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

칠보

다른 표기 언어 enamelwork , 七寶

요약 칠보는 보석의 대용품으로 처음 등장한 칠보는 후에 영구적인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는 칠보화(七寶畵)·갑옷, 장신구, 성배, 성골함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 다양한 모습의 장식 목적으로 널리 발달되어왔다.

목차

접기
  1. 재료
  2. 기법
  3. 역사
    1. 고대
    2. 중세
    3. 15세기에서 현재까지
  4. 동양의 칠보
    1. 중국
    2. 일본
  5. 한국의 칠보

재료

칠보는 플린트나 모래, 연단(鉛丹), 소다나 가성칼리 등의 혼합물이며, 이 물질들을 함께 녹여 밝은 청록색조의 유리질 화합물인 매용제(媒熔濟 flux)를 만든다.

이 매용제의 성분비에 따라 칠보의 강도가 달라진다. 채색 칠보의 기본재료인 투명 매용제는 용융상태에서 여러 가지 금속 산화물을 첨가함으로써 착색된다(→ 색채). 예를 들면 터키 색조의 청색은 검은 구리산화물에 비교적 높은 비율의 탄산나트륨을 첨가해서 얻으며, 황록색은 연단의 비례량을 증가시킴으로써 같은 구리 산화물로부터 얻는다.

투명 매용제에 주석과 납의 혼합물인 금속판을 첨가함으로써 불투명 칠보를 만든다. 불투명 백색은 주석산과 아비산을 매용제에 첨가하여 만들며 이때 산의 분량은 색의 농도나 불투명에 영향을 미친다.

칠보
칠보

기법

유선칠보(有線七寶 cloisonné)·조금칠보(彫金七寶 champlevé)·투태칠보(透胎七寶 bassetaille)·성태칠보(省胎七寶 Plique-à-jour)·외곡도식칠보(外穀塗飾七寶 encrusted enameling)·채유칠보(彩釉七寶 painted enamels)가 있다.

유선칠보는 가는 금속선을 디자인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금속 위에 붙이고 이 외곽선 안쪽을 유약으로 채워 소성시키는 기법으로, 식은 다음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낸다. 금장신구에 많이 쓰인다. 조금칠보는 유선칠보와 반대 기법으로, 금속물의 표면을 디자인대로 파내고 그 안에 주엽을 채운 후 소성하는 것으로 두꺼운 금속판이어야 한다. 투태칠보는 조금칠보 기법이 확대·혼합된 기법이며, 조금칠보와의 차이점은 칠보가 입혀지는 부위가 저부조로 두드리거나 조각되기 때문에 유약은 저부조 위로 덮이게 되며 금·은 바탕 위의 저부조 디자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반투명 칠보를 통하여 이 반사된다는 것이다.

반사광 효과는 저부조 면에 놓여지는 칠보의 두께에 따라 드러나며 결과적으로 조형적 인상과 입체적 형태의 효과는 칠보색의 농담의 예민한 탁화에 의해 창출된다.

성태칠보는 반투명 칠보를 사용하여 세밀화의 스테인드글라스 효과를 갖도록 디자인하는 기법으로, 유선칠보와 거의 같으나 금속의 윤곽선을 소지 금속에 땜질하지 않고 도안을 이룬 금속선끼리만 땜질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것을 금속판(보통 알루미늄 청동) 위에 놓고 유약을 채운 후 소성시킨다. 칠보색이 완연히 드러날 때까지 조심스럽게 연마해야 한다. 외곡도식칠보는 금속물의 불규칙한 표면 또는 환조·고부조에 칠보를 입히는 기법이며, 흔히 금으로 된 조각 위에 불투명·반투명의 칠보가 입혀진다. 특히 이 기법은 소성시 기본 형태 보존에 유의해야 한다. 채유칠보는 칠보색이 금속의 외곽선이나 선으로 그려진 홈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기법은 앞에서 언급된 기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기법에서는 젖은 유약을 쓰더라도 우선 건조시켜야 하는데, 이는 젖은 상태에서 유약이 흘러 서로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역사

고대

서양 칠보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의 칠보는 BC 13~11세기에 걸쳐 미케네인의 금속공예품에서 발견된다(미케네 문명). 미케네인의 무덤에서 나온 6개의 반지(키프로스 코우클리아에서 발굴)는 상감과 칠보의 중간단계로 각 칠보색은 소성되기 전에 가루의 형태가 아니고 색유리 파편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선칠보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그외의 오래된 칠보는 BC 9~7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카프카스 지방의 쿠반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리핀(griffin:독수리 머리와 날개 달린 사자 몸통이 합쳐진 상상의 동물)이 말을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마이코프 허리띠 장식이 특징이다. 좀더 초기의 유선칠보장식으로 현존하는 것은 서유럽의 청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과학적으로 실험되고 상감된 산호, 연마된 돌(주로 라피스·라글리), 또는 색유리 등과 구별되는 진짜 칠보로 보기는 어렵다.

