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령 네덜란드

스페인령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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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략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지역인 저지대 지방(Low Countries)의 남부에 있는 몇몇 스페인령 주(1579경~1713).

스페인령 네덜란드(Spanish Netherlands)
스페인령 네덜란드(Spanish Netherlands)

이 지역은 오랫동안 몇 가지 원인으로 외세의 지배에 시달려왔으나 당시 막 싹 트고 있던 칼뱅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피멘탈이 1567년 현지에 파견된 것도 바로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바 공작의 가혹하고 억압적인 조치(피의 법정) 및 중과세 정책은 즉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의 과오를 인정하고 1573년 그를 소환했다.

당시 대체로 가톨릭이 우세한 남부 주들은 스페인의 지배에 충성하고 있었으나 활기를 띠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자치에 대한 점증하는 열망에 영향을 받아 이들도 스페인에 대한 통일된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576년 북부와 남부 연합의 대표자들이 회동해 이른바 전국회의(States General)를 개최하여 겐트(Ghent) 강화조약을 발효시켰다. 그러나 3년이 못 되어 이 화약이 더이상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농업이 주종이던 가톨릭 성향의 남부와, 상공업이 발달하고 칼뱅주의가 압도하고 있던 북부 사이의 이질감은 매우 심각한 정도였다.

이와 함께 펠리페 2세는 외교적·군사적 수완이 뛰어난 알레한드로 파르네세(나중에 파르마 공작이 됨)를 자신의 대리자로 임명했다. 알레한드로 파르네세는 가톨릭교도의 단합을 강조하고 남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온건하게 처우함으로써 그 지역에서 신망을 얻었고 스페인의 지배를 재확립했다. 1585년 저지대의 북부와 남부 통합도 마무리되었다.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17세기초 경제적 성장과 지적인 면에서 번영을 누렸다.

리넨 산업은 스페인의 재정복으로 입은 손실을 재빨리 만회했으며 곧 과거의 생산수준을 능가했다. 플랑드르 지방의 미술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반 데이크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활약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겐트·브뤼헤 같은 주요도시들이 급속히 성장했으며 운하 건설, 새로운 종자와 농작물 수확방법의 도입으로 농업이 발달하는 등 17세기 중엽까지 번영이 지속되었다. 남부의 주들은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내정(內政)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독자적인 사법체제를 운영했으며 총독을 보좌하기 위한 평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또한 주아이외즈 앙트레를 받아 확고한 특권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교문제만은 엄격히 스페인 국왕의 고유 영역이었다.

사방에서 침략을 받고 있던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 사이의 완충지 역할을 해야 하는 불리한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결국 영토가 무참히 분할되었는데 북부 브라반트와 젤란트, 그리고 뮈즈 강 동부지역이 1648년 네덜란드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1659년 아르투아 주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뒤이어 에노·룩셈부르크·플랑드르 등 남부지역 대부분도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1648년 뮌스터 평화조약으로 번성하던 항구 안트웨르펜의 외국무역도 봉쇄되었다(베스트팔렌 조약).

이같은 상황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침체의 길에 들어섰다.

1700년 후사가 없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프랑스의 앙주 공작 필리프(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즉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이곳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이 지역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의해 6년간 지배를 받았으며 또 7년간 영국과 네덜란드 군대에 점령되기도 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의 소유지는 분할되었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치권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중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