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7세

그레고리오 7세

다른 표기 언어 그레고리오7세 , Gregorius VII 동의어 제157대 교황,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
요약 테이블
출생 1020년, 교황령 소아나 근처
사망 1085년 5월 25일, 살레르노 공국 살레르노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영적인 지도자였으며 교회의 여러 악습을 비난했다. 1075년부터 평신도의 서임권(평신도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상징물을 부여하는 권리) 문제를 놓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결했다. 알렉산데르 2세의 후임 교황에 선출되어, 그레고리오 7세라는 이름을 얻었다.그레고리오 7세의 재임기간은 교회개혁과 쇄신이 그 기조를 이룬다.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을 비판하였으며, 이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가 사면하면서 교황의 영적 권위를 확보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은 후에 후에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려졌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교황피선
  4. 성직임명권논쟁
  5.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
  6. 재임 말기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개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영적인 지도자였으며 교회의 여러 악습을 비난했다.

1075년부터 평신도의 서임권(평신도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상징물을 부여하는 권리) 문제를 놓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결했다.

초기생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힐데브란트는 어린 시절에 로마로 가서 삼촌이 원장으로 있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비록 수사가 되었으나 그뒤에도 라테란 궁에 있는 스콜라 칸토룸(음악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 학교는 성직자를 위한 학교였는데 그가 2명의 로마 귀족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평신도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 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46 재위)가 된 조반니 그라지아노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힐데브란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았다. 1046년 수트리 공의회에서 황제 하인리히 3세(1017~56)가 그레고리오 6세를 폐위하자 힐데브란트는 폐위된 자기 후견인과 함께 유배지인 독일로 갔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황제 하인리히 3세의 호감을 산 힐데브란트는 교황 레오 9세(1049~54 재위)의 소환을 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레오 9세가 조직하고 있던 개혁단체들 가운데 하나를 맡았는데, 이 단체는 후에 11세기 교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마 개혁단체의 주요 구성원이 된 힐데브란트는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73 재위)의 재임기간중에 막후 실력자가 되었다.

로마의 추기경이자 대부제에 오른 그는 유명한 성 바울로 수도원을 개혁함으로써 자신의 수도사적인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한편 로마를 비롯한 주변지역에서 심한 혼란을 일으키던 하급귀족들을 제압해 민중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교황사절로 몇 차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투르 교회회의에 교황사절로 파송된 일로, 이 회의에서 베렝가르는 성체에 예수가 실제로 현존해 있다는 신앙을 고백했다.

교황피선

압도적인 찬성으로 알렉산데르 2세의 후임 교황에 선출되어(1073. 4. 22) 그레고리오 7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1073년 6월 30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축성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재임기간은 교회개혁과 쇄신이 그 기조를 이룬다(→ 그레고리오의 개혁). 그의 인격과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영적 가치들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처음 성직자가 될 때부터 정치가로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영적 지도력에서는 남다른 면모를 지녔다.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약탈을 자행하던 프랑스 노르만족을 저지하고 교황령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나(1030~71경), 싸움에 능하고 탐욕적인 프랑스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또한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 일어난 분열이 초기단계일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국가에게 십자군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방 그리스도교도들을 돕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성직임명권논쟁

그레고리오는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세속군주들이 성직임명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주는 권리)을 놓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1050~1106)와 대립한 일로 가장 잘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그 문제를 확대시킨 장본인이지만 원래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회개혁에 있었으며 세속군주들은 마땅히 개혁 작업을 뒷받침해 주리라고 믿었다. 개혁의지를 갖고 있던 하인리히 3세(1017~56)가 뒷받침해주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젊은 황제 하인리히 4세와 함께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레고리오는 평신도 성직임명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075년 소집한 로마 교회회의에서 그는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을 맹렬히 비판하여 그의 사후까지 계속될 긴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교회회의에서 그레고리오는 하인리히의 고문 5명을 파문하였고, 1075년말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하인리히는 반란을 일으킨 작센인들을 평정하여 더 큰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분란은 줄어들었다. 밀라노에서는 평신도 개혁단체인 파타리파의 지도자 엘렘발드가 피살되어 반개혁당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인리히는 공개적으로 밀라노의 반개혁당을 지원하였고, 합법적인 주교 아토(1085년에 활동)의 자리에 새 주교를 임명했으며, 나아가 스폴레토와 페르모에도 주교들을 임명하였다.

1075년 그레고리오는 성 마리아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 강론을 하던 중 로마 귀족 켄키우스에게 습격을 받아 가벼운 부상을 입은 채 납치되었다.

그레고리오를 매우 존경하던 로마 시민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합쳐 켄키우스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큰 위협을 느낀 켄키우스는 교황을 풀어주었으며, 교황은 성 마리아 성당으로 돌아가 미사를 계속하였고, 그레고리오는 켄키우스를 살려주었다.

1075년 12월 하인리히에게 편지를 보내 성직임명권 문제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하인리히는 교황이 독일에 파견한 사절들에게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공연히 그레고리오를 모욕했으며, 자기편 주교들과 함께 그레고리오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교황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북부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1076년 로마 교회회의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찬탈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하인리히는 이제 교황이 아닌 가짜 수사 힐데브란트에게 보내노라……"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

이러한 문서가 교회회의에서 낭독되자 회의장은 분노로 들끓었고, 그레고리오는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교황과 교회회의는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교황은 하인리히가 폐위되었음을 공포했다. 그레고리오는 메츠의 주교 헤르만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하인리히에게 취한 행동을 변호했다. 즉, 황제도 평신도이므로 교황은 그를 소환하여 해명하게 할 수 있으며, 성서와 교부들의 글, 그리고 역사를 들어 자기 입장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파문은 효과가 있어서 하인리히 지지자들의 수는 줄어들었고, 지칠 줄 모르는 작센인들까지 다시 무장봉기했다.

