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일 케룰라리우스

미카일 케룰라리우스

다른 표기 언어 Michael Cerularius
요약 테이블
출생 1000경, 콘스탄티노플
사망 1059. 1. 21, 콘스탄티노플 근처 마디투스
국적 콘스탄티노플

요약 그리스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1043. 3~1058. 11 재위).

1054년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가 정식으로 분리되는 교회분열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1054년의 교회 대분열). 성직자보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1043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에 의해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케룰라리우스는 정치 권력에 대한 야망과 동방교회 자치에 대한 경직된 신념을 가지고 노르만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비잔틴 제국과 로마 제국의 동맹을 이루려는 콘스탄티누스 9세의 노력을 방해했다. 1052년 콘스탄티누스가 교황 레오 9세에게 베푼 양보에 대한 보상으로, 케룰라리우스는 자기 교구에 있는 라틴 교회들에게 그리스의 언어와 전례를 따르도록 강요했고, 그들이 거부하자 이 교회들을 폐쇄하도록 명령했다.

1054년 교황 레오가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3명의 교황사절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을 때, 케룰라리우스는 그들과 만나기를 거부해 콘스탄티누스와 레오의 노력을 다시 방해했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레오가 죽자, 교황사절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의 추기경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는 교황의 자리가 공석이 된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보복했다.

1054년 7월 16일 훔베르트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케룰라리우스와 그 밑의 성직자들을 파문했다. 이에 대응하여 케룰라리우스는 교회회의(Holy Synod)를 소집하고 교황사절 모두를 파문했다. 이들을 화해시키려는 콘스탄티누스의 노력은 실패했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분열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케룰라리우스는 계속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콘스탄티누스에게 분열을 지지하라고 강요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인 이사쿠스 1세 콤네누스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사쿠스 1세는 1058년 그를 해임하고 추방했다. 그는 그뒤 곧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