BC 3세기에 남러시아와 켈트의 공예가가 칠보작업을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만약 더 이른 시기라면, 산호 상감 대신 적(赤)칠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칠보는 유선칠보와 조금칠보로 청동에 입혀진 것으로 고대 켈트 지역에서 거의 만들어졌다. 켈트식 칠보양식은 적어도 12세기말까지 북부 유럽, 특히 아일랜드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중세

비잔틴 시대의 칠보는 6~12세기에 극적인 발전을 했다.

가장 절정을 이루었던 10~11세기의 비잔틴 칠보공예가는 보석같이 빛나는 색상으로 세밀화를 섬세하고 밀도있게 표현했으며 이 시기의 걸작은 1105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 도로 Pala d'Oro〉(베네치아 산마르크 성당)이다. 비잔틴 칠보는 12세기말부터 쇠퇴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칠보가 제조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비잔틴의 금제 유선칠보가 7세기 이전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시리아 문화와 연류된 유물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 유물은 1114~44년에 집권했던 아르투키드 왕자의 업적을 아랍어로 기록한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접시로서 이슬람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접시는 유선칠보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나 동제 바탕에 청동선이 땜질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접시에 씌어 있는 명문이 정확한 아랍어가 아닌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슬람권에서 유선칠보가 있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서유럽에서 7세기초 비잔틴 칠보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롬바르디아 공예가들에 의해서 복제되었으며, 후에는 시칠리아와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복제되었다고 한다.

9세기 영국 앨프레드 대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유명한 앨프레드 장신구는 비잔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토 황제 시대에는 금제 유선칠보가 프랑스 동부에서 성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에센의 금세공가들과 트리어의 에그버트 대주교(937~993)의 공방에서 유선칠보가 주로 만들어졌다.

유선칠보는 12세기에 들어오면서 서유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구리와 청동 같은 금속 바탕에 구워지는 조금칠보 기법이 선호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칠보 기법은 먼저 스페인에서 시도되었고 이어 라인 강과 뫼즈 계곡, 그리고 프랑스의 리모주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12세기 중엽 이들 지역 및 영국의 칠보 공예가는 로마네스크풍의 예술적 표현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모산 파는 12세기 유명한 공예가인 고드프루아 드 클레르와 베르됭의 니콜라 등과 함께 전에 없었던 특색 있는 조금칠보 작업을 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12~13세기 리모주에서 만들어져 상품화되었으나 13~14세기에 걸쳐 제품의 질이 서서히 떨어졌다.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금·은제 기물은 새로운 기법인 투태칠보로 다시 장식되었다. 이 기법은 1290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부터 이탈리아의 금세공가들, 특히 시에나와 피렌체의 장인들은 이 기법으로 그림 등의 걸작품을 만들었다.

투태칠보는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성행했다. 1380년경 프랑스의 샤를 5세의 동생에 의해 제작된 '황실 금배'(대영박물관 소장)는 가장 뛰어난 투태칠보 작품으로 꼽힌다. 이 금배의 양 옆면과 뚜껑에는 당대 최고의 풍부한 색감과 정교한 솜씨로써 성 아그네스의 생애와 순교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투태칠보의 황금기는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스페인과 독일 남부, 주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인기를 누렸다.

15세기에서 현재까지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의 금세공가들은 프랑스 궁정과 부르고뉴 궁정의 후원 아래 더욱 대담한 새로운 칠보를 고안했는데 그것은 반투명의 색상 칠보를 사용함으로써 스테인드 글라스의 효과를 살리는 성태칠보 기법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의 하나는 플랑드르 사람이 1430~40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은도금이 된 메로드 큰 컵으로, 고딕형의 장식격자 무늬가 2개의 칠보안대로 장식되어 있다. 그외에 사용된 기법은 외곡도식칠보로서 큰 입체물과 작은 보석을 동시에 만들었다. 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것으로 '가시면류관의 유물상자'(Reliquary of the Holy Thorn)가 있다. 보석이 박힌 가시 면류관은 최후의 심판 장면이 관 주위를 에워싸고 여기 그려진 20명은 칠보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부분 환조로 장식되었다.

이와 같이 칠보로 장식된 금세공은 유럽의 궁전에 퍼졌으며, 고딕풍에서 르네상스풍에 이르기까지 그 제작 방식이 여러 번 변했지만 사치품으로서의 높은 수준은 계속 유지되었다. 국제적인 양식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 많은 르네상스 금세공가들 가운데 오직 벤베누토 첼리니(1560경)만이 칠보에 대한 기술논문을 작성했다.