유력한 제후들이 하인리히를 폐위시키고 다른 황제를 선출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제후들이 제안한 조건은 매우 혹독했지만 교황사절의 설득으로 좀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로써 하인리히의 운명은 1077년 2월 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릴 제후들의 회의에 참석하는 교황에게 맡겨졌고, 하인리히는 교황에 대한 반역을 철회하고 파문당한 그의 고문들에게도 사면을 빌도록 촉구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카노사에서 벌어진 유명한 사건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색인:카노사의 굴욕).

1077년초 그레고리오는 알프스 산맥을 넘기 위해 북쪽으로 갔으나 독일인들이 보내주기로 약속한 호위병들은 보이지 않고 하인리히가 이탈리아로 급히 오고 있다는 소식만 받게 되었다.

크게 놀란 교황은 발길을 돌려 카노사 성으로 갔다. 이 성은 그의 신실한 친구이자 지지자인 투스카니의 백작부인 마틸데(1046경~1115)의 성채였다. 그러나 교황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기 위해서 온 하인리히는 정월 엄동설한에 사흘이나 성 밖에 서서 사면을 빌었고, 마틸데 백작부인과 클뤼니 수도회의 대수도원장 성 후고도 그를 사면하도록 설득했다.

그레고리오는 난처했다. 독일 귀족들과 주교들은 하인리히의 운명을 토의하려고 그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반면에 이곳에서는 하인리히가 추위를 무릅쓰고 애처롭게 사면을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마음은 정치가보다는 사제의 입장으로 기울어 파문당한 하인리히를 사면하였다.

그가 하인리히를 사면한 행위는 결국 재앙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서 신망을 얻게 해주었다.

사면을 받은 하인리히는 곧 자신을 합법적인 왕으로 자처했고, 그레고리오는 다소 변명조로 독일의 제후들에게 자기 행동을 설명하는 글을 보내야 했다. 독일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취소하고 3월 13일 포르흐하임에서 또다른 회의를 소집했다. 그레고리오는 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하인리히는 물론 그 반대파 지도자인 라인펠덴의 루돌프(1080 죽음)도 그의 참석을 바라지 않았다.

그레고리오는 소집된 귀족들과 주교들에게 사절을 보내 교황이 참석할 때까지 선거를 하지 말도록 설득했지만, 그들은 먼저 회의를 진행하여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하였고, 이로써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레고리오는 하인리히와 루돌프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기 사절들을 소환했는데 하인리히가 사절들 가운데 하나를 감옥에 가두자 다른 사절이 하인리히를 파문하였다. 하인리히는 이 파문을 교황이 재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사들을 보내 교황을 설득했다.

교황은 그들의 설득에 넘어갔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대회의를 소집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078~80년까지 2년간 중재자 입장을 유지했지만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임 말기

1080년 교황은 하인리히가 비타협적임을 깨닫고 한번 더 그를 파문함과 동시에 폐위를 공포하였다.

이것은 전쟁을 뜻하였다. 하인리히는 독일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에 반대하는 롬바르드(이탈리아 북부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레고리오는 강력한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 로베르트 기스카르(1015경~85)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인리히파 독일 주교들은 브릭센(이탈리아)에 모여서 그레고리오의 폐위를 선언했다. 그들은 그레고리오 대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교황으로 선출했고, 그는 클레멘스 3세(1080, 1084~1100)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라인펠덴의 루돌프가 엘스터 전투(1080)에서 전사하자 대세는 하인리히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걸림돌이 없어진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와 마틸데 백작부인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마를 포위했다. 그레고리오는 황제에 대한 파문을 재확인했다. 그는 바바리아의 벨프 1세(1101 죽음)와 제후들에게 루돌프의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촉구하여 독일에서 하인리히에 대한 반대세력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하인리히는 괘념치 않고 1081, 1082, 1083년에 로마를 포위했다. 여전히 완강한 그레고리오는 1083년 11월 라테란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해결을 시도했으나 하인리히는 일부 주교들의 참석을 막았다.

교회회의에 참석한 사제들은 티베르 강 건너에 위협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하인리히의 군대를 깊이 의식하고서 그레고리오에게 이런 시기에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교황은 교회회의 참석을 방해한 모든 자에 대해 일괄적으로 파문하는 것으로 그쳤다. 평화를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1084년 3월 21일 마침내 하인리히 군대는 로마 시를 함락시켰다. 그레고리오는 산탄젤로 성(城)으로 피신했고, 라벤나의 기베르(클레멘스 3세)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으로 등극하는 것을 분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기베르는 반대로 하인리히에게 황제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나 원군이 오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던 로베르 기스카르가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을 구출했다. 그레고리오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인과 노르만인이 싸우는 동안 로마 시의 많은 부분이 불타버린 것이다. 비통에 젖은 로마인들 사이에 이제는 평판이 좋지 않게 된 그레고리오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함께 로마를 떠났으며 1085년 살레르노에서 죽었다. 한 전기작가는 그가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망명지에서 죽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