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회화

다른 표기 언어 art of painting , 繪畵

요약 평면 위에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형상을 표현하는 조형예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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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성의 요소 및 원리
  2. 회화와 다른 미술분야와의 관계
  3. 기법
  4. 재료
  5. 형식
  6. 형상과 주제
  7. 형상
  8. 주제
    1. 종교적·신화적 설화
    2. 인물
    3. 풍속
    4. 풍경
    5. 정물
    6. 기타
  9. 회화적 상징
  10. 동양의 회화
  11. 한국의 회화

화가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통해 평면 위에 양감·질감·공간·운동감·빛 등을 표현하며 이로써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의 실재 모습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서사적 주제 또는 추상적 형상을 나타낸다.

정선의 산수화
정선의 산수화

일찍이 화가의 역할은 예술가라기보다 장인에 가까웠으나 르네상스 때 출현한 순수 예술가 개념으로 인해 화가의 지위가 상승하여 학자·궁정인 등의 신분을 누리기도 했으며, 그림의 주제·형상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작품에 서명을 했으며, 후원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작품을 제작했다.

19세기 이후 화가는 사회적 지위와 후원을 잃게 되었으나 그대신 독특한 시각언어를 창조하고 새로운 형태·재료·기법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 회화의 표현적 범주는 크게 확장되었다.

구성의 요소 및 원리

회화는 기본적으로 선·형태·색채·명암·재질감 등의 구성요소를 표현적 형태로 배열하는 시각적 구성이다(디자인). 한편 회화 평면 위의 표식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공간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성질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선은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직관적·기본적 표현수단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드로잉이나 선사시대 바위그림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선적 형상이라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이해된다. 선 위주의 구성은 율동감을 더해주어 화면 전체를 활기 있게 연결한다. 일반적으로 위로 향하는 선들은 기쁨과 열망을, 아래로 향하는 선들은 슬픔과 좌절을 나타내며 오른쪽으로 열린 선들은 왼쪽으로 퍼지는 선에 비해 쾌적하고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형태는 주로 선에 의해 나타나며 그밖에 다양한 색채·명암·재질감 등의 요소를 포함한다.

정4각형과 원은 대체로 구도의 중심에 두어 화면을 주도하게 하고 3각형은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상승하는 느낌을 주는 반면, 역3각형은 불안정한 균형으로 긴장감을 준다. 타원형·마름모꼴·직4각형은 안정성과 방어감을 준다. 형태에서는 일반적으로 부분의 조화가 모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이때 형태 자체는 그 주변의 공간 배치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것은 음악의 쉼표나 건축에서 빈 공간의 역할과 같다.

회화에서 색채의 기능은 근본적으로 장식적·묘사적인 것이며 감정의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특히 현대회화에서는 색채 자체가 본질적 표현요소로 사용된다. 고유색이란 풀밭의 녹색과 같이 사물이 본래부터 갖고 있어 그 사물을 연상시키는 색채를 말한다. 인상주의자들은 현실세계의 고유색이란 늘 빛과 대기의 효과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실주의 회화는 여전히 고유색을 통해 표현된다. 명도는 색채의 밝고 어두움을 나타내는 상대적인 정도이다.

대상에 나타나는 명암을 통해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는 채도가 높을수록 강렬하게 나타난다. 채도가 낮은 무채색을 순색과 병치시켜 구도를 부분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보색 대비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편 차가운 색보다 따뜻한 색이 튀어나와 보인다는 성질을 이용해 공간의 깊이를 암시하는 대기원근법도 널리 쓰여왔다(→).