채유칠보는 1425~50년경에 부르고뉴 궁전을 장식하기 위하여 플랑드르 공예가들이 처음으로 받아들였으며, 1450~1500년 사이에 베네치아인과 북부 이탈리아의 칠보공예가들이 더욱 발전시켰다.

리모주 공방은 16세기에 들어와 채유칠보의 주도권을 잡았다(리모주 채색 에나멜). 이후 100년간 프랑스의 칠보 예술은 이 기법을 사용해 뛰어난 표현을 이루어 냈다. 때문에 우수한 리모주의 칠보공예가는 궁정의 후원을 받아가며 다른 공예가들과 함께 궁전의 방 치장을 완벽하게 했다.

그리세유 칠보는 1530~40년경에 이르러 뒤늦게 리모주에 소개되었다. 새로운 차원의 채유칠보가 1620~30년경에 프랑스 금세공가인 사토됭의 장 투탱과 블루아 등 의욕적인 공예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흰 칠보 바탕에 채색칠보를 입혀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고도의 기술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이 기법은 세밀초상화에 대한 당시의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에 영국의 찰스 1세와 프랑스의 왕들은 장 프티토와 같은 탁월한 예술가를 고용해 이 기법으로 칠보를 제작하도록 했다.

채유칠보의 전사방법은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1753~56년 런던의 배터시 공장에서 더욱 완숙해졌다(배터시 에나멜 도기). 디자인은 전사지에 의해 흰 칠보 바탕에 옮겨지고 채색칠보로 그려진 조각된 금속판을 그 위에 찍음으로써 칠보가 입혀지는 것이다.

17~18세기에 걸쳐 칠보공예가는 독일, 네덜란드 및 영국과 러시아의 섬세한 세밀화 기법을 칠보에 도입했다. 초기 칠보기법은 18세기에 금제 코담뱃갑을 만든 파리의 장인으로부터 20세기초의 샤를 파브르제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르네 랄리크 같은 아르 누보 장신구 작가, 조르주 브라크, 조르주 루오와 같은 현대화가 및 칠보공예를 계속 발전시켜 독창적인 효과로서 다량생산을 이끌었던 제르다 플록킹어 등 금세공가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어왔다.

동양의 칠보

중국

아마도 유럽의 무역업자나 장인들의 왕래로 중국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5세기경에 중국인들이 칠보 제작의 필수재료인 유리를 제조했고 청동과 다른 금속을 다루는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唐代:618~907) 이전에 칠보가 제조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본 정창원(正創院)에는 십이능경(十二稜鏡)이 있는데 이 거울 뒷면은 유선칠보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다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당대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 거울은 14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단 하나의 칠보 유물이지만 이를 통해 당나라의 칠보공예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4세기말에는 중국에 칠보 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비슷한 성격의 비잔틴 칠보 역시 중국 칠보와 비교되기도 했다. 이때는 중국에 칠보기법이 들어와 있었는데 유럽과 중국 간의 빈번한 교역과 문화적 교류는 칠보작업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후 명(明:1368~1644)·청(淸:1644~1911/12)대에 걸쳐 칠보가 번성했다.

칠보
칠보

중국 칠보는 유선칠보·조금칠보·채유칠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유선칠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십이능경이 최초의 것으로 이 작품은 당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중국 칠보의 시작은 원대(元代:1271~1368)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1333~68) 때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칠보 제작의 황금기는 그후인 나라 때인데, 이 시대 칠보의 섬세한 깊이와 맑은 색조를 지닌 대담한 의장은 후대에서 결코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두운 청금석 색조와 매우 밝은 녹색조를 띤 옅은 하늘색은 특별히 뛰어난 색조이며 붉은색은 어두운 산호색조로 노란 바탕에 순색으로 입혀졌으며 구리에서 추출한 녹색은 폭넓게 사용되었다.

또한 검정과 흰색은 아주 효율적으로 쓰였다.

강희제(1661~1722)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예술산업의 대부흥은 많은 기념물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강희제는 베이징[北京] 근교에 세운 수많은 사찰에 기증할 향물을 유선칠보로 만들도록 명했다. 이 시기에 만든 칠보작품은 기교 면에서 명대 칠보보다 더욱 발달되었으며 량대(良貸)의 칠보 그릇을 보유했다.

건륭제(乾隆帝)
건륭제(乾隆帝)

또한 다양한 형태의 고대 청동용기가 되살아났으며 칠보 장식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양식은 강희제의 계승자인 옹정제(1722~35)가 집권하는 동안에도 지속되었으며 건륭제(1735~96) 때에는 칠보와 다른 공예품에서 더 완벽한 기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보이는 의장의 활력과 심도(深度)가 결여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중국 칠보는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 하더라도 너무 성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옛 칠보 제품 같이 잘 마무리되지 못했다.

