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평화회의

파리 평화회의

다른 표기 언어 Paris Peace Conference

요약 제1차 세계대전을 청산하는 국제적 협상을 개시한 회의(1919~20).

이미 연합국은 적대국들과 여러 휴전협정, 즉 불가리아와의 살로니카(테살로니카) 협정(1918. 9. 29), 투르크와의 무드로스 협정(10. 30),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빌라주스티 협정(11. 3), 독일과의 르통드 협정(11. 11) 등을 체결해 교전행위는 종식되었지만 정식 평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이 되어서야 열렸다 (→ 오스만 제국). 회의 개최가 지연된 것은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때문이었다.

그는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총선을 통해 그의 권한을 확인받고자 했다. 로이드 조지가 파리에 도착하자 바로 1919년 1월 12일 프랑스·영국·미국·이탈리아 정부 수반과 각각의 외무장관인 조르주 클레망소와 에티엔 피숑, 로이드 조지와 아서 제임스 밸푸어, 우드로 윌슨과 로버트 랜싱,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와 시드니 손니노의 예비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그들은 일본 전권대사를 포함해 최고위원회 또는 10인(人)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주요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3월 최고 위원회는 일본 제1전권대사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가 일본과 무관한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으려 하자, '편의상'이라는 이유로 서방 원수들만으로 구성된 4인위원회로 모임을 축소했다.

외무장관들은 5인위원회 모임을 계속하면서 부수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또한 이 5개 열강들은 평화협상중에 취해지는 경제정책의 자문을 위해 1919년 2월에 창설된 최고경제위원회도 감독했다.

특별한 문제, 즉 국제연맹 조직과 규약 작성, 전쟁책임 판정과 전쟁재발 방지 보장, 배상금, 국제노동입법, 국제적인 항구·수로·철도, 재정문제, 영속적인 성질의 경제문제, 항공 및 육·해군 문제, 그리고 영토문제 등을 연구하기 위해 전문위원들이 임명되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주요사항은 ① 1919년 2월 14일 초안이 제출되어 4월 28일 개정안이 최종 승인된 국제연맹 규약, ② 1919년 5월 7일 마침내 독일 대표단에게 제출되어 그들의 이의 제기가 있은 뒤 6월 28일에 서명된 베르사유 조약, ③ 1919년 6월 2일 오스트리아 대표단에게 초안으로 제출되었다가 7월 20일 완성되어 9월 10일 서명된 생제르맹 조약, ④ 1919년 9월 19일 불가리아 대표단에게 제출되어 11월 27일 서명된 뇌이 조약 등이다.

독일·오스트리아와 맺을 조약을 놓고 연합국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독일과의 조약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독일 서부전선 변경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요구에 반대하고 단치히(그다인스크)를 원하는 폴란드의 요구를 프랑스가 지지했다. 한편 미국은 중국 산둥[山東] 반도에서 갖고 있던 독일의 특권을 일본이 요구하자 이에 반대했다.

오스트리아와 맺은 조약에 대해서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이전 영토 배분 문제를 놓고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분쟁을 일으켰다. 1920년 1월 16일 국제연맹이 공식 발족함으로써 파리 회의는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터키와의 조약(1920, 1923)과 헝가리와의 조약(1920)은 그뒤에 맺어졌다.

파리 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
파리 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