재질감은 회화 재료에 의해 화폭의 표면에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촉각적 재질감과 선·형태·명암·색채 등을 통해 풍부해지고 활성화된 회화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양감을 통해 표현하는 공간은 지각적 공간과 개념적 공간으로 나뉜다(부피). 르네상스 미술 이래 나타난 지각 공간은 보통 선적 지각체계로 만들어지며 지평선이나 관찰자의 눈높이에 수렴되거나 평행하는 선과 면들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어린이들과 원시미술가들은 대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므로 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시점에서 별개의 대상과 환경이 개별화되어 나타나며 대상의 중요도에 따라 사물의 크기를 주관적으로 조정한다. 19세기말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은 르네상스 이후 회화에 나타난 착시적 공간을 평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20세기초 입체파 화가들이 공간 속의 사물의 복합적 인상을 탐구함으로써 더욱 발전시켰다. 현대회화에서는 개념적인 공간재현 방법과 지각적인 공간재현 방법이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영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화가들은 평면 위에 시간성과 움직임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며, 입체주의자들은 정적인 형태들의 주변 움직임에 대해 시각적 체험을 주려고 했다.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ude Descending a staircase〉와 자코모 발라의 〈끈에 묶인 개 Dog on Leash〉에서 볼 수 있듯이 입체파적 기법과 영사기의 연속장면들의 중첩·투영된 면들을 결합하여 공간 속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형태구조를 탐구했다.

회화와 다른 미술분야와의 관계

특정 시대의 철학 및 정신은 당대의 다른 시각예술에 반영되었다. 고대,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19세기의 아르누보와 분리파 운동의 사상은 당대의 순수미술 못지않게 건축·실내장식·가구·직물·도자기·의상·수공예품 등에서 널리 표현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수공예가 쇠퇴하고 순수예술가와 사회의 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예술과 공예를 사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 운동과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로 나타났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조각가·건축가였으며 20세기 선도적 화가들도 수많은 다른 매체들을 병용했다.

고대 그리스 회화의 시각적 원근법은 연극 무대에 적용되었으며, 일본 목판화는 종합주의와 나비파에, 아프리카 조각은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끼쳐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표현하게 해주었다. 19세기에 발명된 사진기술은 회화가 담당해오던 자연의 재현이라는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회화는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계기를 맞았다. 에드가 드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에두아르 뷔야르, 피에르 보나르 등 일상생활을 그렸던 화가들은 관람자에게 회화 속의 인물 및 사물과 더불어 친숙한 회화공간을 공유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스냅 사진, 확대, 비관습적 시점 등을 이용하여 혁신적 구성을 개척했다.

기법

회화의 제작방법은 대개 그 해당 문화전통의 이상이나 기존 기법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의 세밀화가들의 공들인 작업과정은 반대로 오랜 명상시기를 거친 후 한순간에 직접적이고 서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중국 송대의 선(禪) 수행과정과 동시대에 행해졌다.

최근의 화가는 자신의 목적과 기질에 적합한 기법과 작업방식을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한다. 1880년대 조르주 피에르 쇠라는 화실에서 습작과 색채배치를 연구한 반면, 클로드 모네는 자연의 빛과 대기의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야외에서 직접 그렸으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대작을 그리기 전에 유화 스케치, 즉 모델라(modella)를 그리는 17세기 당시의 관습을 따랐다.

관람자의 눈높이와 작품의 크기 및 양식, 그림이 걸릴 공간의 기능 등 벽화의 특수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예비 드로잉 및 밀랍 모형을 사용했다.

현대화가들은 실물 환등기로 이미지를 화포에 직접 투영하여 확대된 스케치의 윤곽을 잡으며 르네상스 때는 화가의 도제들이 캔버스에 밑칠을 하거나 물감을 개어 스승이 그린 도안과 습작에 따라 화폭에 윤곽선을 그리거나 넓은 부분을 칠하는 일을 대신했다.

재료

회화는 그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템페라·프레스코·유화·수채화·펜화·납화·카세인화·아크릴화 등으로 나뉜다(→납화, 수채화, 아크릴화, 유화, 카세인화, 템페라, 펜화, 프레스코). 고대 이집트의 템페라 벽화는 무덤 내부의 건조한 공기와 일정한 온도에 의해 양호하게 보존되었다.

