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를망

파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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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 앙시앵 레짐(프랑스혁명 이전 구체제) 시대의 최고법원.
고등법원이라고도 함.

파를망(Parlement)
파를망(Parlement)

카페 왕조 초기 국왕이 제후와 고위성직자들을 소집해 봉토문제와 정치사안을 논의하던 '쿠리아 레기스'(왕실회의)에서 유래했으며 국왕에게 제출된 법정 사건에 대한 최고결정을 내렸다.

쿠리아 레기스는 12세기와 13세기 초반에 걸쳐 제후·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도 영입해 중요한 의사결정체로 성장했다.

그후 사법적인 회의는 다른 사안을 위한 회의와 점차 구별되기 시작했고 루이 9세(1226~70)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법회의를 쿠리아 레기스 인 파를리아멘도(파를망)로 불렀다. 파를망은 지방제후들의 판결에 항소할 수 있는 항소제도를 발전시켰으며 왕족이 관할했던 도시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따라서 왕의 관할영역이 넓어질수록 파를망의 역할도 확대되었다. 또한 파를망은 최종판결을 내림으로써 '국왕의 법'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로 간주되도록 하여 결국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루이 9세는 파를망을 특별항소법원에 설치했다. 특별항소법원은 현재 파리에 위치한 근대 최고법원 자리에 있었다. 특별항소법원은 '그랑 샹브르'(대법정)로 불리면서 파를망의 핵심적인 역할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밖에 14세기에 신설된 조사법원과 청원법원도 특별항소법원과 함께 운영되었다. 형사법원은 16세기에 공식 발족했으나 사실상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16세기에 신설되어 위그노파 사건을 재판했던 특별법원은 1669년에 폐지되었다.

후기 중세시대에 파를망의 재판관은 선거 또는 호선에 의해 선출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재판관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리를 세습적으로 물려주거나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이같은 매관매직은 1552년 왕에 의해 공식 승인을 받았다.

매관매직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오히려 1604년 재정가 샤를 폴레에 의해 '1년 권한'이라는 제도가 생겨 파를망 재판관은 자신이 자리를 살 때 지불한 돈의 1/60을 매년 지불함으로써 상속권을 지속시켜나갔다(폴레트 법). 그러나 파를망의 원장만은 반드시 왕이 지명했다. 파를망은 원래 파리에만 있었으나 나중에 각 지방에도 생겼다. 그러나 파리 파를망이 왕정재판의 거의 절반을 맡아서 처리했다. 파를망의 정치적인 권한은 왕의 칙령과 공개칙서를 접수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왕의 조치를 접수하기 전에, 그같은 조치가 법과 정의의 원칙, 왕권의 이해 등과 부합되는지 검토했다. 적합하지 않을 경우 파를망은 왕의 조치를 보류시키고 왕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국왕이 파를망의 접수를 강제하고자 할 때는 명령서를 보내거나 친히 파를망에 출두했다. 국왕의 직접적인 출두는 파를르망의 칙령접수 권한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국왕에게 보내는 파를망의 진정서는 왕권에 대한 견제 균형의 역할을 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파를망은 왕권에 대한 조직적인 대항의 길을 걸었다.

대항 무드는 루이 14세 때 한풀 꺾이기는 했으나 18세기에 들어서 되살아났다. 파를망 재판관들의 대항은 그들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되기는 했으나 그보다도 당시 일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사회적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를망은 특권과 반동의 원천으로 비추어져서 프랑스 혁명(1789) 초기에 폐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