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5세

하인리히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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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86. 8. 11
사망 1125. 5. 23, 프리슬란트 위트레흐트
국적 독일

요약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군주, 독일 왕(1099~), 신성 로마 제국 황제(1111~25 재위).
(영). Henry Ⅴ.

제국에서 참된 평화를 회복했고, 플랑드르·보헤미아·헝가리·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가 교황과 벌인 성직 임명권 논쟁을 계속했다.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첫번째 아내인 토리노의 베르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황제가 된 뒤, 하인리히의 형 콘라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1099년 1월 6일에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104년에 교황과 아버지가 충돌했을 때, 그는 바이에른 및 작센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대항했다(가톨릭 교회). 교회 개혁의 추진자로서 기꺼이 교황과 타협하고자 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아버지를 포로로 잡아 강제로 퇴위시켰지만(1105. 12. 31), 1106년 8월 7일에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자신의 왕위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이미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전령을 보내어 독일로 오도록 초청한 뒤였다.

그는 교황이 주교들에 대한 완전한 임명권을 자기한테 준다면 교황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황은 이 조건을 거부했다. 그래도 하인리히는 독일에서 통치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헝가리(1108)와 폴란드(1109)에 대한 원정은 실패했지만, 1110년에 보헤미아에 대한 독일의 종주권을 재확인했다. 1110년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와 약혼했고, 1114년에 결혼했다.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교황과 합의를 보는 것은 하인리히에게 매우 중요했다.

교회는 종교적 권리만이 아니라 세속적 권리도 갖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1110년에 로마로 가 다시 성직 임명권을 요구했다. 교황은 하인리히가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면, 그 대가로 독일 교회에 명을 내려 왕에게서 받은 땅과 권리를 모두 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이것은 하인리히에게는 만족스러운 흥정이었지만, 독일 주교와 군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자 하인리히는 교황을 투옥하고, 강제로 성직 임명권을 받아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에게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는 아버지가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룬 데 만족하여, 1111년 8월 7일에 슈파이어에서 아버지를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다. 독일에서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니스테리알레'(ministeriale)로 알려진 공직자 계급과 도시에 호의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군주들의 반발을 샀다.

곧 반란이 일어났다. 마인츠 대주교인 아달베르트는 라인란트 고지지방에서 소요를 선동했고, 작센에서 수플린부르크의 로타르(나중에 로타르 3세로 왕이 되었고, 로타르 2세로 황제가 되었음)가 일으킨 반란은 1115년에 하인리히의 참패로 끝났다.

교회 내부에도 하인리히를 강력히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교황은 하인리히와 맺은 협정을 지켰지만, 로마에서 열린 종교회의는 하인리히에게 주어진 특권을 무효로 선언했다. 독일에 온 교황 특사들은 하인리히의 파문을 선언했고, 그는 결국 독일 주교들의 지지를 잃었다. 그는 1115년에 죽은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1116년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성직 임명권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 계속 협상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118년에 교황 젤라시오 2세가 파스칼 2세의 후임자로 선출되자, 하인리히는 그레고리우스 8세를 대립 교황으로 내세웠지만 이 책동은 실패로 끝났다.

1118년에 하인리히는 자신을 폐위하겠다고 위협하는 독일 군주들의 최후 통첩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그는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젤라시오 2세의 후임자인 갈리스토 2세가 협상을 제의했을 때 하인리히는 완전한 성직 임명권을 달라는 요구를 철회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협상은 실패했다.

국내의 어려움이 점점 심해지자, 군주들이 마침내 주도권을 잡고 교황과 보름스 협약(1122)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왕은 주교들에게 주교의 상징인 지팡이와 반지를 수여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출에 동의해야 했으며, 교황은 왕에게 주교 선거에 입회할 권리와 선거에서 결정이 나지 않을 경우 결정권을 행사할 권리 및 주교로 선출된 사람에게 주교 관구의 재산을 하사할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독일에만 적용되었고,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에서는 성직에 임명된 뒤에 재산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재산 하사는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였다. 그후 하인리히는 군주들, 특히 로타르와 벌인 싸움에서 실패했다. 이무렵,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쟁에 말려들었다. 잉글랜드의 왕위 후계자가 죽자, 헨리 1세의 딸이며 하인리히의 아내인 마틸다가 여자 상속인이 되었고, 덕분에 독일-잉글랜드 제국이 탄생할 가망이 있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쟁에서 장인을 지지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하인리히는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후계자는 일찍이 그의 적이었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였는데, 그는 교회의 노력으로 독일 왕에 선출되었다.

통치자로서 하인리히 5세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지만,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일을 벌여놓았다.

군주들과 동맹을 맺고 교회 권리의 옹호자로 자처하여 아버지를 퇴위시켰다. 그러나 일단 권좌에 오른 뒤에는 아버지의 대의명분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낼 만큼 교회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독일 교회에 대한 왕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굳혀준 1122년의 타협은 주로 독일 군주들이 얻어낸 것이었다. 그들은 왕과 교회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왕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 사실은 그후 독일 역사를 지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