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블랑카

플로리다블랑카

다른 표기 언어 José Moñino y Redondo, conde de Floridablanca
요약 테이블
출생 1728. 10. 21, 스페인 무르시아
사망 1808. 12. 28(?), 세비야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정치가.

카를로스 3세의 각료로 왕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마드리드에서 유명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766년 카스티야 평의회의 검사로 임명되었다. 1767년 스페인에서 예수회를 추방하는 일에 협조해 완고한 국왕교권주의자로 알려지게 된 그는 예수회를 완전히 해체시킬 목적으로 1772년 로마 주재 대사로 파견되었다.

성공적으로 이 임무를 완수한 데 대한 보상으로 1773년 카를로스 3세는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작위를 내렸다. 1776년 수석 국무장관이던 헤로니모 그리말디의 후임에 임명된 그는 부랑인 문제를 척결하고, 직업학교와 공장견습소를 후원했으며, 농부들에게 공공자금을 대여해줄 수 있는 국영신용회사를 설립했다. 더 나아가 무역·산업·농업, 공공사업 등 정부의 모든 개혁노력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보다 효율적인 정부기관의 수립을 원했던 그는 국왕을 설득해 내각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게 했는데(1787. 7. 8), 여기에서는 정책을 심의 조정하기 위해 모든 왕실각료들의 합동 정례회의를 시작하고 그 자신이 실천 계획을 작성했다.

카를로스 4세도 즉위(1789) 후에 플로리다블랑카를 계속 현직에 두었지만, 이제는 플로리다블랑카의 정책이 바뀌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포가 점점 증대함에 따라 진보주의자에서 권위주의자로 변했으며, 심문제도를 부활시키고 엄격한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작고한 국왕의 각료들 및 제도 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권력 및 미천한 신분에 대한 귀족들의 분노,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왕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너무 비타협적인 대(對) 프랑스 정책 등이 원인이 되어 그는 1792년 2월 콩데 데 아란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처음에 고향인 무르시아로의 귀환이 허락되었으나 7월 체포되어 팜플로나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결국에는 귀향을 허락받았다. 1808년 프랑스가 침공했을 때 내각 최고중앙회의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