일반적으로 유화에서는 먼지와 손때가 묻지 않게 표면과 색조를 보존하기 위해 그림을 완성한 뒤 유성 바니시로 덧칠하는 것이 관례였다. 바니시는 시간이 흐르면 거무스름한 황색을 띠게 되는 경향이 있으나 요즘은 이 황색 막을 제거하는 복원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바니시
바니시

19세기말 이후에는 바니시 대신 유리액자를 씌웠는데 현대에 와서는 미술관의 대기상태 조절 및 온도보존방식이 개발되어 매우 오래된 작품이나 깨지기 쉬운 전시물을 제외하고는 바니시나 유리로 보호막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현대의 미니멀 회화에서는 아무런 공간적 환영주의의 효과도 의도되지 않으며 캔버스 자체의 물리적 형태에 역점을 두며 그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틀 없이 캔버스 자체를 그대로 전시하거나 나무나 금속으로 된 얇은 보호띠로 테두리를 두르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 회화 개념의 변천에 따라 새로운 재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기계 매체를 사용한 키네틱 예술이다. 화가들은 컴퓨터를 조작하여 드로잉·사진·도해를 변조시키거나 홀로그램을 통해 중첩된 빛의 이미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그림들은 한가지 매체로 먼저 그린 위에 다른 색채 및 질감으로 수정을 가하거나 덧칠함으로써 풍부한 효과를 낸다. 이러한 혼합매체의 예로는 르네상스의 템페라 위에 유화 기법, 아교 템페라와 수채화, 모노타이프 및 파스텔·구아슈·유화의 결합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화를 덧칠한 사진, 캔버스나 종이에 그린 후에 덧붙이는 아상블라주 등이 있다.

형식

벽화는 주변환경을 장식하고 사고·감정·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덤·사원·성소·지하묘굴 등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벽화에서는 양식화된 장식 모티프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 반면, 폼페이 벽화나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카타콤베에서는 일종의 재현적 형상이 그려졌다. 그후 비잔틴과 고딕 등 중세를 거치면서 모자이크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벽 장식을 대신함에 따라 벽화는 점차 쇠퇴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초기 조토 디본디네,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등의 혁신적 화가들은 건축물이나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들을 설정했으며 실제 공간과 같은 분위기를 창조했다.

이같은 표현은 르네상스 원근법 및 단축법에 의한 착시적 공간 표현의 발달과 더불어 널리 사용되었으며, 15~16세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프레스코에서 절정에 달했다.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 글라스가 내부 장식으로 사용됨에 따라 벽화의 제작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20세기에 이르러 모네,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호세 오로스코, 카렐 아펠 등이 특정한 건물벽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젤화르네상스 시기에 발달했는데 규모가 작고 사용이 간편하여 벽화의 조건 때문에 한정되었던 주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것은 장식이나 창의 전망대용으로 쓰였으며 현실도피감이나 순수한 미적 쾌감을 위해 또는 재산으로서 수집되기도 했다. 패널화는 목판 위에 템페라나 유화로 그린 것으로 특정한 종교적 목적이나 세속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접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2~3폭 제단화, 가게와 여인숙의 간판, 미라의 관, 마차, 악기 등의 장식에 주로 쓰였다.

세밀화란 서구의 세밀 초상화와 인디언 및 이슬람 지역의 필사본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16세기 세밀화가들은 중세의 채식 전통을 따랐으며 17, 18세기에 이르러 세밀초상화는 보다 자연스러운 패턴으로 발전되어 절정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독일의 홀바인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밀화는 평면적 구성, 풍부한 재질감과 꼼꼼한 세부묘사 등이 특징적이며 종종 상징적인 금박의 문장(紋章)과 함께 나타난다.

남아 있는 필사본화의 초기 예로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고대 그리스·로마의 두루마리, 아스텍의 지형도, 마야와 중국의 고전 사본 및 필사본 등이 있다(사본장식). 유럽의 필사본 삽화는 벨륨과 카드에 계란 흰자로 갠 템페라로 그려졌으며, 주제는 종교, 역사, 신화, 비유담, 의학, 시편, 계절별의 일을 묘사한 달력 등이었다.