중국칠보 가운데 일부는 조금칠보인데 금·은 바탕에 반투명 칠보를 사용하여 은제거울 등 장신구에 자주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광둥칠보로 알려진 중국의 채유칠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여온 기법으로 서양 것을 모사한 것이다. 채유칠보는 중국어로 양자(洋瓷)라고 부르며 칠보자기와 동일한 색이 사용되었는데 외국의 영향을 받은 장식가들은 이 색을 양채(洋彩)라 했다.

불투명 칠보의 바탕인 흰색은 구리판에 올려져 소성되었다. 18세기는 이 예술의 절정기로서 유럽 칠보의 모작이 계속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양식은 1796년 건륭제의 집권 후에도 생산되었다. 광둥법랑의 대부분은 수출용이었고 유럽인의 주문과 인도·페르시아 및 몇몇 다른 아시아에 있는 고객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일본의 칠보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경 나라[奈良] 근교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속제 칠보 유물이 일본 칠보의 기원으로 보인다. 8세기에 편찬된 다이호 율령은 금속과 '유리장식'을 담당하는 관리를 둘 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은 17세기까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도닌 히라타(1591~1646)가 한국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워서 칠보용기를 만들었을 때 그를 후원했던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그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금속제 칠보장식이 달린 무복, 미닫이문의 장석(裝錫)과 교토[京都]의 가츠라 궁[桂宮]에 있는 상인방이 칠보로 장식되었다.

일본의 칠보
일본의 칠보

그의 가족은 유선칠보와 조금칠보 방식으로 소형의 칠보장식품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19세기 후반까지 교역을 계속했다.

그후 가지 쓰네 기이치(1803~83)와 그의 제자들이 나고야[名古屋]에 성공적인 유선칠보 제조공장을 세웠으며 특히 외국인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했다. 가지는 황동제 윤곽선과 불투명 칠보를 사용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은제 윤곽선을 사용했으며 투명·반투명 칠보를 동시에 만들어 작업했다.

더욱이 그들은 뛰어난 재능으로 유선칠보 과정으로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나무나 꽃 등 아주 사실적이고 정교한 유선칠보 작업을 단시간에 재생산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880년 칠보색의 아름다움과 광택을 지닌 무선칠보가 생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도쿄[東京]의 나미쿠와 소스케 공장의 장인들은 이 기술이 가장 뛰어났다. 나고야의 주베이 안도 공장은 더욱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발달은 칠보예술을 옛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칠보공예 특유의 장인정신이 상업성에 의해 오염될 우려를 낳았다.

한국의 칠보

삼국시대에 이미 시작된 한국의 칠보는 '파란'이라고 하는데, 이는 칠보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인 법랑의 중국식 발음에서 기인했다고도 하며 혹은 한국의 칠보가 파란색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파란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최초의 한국 칠보는 5, 6세기의 신라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지환을 들 수 있는데, 이 초기의 칠보는 파란색 한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고 500℃ 정도의 저온에서 구운 저화도 칠보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더욱 발달했으리라 추정되지만 현재까지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에도[江戶] 시대에 교토에 거주했던 칠보사인 히라타 시로[平田四郞:1596~1615]가 일찍이 조선인으로부터 칠보기법을 배웠다고 하여, 조선에서 칠보가 발달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들은 대체로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들이며, 이들만을 고찰해보아도 칠보기법이 수준 높게 발달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칠보기법은 지방질을 제거한 순은 바탕에 곱게 쌓은 투명의 유약을 물에 걸러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순은 위에 얇게 입혀 한지로 물기를 없앤 다음 600~7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낸 것이다. 이때 구워진 칠보의 색은 주로 빨간색·노란색·녹색·청색·보라색이다.

한국에서 칠보기법이 사용된 공예품은 여성용 장신구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각종 노리개·반지·팔찌·귀고리·비녀·뒤꽂이·족두리·단추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밖에도 남성용 장식품으로는 부채 끝에 매달던 선추의 장식과 휴대용 물컵인 표주박을 들 수 있다. 생활용품으로는 주전자나 수저에도 부분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사용된 문양은 주로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문양을 표현하여 조선 후기의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동물문으로는 호접·사슴·박쥐·원앙·물고기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식물과 자연물로는 구름·소나무·사군자 등이 많이 표현되었으며 기하문양으로는 아자·뇌문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길상적인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문자들인 희(喜)·복·수(壽)·다자 등을 문양처럼 사용했던 것도 조선후기 칠보문양의 특징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경부터는 이전 시기에 비해 순은의 표면에 입혀지는 칠보가 부분적으로 조금씩 구사되었으며, 유약도 얇게 입혀지게 되었다. 표현된 문양이나 색채 또한 점차 불분명해지는 경향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