밀라노에서 속인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

그후 그레고리오는 하인리히를 교회 개혁 문제에서 동맹자로 간주했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을 계획할 때, 로마 교회의 방어를 왕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작센인들을 물리친 뒤에는 교황과 맺은 협정을 취소하고 그의 궁정 신부를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해도 될 만큼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성직 임명권에 대한 협정 위반은 왕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교황은 사울 왕의 슬픈 운명(사울 왕이 교회를 대신한 예언자 사무엘을 저버린 뒤에 겪은 운명)에 대해 경고하는 한편, 성직 임명권 문제에 관해 협상하자고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서임권 논쟁). 하인리히는 1076년 1월 1일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황을 폐위했다.

그리고 26명의 주교들을 급히 보름스에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교황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라고 설득했다. 이런 충동적인 반응으로 말미암아, 그는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던 밀라노의 성직 임명권 문제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분쟁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오는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왕의 신하들이 왕에게 지켜야 할 충성 서약을 해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런 조치는 왕을 폐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보름스 회의에 참석했다가 파문당한 많은 주교들이 교황에게 굴복했고, 왕은 귀족들의 새로운 저항에 직면했다. 1076년 10월 군주들은 트리브르에서 새 국왕 선출을 의논했다. 하인리히는 1년 이내에 파문을 해제받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국왕 선출을 미루게 할 수 있었다.

최종 결정은 교황도 초청받은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내려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몰래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로 가서, 그레고리오 7세 앞에서 참회를 하여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당시에는 이것이 왕의 정치적 성공으로 여겨졌다. 반대파가 교회법에 입각하여 왕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은 변화를 의미한다. 참회를 함으로써 하인리히는 교황이 내린 조치의 적법성을 인정했고, 교회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권위를 가졌던 왕의 전통적 지위를 포기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그후 영원히 바뀌었다(가톨릭 교회).

그러나 군주들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한 원래의 합의가 깨졌다고 생각하여 하인리히의 퇴위를 선언했다. 1077년 3월 그들은 하인리히 대신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왕으로 선출했고,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작령과 슈바벤 공작령을 몰수했다.

그는 이 두 공작령의 농민과 시민들한테서 지지를 받은 반면, 루돌프는 주로 작센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하인리히와 루돌프 사이의 지지부진한 싸움을 3년 동안 지켜보고만 있다가, 독일 교회의 개혁을 계속하기 위해 결정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1080년 3월에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는 속인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고, 하인리히를 다시 파문하고 퇴위시켰으며, 루돌프를 왕으로 승인했다. 이번에 파문 조치를 취한 이유는 1077년에 제시한 이유만큼 타당하지 못했고, 그때까지 교황에게 호의적이었던 많은 귀족들은 성직 임명 금지가 교회와 수도원의 후원자인 그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황에게 등을 돌렸다.

하인리히는 그레고리오를 폐위하고 브릭센(브레사노네)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라벤나 대주교인 구이베르트를 교황으로 지명하는 데 성공했다. 1080년 10월에 루돌프가 죽음으로써 반대파 군주들이 구심력을 잃어버리자, 후방에 있는 적들의 위협에서 해방된 하인리히는 교회와의 싸움을 군사적으로 결정짓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1081년과 1082년에 로마를 공격했지만 실패한 뒤, 1084년 3월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구이베르트는 클레멘스 3세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고, 1084년 3월 31일에 하인리히에게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다. 정통 교황인 그레고리오는 살레르노로 도망쳤다가, 1085년 5월 25일 그곳에서 죽었다. 수많은 추기경들이 클레멘스 편에 가담했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황제는 독일로 돌아갔다. 1087년 5월에 그는 아들 콘라트를 왕위에 앉혔다. 작센 사람들은 이제 하인리히와 화해했다.

하인리히는 클레멘스 편에 가담하지 않은 주교들을 왕에게 충성하는 주교들로 교체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그후의 위기

그레고리오 7세의 도피와 죽음, 그리고 로마에 있는 클레멘스 3세의 존재는 교회 개혁운동에 위기를 초래했지만, 교회는 우르바누스 2세(1088~99 재위) 시대에 이 위기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1089년에 우르바누스 교황은 17세의 바이에른 공작 벨프 5세와 43세의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결혼을 주선했다. 마틸다 백작 부인은 교회 개혁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 결혼으로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에 있는 하인리히의 반대자들은 동맹을 맺었다. 하인리히는 1090년에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092년에 참패를 당하자 롬바르디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 반란의 선봉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콘라트였다.

롬바르디아인이 이탈리아 왕으로 세운 콘라트의 반란은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이탈리아의 북동부 구석에서 포위되어 독일과 연락이 끊겼다. 1087년 첫 아내 베르타가 죽은 뒤 1089년에 결혼한 2번째 아내인 키예프의 프락세디스가 그를 떠나, 중대한 혐의로 그를 고발했다. 벨프 5세가 1095년에 마틸다와 헤어지고, 퇴위당한 그의 아버지 벨프 4세가 1096년에 다시 바이에른을 봉토로 받은 뒤에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1097).

독일에서는 개혁과 교황에 대한 공감이 황제에 대한 충성을 더 이상 배제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차츰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고, 1098년 5월에는 군주들이 불충한 콘라트 대신 그의 둘째 아들 하인리히 5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권위를 완전히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교황과의 화해는 여전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하인리히가 클레멘스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했다. 클레멘스는 1100년에 죽었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을 지지하는 파스칼리스 2세(1098~1118)는 하인리히와 협정을 맺기를 꺼렸다.

마침내 황제는 파문이 해제되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중요한 귀족들 사이의 모든 분쟁을 4년 동안 금지했다(1103). 그러나 교회와의 화해가 실현되지 않자 다시 소요가 시작되었고, 귀족들은 황제가 자기 아들을 위해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는 군주들과 다투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바이에른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아버지를 희생하여 자신의 왕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1104년에 아버지인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쾰른으로 달아났지만, 마인츠에 갔다가 아들에게 붙잡혀 투옥당했다. 황제는 1105년 12월 31일에 퇴위했다. 이것은 겉으로는 자발적인 퇴위였지만, 실제로는 아들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리에주로 달아난 다음 로렌 사람들과 함께 1106년 3월 22일에 비제 근처에서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찔렀다. 하인리히 4세는 8월 7일 리에주에서 갑자기 죽었다.

시신은 슈파이어로 옮겨져 아직 신에게 봉헌되지 않은 한 예배당에 한동안 안치되어 있다가 1111년에 가족 납골당에 묻혔다.

평가

동시대인들이 하인리히에 대해 내린 평가는 그들이 어느 파에 속해 있었느냐에 따라 서로 달랐다.

반대자들은 키가 크고 잘생긴 이 왕을 폭군(이단의 교활한 우두머리)으로 생각했고, 그의 죽음을 환호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조자들은 그를 경건하고 관대한 지적인 통치자,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 신앙심 깊은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법률과 정의에 대해 건전한 의식을 가진 이상적인 왕의 화신으로 찬양했다. 하인리히 4세는 왕의 전통적인 권리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농민과 시민 및 장관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귀족들에 대한 왕의 지위는 강화할 수 있었지만, 성직 임명권을 둘러싸고 개혁파 교회와 계속 다툰 것은 결국 교황에 대한 왕의 영향력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