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9세

레오 9세

다른 표기 언어 Saint Leo IX 동의어 브루노 폰 에기스파임-다게스부르크, Bruno, Graf von Egisheim und Dagsburg
요약 테이블
출생 1002. 6. 21, 상로렌 알자스 에기스하임
사망 1054. 4. 19,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축일은 4월 19일. 중세 라틴 교회의 수장(1049~54 재위).
본명은 Bruno, Graf von Egisheim und Dagsburg.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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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교황청 개혁
  4. 1054년의 분열

개요

재위기간에 교황청은 서유럽의 초점이 되었고,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났다.

초기생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툴에서 교육을 받고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이 된 뒤 1027년 9월 9일 25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 축성을 받았다.

개혁에 큰 뜻과 열정을 품고 있던 그는 교구 내의 주요 수도원 수사들과 재속(在俗)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자주 모임을 갖고 끊임없이 권고하여 그들의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47세 때 당시 관습에 따라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교황임명을 받았으나 그는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에 의해서 선출되기를 고집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순수한 교회문제에 평신도, 특히 황제들의 고질적인 개입을 분명하게 반대한 것이었다.

그뒤 로마 시민들의 찬성을 확인하고 1049년 2월 12일 교황 자리에 올랐다.

교황청 개혁

레오 9세는 성직자 혼인, 성직 매매, 평신도 서임권(敍任權:평신도 군주가 성직을 수여하는 일) 등 그가 악습으로 판단한 행위들을 뿌리뽑겠다는 뜻을 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 교회를 그리스도인 사회 및 생활의 중심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툴의 주교로 있을 때 알던 사람들을 로마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혁을 하려면 어떤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혀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일류 학자들과 행정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무아엔무티에의 욍베르, 로렌의 프레데리크(나중에 교황 스테파노 9세가 됨), 르미르몽의 위그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추기경이 되었다.

클뤼니 지방의 유명한 수사 힐데브란트도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왔는데, 그는 나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어 레오가 시작한 개혁을 완성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지지자들과 더불어 로마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레오는 그밖에도 베드로 다미아노와 클뤼니의 대수도원장 후고 같은 주요 성직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났고, 그들의 명성에 힘입어 인접 지역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리스도교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조치들이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았다.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 온 이 사람들이 일개 지역기관에 불과하던 교황청을 국제적인 실세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안목과 능력을 갖춘 이 집단은 교황제도의 이념을 사회적 실재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이념의 축은 교황이 이른바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 수석주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교황 군주제를 확립하겠다는 교회측의 표현이었다. 교황청 조직은 이때 크게 확대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교황청의 중추신경이 된 상서국(尙書局)이며, 이곳에서는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적용가능한 법률 초안과 먼 지역에 있는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교훈과 지시들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러한 법적 조치들은 금방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훗날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한 터를 닦아주었다. 레오 9세의 교황 재위기간에 이 추기경들은 점점 더 교황에게 친근한 고문 역할을 했으며, 몇 년 안에 '추기경단'으로 알려진 단체를 구성했다.

그당시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돈을 내고 주교가 된 사람들이 집행한 사제 서품의 합법성 여부였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대부분 성직 매매가 성품성사(聖品聖事:교회의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성사)를 매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레오 9세는 돈을 내고 사제가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서품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둘러싸고 논쟁서들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지만, 그 문제는 수십 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1050년 레오가 주재한 한 교회회의는 투르의 베렝가르(1088 죽음)가 제기한 성체성사에 대한 견해(빵과 포도주가 상징적으로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견해)를 이단설로 정죄했다.

레오 9세는 로마 바깥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교황이 수석주교임을 보여주는 데 전념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이탈리아·프랑스·독일·시칠리아에서 12번 이상 공의회를 열어 이전에 열린 공의회 및 교황의 법령들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고통을 주던 악습들을 뿌리뽑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이렇게 몸소 공의회에 참석해 사회를 맡은 일은 교황청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교황은 잦은 여행을 통해서 고위 및 하위 성직자들을 비롯해 일반인 가운데서도 유력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1054년의 분열

레오 9세의 재위기간중 발생했던 가장 중대한 사건인 동방교회와의 실질적인 분열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불행한 군사개입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020년대 시칠리아에 정착한 노르만족은 교황령의 존립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며 수차례 기습원정을 감행하여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레오는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손을 잡고 노르만족을 정벌하러 나섰으나, 하인리히가 손을 빼는 바람에 자기 휘하의 약하고 경험이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혼자 노르만족과 대치해야 했다.

노르만족은 교황군을 궤멸시키고 1053년 6월 18일에 교황을 포로로 잡았다. 비록 포로였지만 레오는 바깥세계와 접촉하거나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9개월 뒤에 풀려났다.

그러나 레오가 노르만족에 대한 정벌을 시도한 일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갈등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8세기 이래로 동방교회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오가 교황 수위권(首位權)을 강도 높게 선포한 것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케룰라리우스 미카일 1세가 도발적인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관계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미카일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서방) 교회들을 폐쇄했고 로마 교회에 대해 주로 성찬식에 관하여 심각한 교리적 비판을 가했다. 이에 대해 추기경 훔베르트는 로마의 수위권을 옹호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는 위조문서(서방에 대한 주권을 교황청에 부여한다는 내용)를 폭넓게 인용하면서 신랄하고도 맹렬히 총대주교를 비판했다.

1054년 4월 훔베르트는 사절단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총대주교·황제·사절 등과 여러 차례의 회의를 가졌으나 구체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자,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하기아소피아 교회 회중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로마를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해온 교황의 파문장을 제단에 올려놓았고, 이에 대해서 총대주교는 사절단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갈라지게 되었다.

이 분열은 중간에 잠시 화해된 적도 몇 번 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케룰라리우스 미카일 1세를 파문한 것이 레오가 죽은 지 3개월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유효한지의 여부는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로마 사절들은 교황의 사절들이었고 파문장은 교황의 통치방법이었다. 아무튼 그 파문은 오래 지속되어온 상황을 극적이고도 거창한 방법으로 공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레오가 죽은 뒤에 일어났지만, 공식적인 분열은 그의 재위기간중에 발생했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세 교황청 역사에 휴지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