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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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180년 이전에 작센이라는 명칭은 200~700년경 독일의 작센족이 정복했거나 병합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지역은 홀슈타인과 지금의 독일 니더작센 주에 해당하는 엘베 강 하류의 서쪽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작센족은 그곳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서진해 5세기에는 브리튼 섬까지 진출했다. 8세기말 작센족은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작센 왕조는 하인리히, 아스카니에르, 비텐베르크, 알브레히트 등의 가문이 이어받다 1871년 새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작센 영방은 히틀러의 제3제국과 독일 민주공화국 아래서 하나의 주로 존속되다가 1952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라이프치히·카를마르크스슈타트·드레스덴·콧부스 지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작센 주의 위치
작센 주의 위치

1180년 이전에 작센이라는 명칭은 200~700년경 독일의 작센족이 정복했거나 병합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지역은 홀슈타인과 지금의 독일 니더작센 주에 해당하는 엘베 강 하류의 서쪽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작센족은 그곳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서진해 5세기에는 브리튼 섬까지 진출했다. 8세기말 작센족은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843년 작센은 동프랑크, 즉 독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0세기초 리우돌핑 왕조 아래서 세습 공작령으로 부상했으며, 919년에는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024년까지 독일을 지배한 작센 왕조, 즉 오토 왕조를 창건했다(→ 작센 왕조). 이 시기에 독일인들은 동쪽으로 슬라브족의 영토까지 진출했다.

961년에 작센의 공작작위는 빌룽 가문으로 넘어가 1106년까지 그 가문이 작위를 유지했으나 그후 1142년 벨프가의 하인리히에게 넘어갔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의 공민권을 박탈했는데 이때 공작령이 해체되었다. 따라서 멀리 떨어진 작은 두 영방만이 작센이라는 명칭을 간직하게 되었는데, 홀슈타인 남동부의 작센라우엔부르크와 엘베 강 중류 부근(지금의 라이프치히 북쪽)의 작센비텐베르크가 바로 그들이었다. 두 영방국가는 아스카니에르 가문에 의해 통합되었다가 1260년 2개의 아스카니에르 가문으로 다시 나뉘었다.

작센 공작은 13세기 중엽부터 선제후(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권리를 가진 제후)로 인정을 받았다. 두 분가가 이 권리를 둘러싸고 벌인 분규는 1356년에 비텐베르크 분가에게 유리하도록 타결되었다. 라우엔부르크 분가는 1689년까지 존속하다가 그후 하노버에 병합되었다(라우엔부르크가, 비텐베르크가).

비텐베르크 분가가 1422년에 사라지자, 작센의 공작작위와 선제후 지위는 마이센의 후작으로 베틴가(家)의 일원인 프리드리히 1세에게 주어졌으며, 작센이라는 명칭은 오스터란트(라이프치히 주변 지역)와 라우자츠·튀링겐의 상당 부분을 포함한 베틴가의 모든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프리드리히가 죽자(1428) 베틴가는 유산 분배를 둘러싸고 분규에 휩싸였다. 1485년 프리드리히 2세(1464 죽음)의 아들인 알브레히트와 에른스트는 라이프치히 조약을 통해 알브레히트(동부) 작센 영지와 에른스트(서부) 작센 영지로의 영구적인 분할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알브레히트 분가의 영지는 마이센 후작령(수도는 드레스덴)과 북부 튀링겐으로 이루어졌다(서부 영지들에 대해서는 '작센 공작령' 항목 참조).

16세기에 알브레히트 분가는 튀링겐과 비텐베르크의 에른스트 분가로부터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얻었다.

선제후 하인리히(1541 죽음)와 모리츠(1553 죽음)는 루터교를 채택했다. 아우구스트(1553~86 재위)는 알브레히트 작센의 법률들을 편찬했고 수도인 라이프치히를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게오르크 1세(1611~56 재위)는 30년전쟁(1618~48)중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조직을 주도했으나, 이 기간에 알브레히트 작센은 점점 프로테스탄트 독일을 주도하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위세에 눌리기 시작했다.

1697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1694~1733 재위)는 폴란드의 왕이 되어 작센과 쇠퇴해가는 폴란드 왕국 간의 경제적 결속을 도모했으나 그것은 1768년에 끝나버렸다. 나폴레옹은 1806년 작센을 정복해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후 작센은 나폴레옹의 가장 충성스런 맹방 중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작센의 영토는 빈 회의(1814~15)에서 전승국에 의해 대폭 축소되었다.

프로이센은 비텐베르크, 토르가우, 북부 튀링겐, 그리고 라우자츠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이들은 프로이센의 작센 지방이 되었고, 축소된 작센 왕국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830년에 일어난 봉기의 결과로 작센 왕국은 1831년 헌법을 인정했다.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1836~54 재위)는 1848년의 혁명적 봉기로 폐위되었으나 1주일 후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권좌에 복귀했다. 1871년 작센 왕국은 새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후 수십 년 동안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작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작센의 군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폐지되었고(1918), 작센은 바이마르 공화국(1919~33)의 독립 주(Land)로서 공화주의 헌법을 채택했다. 작센 영방은 히틀러의 제3제국(1933~45)과 독일 민주공화국 아래서 하나의 주로 존속되다가 1952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작센 왕국은 라이프치히·카를마르크스슈타트(이전의 켐니츠)·드레스덴·콧부스 지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또한 과거 프로이센의 작센 지방은 마크데부르크·할레·라이프치히·콧부스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