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6세

필리프 6세

다른 표기 언어 Philippe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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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93
사망 1350. 8. 22, 프랑스 파리 근처
국적 프랑스

요약 발루아 왕조 최초의 프랑스 왕.
(영). Philip Ⅵ. 별칭은 발루아의 필리프(Philippe de Valois).

파리에 있는 행정부의 중앙집권화를 꾀했던 13세기 카페 왕조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나, 백년전쟁(1337~1453)이 발발할 무렵 집권한 관계로 강력한 군주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쟁에 필요한 세금을 올리기 위해서는 귀족·성직자·부르주아지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에는 삼부회의 정치권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왕권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고 있던 부르주아지는 은총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으나, 성직자와 귀족들 사이에서는 재정개혁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발루아의 샤를의 맏아들인 필리프는 카페 가문의 마지막 직계 왕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등과 사촌간이었다. 1328년 샤를 4세가 죽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당파의 반대에 부딪쳐 샤를 4세의 미망인이 출산할 때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샤를의 미망인이 딸을 낳아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자, 왕이 되어 1328년 5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해 8월 플랑드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플랑드르 백작의 도움 요청을 받고 카셀 전투에서 수천 명의 플랑드르 반군을 살육했다.

이 사건 직후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던 아르투아의 로베르가 왕족 중 1명에 대항하여 아르투아 백작위를 요구하자 필리프는 로베르를 재판에 회부했다. 이로 말미암아 로베르는 그에게 심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1334년 영국으로 건너간 로베르는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사이의 알력을 조장했으며, 영국-프랑스 관계를 악화시켜 마침내 1337년 백년전쟁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군사 행동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1340년 프랑스는 슬뤼스 해전에서 참패했다. 한편 막강한 부르고뉴 공작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왕실회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국내 사정도 악화되었다. 1343년 심각한 위기가 발생해 필리프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해야 했다. 여기서 여론을 달래고 행정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1346년 크레시에서 영국에게 참패한 프랑스는 또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반대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3명의 대수도원장에게 재정을 맡겨야만 했다. 1347년 11월에 개최된 삼부회 회의는 다시 왕이 왕실회의를 개편하도록 의결했다. 그러나 1348, 1349년 프랑스를 덮친 흑사병으로 모든 정치적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중요한 지역 몇 군데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왕국 영토에 편입시키기는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남긴 것은 전쟁과 역병으로 분열된 프랑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