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피

크리스피

다른 표기 언어 Francesco Cri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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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9. 10. 4, 시칠리아 리베라
사망 1901. 8. 12, 나폴리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정치가.

혁명활동을 전개하여 나폴리와 사르데냐-피에몬테에서 추방되었으나 이탈리아가 통일된 후 총리가 되었다. 시칠리아에서 성장하여 법학을 공부했으나 이곳의 상황에 실망을 느낀 크리스피는 나폴리로 가서 공화주의 선동가로 활동했다.

1848년 시칠리아 봉기를 주도하여 성공했으며, 새 정부에서는 의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1849년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낭 2세가 시칠리아 섬을 재정복하자 토리노로 피신하여 언론인으로 일했다. 1853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봉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추방되어 영국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공화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주세페 마치니를 만났다. 크리스피와 공화주의자들의 목적은 시칠리아에서 혁명을 일으켜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1859년 그는 봉기를 조직하기 위해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시칠리아를 2차례 방문했다. 봉기계획은 오랫동안 연기되었으나 1860년 5월 그는 주세페 가리발디를 설득해 '천인부대'로 알려진 의용군을 시칠리아에 침투시켜 그곳의 대중 봉기를 도왔다. 빠른 속도로 시칠리아 섬 전역을 장악한 가리발디는 스스로 독재자임을 선포하고 크리스피를 내무장관에 임명했다. 내무장관으로서 크리스피는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총리 카보우르 백작과 마찰을 일으켰다. 크리스피가 어쩔 수 없이 사임한 뒤 1860년 10월 가리발디가 점령했던 시칠리아와 나폴리는 새로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1861년 새 정부에서 시칠리아의 대표로 선출된 크리스피는 외교 수완이 부족한 변덕스럽고 비타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그는 공화국을 설립하는 것보다 군주제하에서라도 통일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1865년 마치니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군주제 옹호자들은 이전에 공화주의자였던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좌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1876년 크리스피는 국회의장이 되었다. 1877년에는 외무장관으로서 독일을 한 차례 방문했는데,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7년 12월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 내각의 요청을 받아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결혼계율을 위반했기 때문에 몇 달 만에 사임했다.

데프레티스가 죽은 후 1887년 8월 크리스피가 구성한 첫 내각은 자유주의적 개혁과 경제위기로 특징지어진다. 내무장관·외무장관·총리를 겸임하고 있던 그는 독재적 성향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독일과의 동맹(1882)을 갱신하고, 1889년 프랑스와의 무역을 단절시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그의 외교정책은 전혀 인기가 없었다. 1891년 그의 정부는 광범한 재정적자와 이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세금인상으로 실각했다. 그러나 1893년 12월 크리스피는 다시 총리가 되었다.

그는 경제상황을 개선시키면서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를 잔인하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진압했다. 또한 파멸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하여 홍해에 있는 몇몇 영지를 에리트레아에 편성시키고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1896년 아도와에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에게 참패당한 후 크리스피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같은 해 3월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