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3세

다른 표기 언어 Carlos III
요약 테이블
출생 1716. 1. 20,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1788. 12. 14,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왕(1759~88 재위)이며 나폴리의 왕(카를로 7세, 1734~59 재위).
(영). Charles Ⅲ.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국내개혁

개요

18세기 '계몽전제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며 스페인을 단기간이나마 문화적·경제적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초기생애

펠리페 5세와 파르마의 이사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사벨의 권리에 의해 그는 파르마 공작 신분으로 1732~34년 파르마를 통치했으며 그후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1759년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가 죽자 그는 25년간 절대군주로서의 유익한 수습기간을 마치고 스페인 왕위에 올랐으며 나폴리 왕위는 셋째 아들 페르난도 1세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자신의 사명이 개혁을 실시하고 스페인을 재차 일등국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으며 이를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냥에 광적으로 탐닉했지만 검소한 생활태도와 함께 국정에 정열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실한 신앙생활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사생활을 영위해 나갔으며 1760년 죽은 아내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에 대한 추모의 정은 지극히 순수했다. 한편 군주의 권위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해 때로는 절대군주의 수준을 넘어 폭군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군주로서 그의 가장 뛰어난 자질은 유능한 대신들을 선별하는 능력과 콘데 데 아란다와 콘데 데 플로리다블랑카와 같은 특출한 재능을 지닌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써 계속적으로 정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데 있었다.

그는 이러한 유능한 관리들과 정기적으로 협의하면서 이들에게 충분한 자유재량권을 부여할 만큼 혜안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을 식민지 강국으로, 다시 말해 유럽 열강에 포함되는 강국을 만드는 것이 카를로스 3세의 주요정책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외교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7년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함으로써 식민 열강의 균형에 이상이 생길 것을 우려한 그는 1761년 8월 프랑스와 가족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 두 나라는 모두 부르봉가 출신의 군주가 다스리고 있었다. 가족협정 체결의 결과 이듬해 1월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3세는 자신의 역량과 앞으로의 가망성, 그리고 동맹세력의 역량과 가망성을 과대평가했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어야 했으며 스페인 해군의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미국 독립전쟁 때 그는 아메리카 혁명군을 지원해 영국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생각에서 1776년부터 암암리에 혁명군을 지원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이 보유한 식민지들을 잃을 것을 우려해 1779년 중재에 나섰다.

자신이 내세운 조건들을 영국측이 거부하자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그와 동시에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제국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본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항로와 항구를 개척하려는 상업개혁이 1765년부터 실시되었다. 영토의 재편작업은 방어의 편의를 위해 시행되었으며 근대적 행정조직인 앵탕당 제도(지방행정관 제도: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이 제도는 이미 스페인에서도 시행되고 있었음)가 도입되었다.

행정과 사법 및 군사에 관한 권한을 보유했던 앵탕당 제도는 지방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이를 식민지 총독 대신 본국 왕실과 직접 연결되게 했다. 과거의 통상에 대한 규제가 해제되고 외부 세력의 공격 위협으로부터 안정을 되찾는 한편 좀더 효율적인 행정제도에 대한 기대가 가능해져 스페인의 식민지 제국은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국내개혁

스페인 국내에서도 카를로스 3세는 보다 절대적이고 능숙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종교정책은 교회를 왕권에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또 그는 교황의 대칙서나 서한이 그의 승인 없이 스페인 내에 공표되는 것을 불허했다. 특히 예수회에 대해서는 크게 반감을 나타냈는데 예수회의 범세계적 조직체계와 또 예수회와 교황청의 밀착을 자신의 절대권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활동중이던 예수회 조직이 자신에게 충성과 복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그는 1766년 마드리드와 그밖의 지역에서 일어난 격렬한 반란들이 바로 이들 예수회의 선동으로 발생했다고 단정했다.

진상조사가 끝난 후 1767년 스페인과 스페인 식민지 내에서 예수회의 추방을 명령했다. 1773년 프랑스 왕실과 손잡고 교황을 설득해 예수회를 철저하게 탄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다. 그러나 카를로스 3세 자신이 스페인 내에서 교황의 사법권 행사를 반대했기 때문에 자연히 종교재판소의 자의적인 재판권행사를 억제했다.

한편 교회 내부를 개혁하고자 열망하던 그는 개종을 강요하는 방법보다 설득의 수단을 더 선호하는 인물을 종교재판소의 재판장에 임명했다. 또 정부 기관들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 기관들을 통해 왕의 의지를 펼칠 수 있었다. 이 절차는 국정의 방향에 맞추어 각 대신들로 왕실고문단을 대체케 함으로써 완성되었다. 1787년 플로리다블랑카의 도움을 받아 국무회의를 설치하여 여러 부처를 조정했다. 국무회의는 정례회동을 통해 통일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인텐덴테를 격려하고 카스티야 의회에 시(市) 재정감독권을 부여함으로써 지방정부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했다. 그의 정부가 추구하는 목표는 산업과 무역의 발전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3세의 집권 말기에 스페인은 상업에 관련된 낡은 규제들을 철폐했으며, 모든 신민들과 주요항구들이 고루 혜택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식민지를 포함한 스페인 제국 전역에 통상을 개방했다.

다만 외국인들에게만은 예외적으로 과거의 규제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를 받아 국내 면화산업이 급속히 성장했으며 사치품 생산에 정부가 직접 관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3세의 농업정책은 지주 계층의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의 농업발전과 농민층의 복지향상에 최대의 장애물, 즉 상당수 미경작 농지의 존재와 토지재산의 세습상속권을 법적으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제도에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사실상 카를로스 3세의 목표는 복지향상에 있다기보다는 국력의 신장에 있었다. 이같은 한계 속에서 그는 스페인을 문화적·경제적으로 소생하도록 이끌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스페인은 당초 그가 취임했을 때보다 한결 번영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