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공작령

작센 공작령

다른 표기 언어 Sachsische Herzogtumer

요약 독일 중동부의 튀링겐 지방에 있던 여러 국가.
(영). Saxon Duchies/Ernestine Duchies. Ernestinisch Herzogt대체이미지mer라고도 함.

1485~1918년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계(系) 성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오늘날 그 영토는 옛 동독의 남서부와 바이에른 북부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1826년부터 4공작령, 즉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작령, 작센메닝겐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령, 작센알텐부르크 공작령,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이 있었다. 이들 공작령의 영토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때로는 프로이센과 같은 다른 영방국가의 영토를 포함하기도 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1831년에 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 1세를 배출함으로써 19~20세기에 유럽 최고의 명문 왕가 중 하나가 되었다. 또다른 성원인 알브레히트는 1840년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했고, 그들의 후손 가운데 5명이 20세기의 영국 국왕으로 즉위했다. 또 그 가문 출신 페르디난트는 1836년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는데 이들로부터 시작된 왕가는 1853~1910년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1887년 선출에 의해 즉위한 불가리아 군주도 이 가문 출신이다. 이 불가리아 왕가는 1946년까지 불가리아를 통치했다. 베틴 가문은 13세기 중반기부터 튀링겐 지방의 영토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 가문은 1243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알텐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플라이스네를란트를 양도받았으며, 1256~63년 전쟁이 끝난 뒤인 1264년에는 튀링겐을 획득하고 아이제나흐 지방와 고타 지방을 지배했다.

1300년에는 아른스하우크의 상속녀와의 혼인으로 노이슈타트를 얻었고, 1347~74년에는 헨네베르크 가문으로부터 코부르크, 오를라뮌데 가문으로부터 바이마르를 획득했다. 또 1389년에 슈바르츠부르크로부터 잘펠트를, 1410~27년에는 푀크테 가문으로부터 바이다를 각각 매입했다. 1423년 베틴 가문은 작센 선제후(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자격을 가진 제후) 국가로 승격되면서 그들이 튀링겐에서 발원했음을 보이기 위해 '작센'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른스트 공작령들은 1485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인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가 작센 선제후 국가를 분할하면서 생겨났다.

선제후 칭호는 에른스트와 그의 아들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1486~1525 재위)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프리드리히 3세는 뒤에 마르틴 루터의 후원자가 된 인물이다. 에른스트계는 1547년에 선제후 칭호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지만 바이마르(예나 포함)·고타·아이제나흐·잘펠트·코부르크를 유지했고, 뒤에는 알텐부르크·아이젠베르크(1554)를 비롯해 메닝겐을 포함한 그외 다른 지역(1583)을 회복했다.

에른스트의 영토는 이때부터 19세기초에 이를 때까지 분할되고 다시 합쳐지기를 계속했다.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는 카를 아우구스트(1775~1828 공작)로서 그는 괴테·헤르더·실러 같이 바이마르를 독일의 지적 중심지로 만든 독일의 위대한 작가들의 후원자였다.

에른스트의 모든 공작령들은 1807년 나폴레옹이 조직한 라인 연방에 통합되었고, 1815년에는 독일 연방을 이루는 여러 주권 국가들이 되었다. 1866년에 일어난 7주 전쟁 때 작센메닝겐힐드부르크하우젠은 오스트리아 편에 섰고, 그외 다른 공작령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 편에 섰다. 이들 공작령은 모두 1867년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고, 1871년에는 독일 제국에 가입했다.

1918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에른스트 통치자들은 퇴위했다. 1920년에 코부르크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새로 생긴 튀링겐 주에 편입되었다(코부르크는 바이에른 주에 편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