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2세

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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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19. 3. 31, 파리 근처 생제르멩앙레
사망 1559. 7. 10,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앙리 2세는 행정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프로테스탄트를 극심하게 탄압함으로써 내전상황으로 치닫게 했다.
즉위하자마자 행정개혁에 착수하여 왕실회의의 각 분과별 기능을 더욱 전문화했으며, 지방에 감독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근대적 지방행정관 제도인 앵탕당 제도가 탄생했다. 외교면에서는 부왕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벌이던 전쟁을 계속 수행했다. 1556년 카를 5세와 휴전을 맺었으나, 다음해 프랑스 원정대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자 전쟁이 재발했다. 완고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으며,1547년 파리 고등법원에 이단을 심판하기 위해 화형 재판소를 설치했다. 또한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스페인과 1559년 카토-캉브레지 화약을 맺었다.

행정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프로테스탄트를 극심하게 탄압함으로써 내전상황으로 치닫게 했다.

프랑수아 1세와 클로드의 둘째 아들로, 형 프랑수아 왕세자와 함께 1526년 스페인에 볼모로 갔으며 캉브레 화약이 맺어진 후인 1530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536년 프랑수아 왕세자의 사망으로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앙리와 아버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불화는 국왕의 총애를 잃은 컨스터블 안 드 몽모랑시를 앙리가 계속 지원한 사실과, 앙리의 정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와 프랑수아 1세의 정부인 에탕페 공작부인 안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다.

앙리는 즉위하자마자 행정개혁에 착수했다. 왕실회의의 각 분과별 기능을 더욱 전문화했으며 '왕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지방에 감독관이 파견되었고, 앵탕당 제도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또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사이에 중개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외교면에서 그는 부왕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벌이던 전쟁을 계속 수행했다. 1552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샹보르 조약을 맺고서 이들에게 병력과 보조금 지원을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메스와 툴, 베르T의 주교관할지역을 차지한다는 데 동의를 얻었다.

1556년 카를 5세와 휴전을 맺었으나 1557년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지휘하는 프랑스 원정대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자 전쟁이 재발했다. 네덜란드에 주둔중인 스페인 병력이 피카르디의 생캉탱을 포위하자 몽모랑시는 생캉탱을 구하려고 했으나 패배했다. 기즈 공작이 칼레·긴·티옹빌을 장악함으로써 상황이 다소 호전된 후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는 재정난 때문에, 또한 앙리는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1559년 카토-캉브레지 화약을 맺게 되었다.

완고한 가톨릭교도였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1547년 파리 고등법원에 이단을 심판하기 위해 화형 재판소(chambre Ardente)를 설치했다. 카토캉브레지 화약은 앙리의 딸 엘리자베트와 마르그리트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사보이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각기 혼인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축제 도중 마상 창시합에서 앙리 2세는 스코틀랜드인 근위대장 몽고메리 백작 게이브리얼의 창에 머리를 다쳤으며 그후 10일 만에 숨졌다.

앙리 2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해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자녀로는 왕위를 이은 프랑수아 2세와 샤를 9세, 앙리 3세, 후에 앙주 공작이 된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마르그리트(1572년 나바라의 엔리케와 결혼함), 로렌 공작 샤를 3세와 혼인한 클로드 등이 있다. 사생아 가운데에서도 프랑스의 디안은 적출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