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슈

포슈

다른 표기 언어 Ferdinand F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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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1. 10. 2, 프랑스 타르브
사망 1929. 3. 20,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군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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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진급
  4. 조프르 휘하에서의 제1차 세계대전
  5. 연합군 대원수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되고 있을 무렵 프랑스의 육군원수이자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 승리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초기생애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포슈는 처음에 가족과 함께 코맹주 지역의 발랑틴에서 살았는데, 후에도 매년 이 마을을 찾곤 했다.

유년기에 그는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싸웠던 외증조부가 들려주는 전쟁이야기를 통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업적에 감동을 받았다. 외증조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전쟁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교를 다닌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준비를 위해 1869년 명성 높은 메스의 생클레망 예수회 학교에 입학했다. 생클레망에서 그는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종교적 생활을 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은 강인한 도덕심의 근본이 되었다.

프랑스-독일 전쟁메스에서 겪은 프랑스의 패배는 그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1870년 7월 그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미 전쟁은 발발한 상태였고 근방에서는 포탄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일단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군에 입대했으나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1871년 휴전이 성립되자 생클레망 학교로 돌아간 그는 독일 영토가 된 메스에서 독일군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고통과 분노는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했다.

로렌과 메스를 프랑스 영토로 회복시키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진급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2년 동안 다닌 후 1873년 포병 군사훈련 학교에 입교했다.

포병장교로서 그는 투지가 넘치는 기병인 동시에 노련한 기술자였다. 파리에 있는 포병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그는 1883년 브르타뉴에서 결혼하여 트로푕퇴니우 저택을 구입했다. 1885년 육군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에 입학했는데, 이곳은 그후 25년간 전쟁 준비를 위한 그의 연구실이 되었다. 1895년 소령이 된 그는 일반전술을 강의하는 조교수가 되어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그후 얼마 안 되어 정교수가 되었다.

마침내 1908년 그가 준장으로 있을 때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가 그를 학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포슈는 지휘경험을 쌓고 다양한 참모직을 섭렵하면서 경험과 판단력을 길렀다. 그는 〈전쟁의 원칙 Des Principes de la guerre〉(1903)·〈전쟁운영론 De la conduite de la guerre〉(1904)이라는 2권의 책을 통해 그의 행동 신조를 공식화했으며, 강의를 통해 장교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사고'와 '의지'라는 두 단어를 새겨주었다.

1911년 사단을 지휘한 후 잠시 군단을 통솔한 그는 1913년 8월 낭시에 있는 육군 제20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군대는 로렌 지역의 국경선을 경계하고 있었다. 3년 후면 정년 퇴임을 해야 할 그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그가 쌓을 수 있는 최고의 경력인 듯했다.

조프르 휘하에서의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8월 2일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 그는 로렌 우측 지역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8월 28일 프랑스군 전선 중앙에 구멍이 나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포슈를 불러 전선이 단절된 부분에 편성되고 있는 분견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후에 이 분견대는 제9군이 되었다. 적군은 뚫고 나가려 했으나 포슈가 이를 저지함으로써 '의지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음'을 일깨웠다. 그와 같은 포슈의 집착력은 조프르가 마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같은 결과는 이제르와 이프르 전투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조프르는 맹공을 받고 있던 영국·프랑스·벨기에 군을 적절히 접합시키기 위해 포슈를 이제르와 이프르 전투에 배치했던 것이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는 훗날 포슈에 대해 "그는 죽은 자도 싸우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1915, 1916년에 북부군을 지휘하고 있던 포슈는 별 성과도 없이 아르투아와 솜 지역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1917년 5월 15일, 육군장관의 일반참모장이 된 그는 연합군의 조언자 역할을 했으나 조언이 지휘는 아니었다.

한편 러시아가 거의 붕괴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그들의 전군대를 서부 전선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나, 벨기에·영국·프랑스 군은 분열되어 있는 지휘권 아래 통솔되고 있었다.

포슈는 독일군이 이처럼 허술한 연합군 전선을 공격하게 되면 연합군의 각 군대는 오직 자기 군대의 처지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전선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단일화된 지휘권 수립을 주장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1917년 11월에 다시 총리가 된 프랑스의 클레망소는 영국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 육군원수와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필리프 페탱 장군이 체결한 협조협정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포슈의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포슈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1918년 3월 21일 피카르디에 있던 영국군 전선이 독일군 공세에 붕괴되었다. 3월 23일에는 전황(戰況)이 영국-프랑스 협정의 한도를 벗어났으며, 3월 24일에는 이미 '각자가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더글러스 헤이그는 영국군의 출항지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페탱은 파리 수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양국군 사이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군이 머리 없는 몸과 같다는 것을 재빠르게 감지한 독일군은 이미 승리를 외치고 있었다(연합국).

연합군 대원수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붕괴된 전선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결단력 있는 포슈뿐이라는 점에 동의한 것이다. 3월 26일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가 있던 그들은 포슈에게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권을 부여했다. 연합군의 군세는 4월 3일 보베에서 열린 연합국 회의에서 더 확대되었고 5월 2일에는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장되었다.

바야흐로 독일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포슈의 의지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할 뿐 아니라 주도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그의 공세를 강화했다. 한편 포슈는 미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위해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절망적인 외침들을 묻어둔 채 포슈는 부하 장병들에게 그들의 극한적인 인내심을 요구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빈약한 비축품들을 절약했다. 그의 통찰력 있는 인내심은 결국 피카르디와 플랑드르에서 루덴도르프를 저지시켰다. 5월 8일 포슈는 공식적인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루덴도르프에 의해 해안까지 후퇴한 영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프랑스 전선에서 주저 없이 철수시켰다. 루덴도르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여 5월 27일 프랑스 전선을 돌파했다. 독일군은 마른 지역까지 그 전선이 퍼져 있었다. 6월 9일 우아즈 지역에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났으나 포슈는 이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루덴도르프는 미국군이 참전하기 전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7월 15일 그는 샹파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2일 후 그의 공격은 저지당했다. 그가 패배한 것이다. 이제 포슈의 의지력이 루덴도르프의 의지력보다 우세해졌으며 따라서 포슈가 일격을 가할 차례였다. 7월 18일과 8월 8일 2차례의 공격으로 포슈는 루덴도르프를 수세로 몰아갔다. 특히 2번째 공격을 루덴도르프는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8월 6일 프랑스군 원수로 진급한 포슈는 독일군뿐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강행하여 독일군 전선에 가차 없는 타격을 주었다. 마침내 이미 지치고 수적으로 열세해진 독일군은 독일혁명으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으며, 그들의 동맹국들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제 독일은 르통트에서 1918년 11월 11일 포슈가 연합군의 이름으로 작성한 휴전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1월 26일 포슈는 메스로 돌아왔다.

그는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 영토에 다시 복속시켰으며, 이로써 자신이 세운 그의 인생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영국과 폴란드의 원수였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최고전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파리에서 생을 마쳤으며, 생루이데앵발리드 교회 나폴레옹의 묘 근처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