비잔틴과 초기 고딕 시기의 필사본 화가들과는 반대로 켈트 지방의 삽화가들은 정교한 장식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뒤얽힌 소용돌이무늬로 머리글자를 두르고 페이지의 가장자리는 복잡한 격자무늬로 장식하여 압도적인 효과를 이루고 있다. 중세 고딕 삽화양식은 윤곽선을 두른 평면 형태 부분이 흰색·금색의 바탕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15세기말에 이르러 구체적인 형태의 아름다운 세밀화로 발전했다. 15세기에 인쇄술이 등장하자 유럽의 필사본 그림은 공식 기록, 지도, 손으로 칠한 목판화의 형태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이슬람의 세밀화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11세기 동양에서 비단이나 종이 위에 먹으로 그려진 시집 삽화의 전통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근동의 세밀화는 보통 종이에 구아슈로 그려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금박·은박으로 꾸몄는데 섬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음영 표현이 두드러지며 풍경 및 건축물에서도 주요 형상에 못지않은 세심한 관찰을 보여준다.

필사본에 있어서 글과 가장자리 그림, 여백, 삽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동서양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현대에 와서 회화형식의 범위는 크게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입체파의 콜라주 이후 회화의 조각적 요소의 도입이 점차적으로 증가되어 조각 매체와 회화 매체 사이의 관습적 구별을 무너뜨렸다.

데이비드 스미스,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필립 셔튼 같은 조각가들은 여러 색으로 채색한 구성물을 만들었고, 장 아르프, 벤 니콜슨은 추상적 형태의 채색부조를 제작했으며, 리처드 스미스는 관람객을 향해 튀어나온 3차원적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회화의 본질적인 평면성을 부정하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짐 다인은 그림 위에 실제 사물이나 직물을 붙였고, 프랭크 스텔라와 케네스 놀런드는 캔버스 그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보이게끔 디자인했다. 어떤 예술가들은 색조대비와 안료의 색채로 빛의 효과를 창출하는 회화의 전통 방식을 거부하는 대신 네온 튜브와 거울을 사용했다.

시각적·구체적 예술형태로서의 전통적 회화에 대한 정의는 최근 개념미술의 등장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는데, 화가의 아이디어는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실현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위한 기록적 제안 형태만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연극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는 '행위예술'과 '해프닝'에서는 예술가들 자신이 작품의 매체로 등장한다.

형상과 주제

고대 미술에서는 회화의 형상과 주제가 보통 종족·종교·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서양회화에서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이미지와 주제가 객관 세계에 대한 인본주의적 호기심과 과학적 탐구를 반영하면서, 예술가와 그 후원자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예술가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맡겨지고 있다.

형상

형상을 재현하는 미술은 리얼리즘 양상으로만 발전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철학적 지각표상이 자연주의의 허용 정도를 결정하는 일이 더 많았다. 특히 인간의 초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은 인간의 우주적 의미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반영하는 재현적 회화전통에서도 매우 엄격했다.

예를 들어 전지전능한 신과 비교해 인간이 열등하다고 믿는 것이 초기 유대교 회화의 얼굴 없는 형상과 비잔틴 미술의 양식화된 인물상 표현에서 드러난다. 중국의 산수화에서는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인물을 매우 작게 그림으로써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 미미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미술의 위풍당당한 형상 및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부활된 가운데 인간의 신적·지적·신체적 속성에 대한 찬미가 정형화되어 있다.

현대회화의 재현적 이미지들은 원시미술, 아동미술, 고전신화, 상업광고, 사진, 영화, 희극 연재만화 등 고대와 현대적 자료들에서 자유롭게 빌어오기도 한다. 현대회화의 특징인 자연형태의 상징적·추상적 형태는 구석기 마그달레니안 동굴화, 아스텍의 상형문자, 인디언과 티베트의 천체그림 등에서도 그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제

종교적·신화적 설화
쇼베 동굴의 벽화
쇼베 동굴의 벽화

예배용 그림의 주제 해석과 범위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불교의 벽화는 전지전능하고 신비한 존재를 형상화해 사원과 성당, 성소 내부를 지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최후의 심판과 동양의 지옥도는 신도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며 옥좌의 성모, 승천, 극락에서 내려오는 부처 등의 주제들은 구원에 대한 소망과 지복의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리라는 믿음을 뒷받침해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아래 서양회화를 지배했던 전제적 교회통치가 수그러들었을 때, 종교 설화는 천상세계보다 지상세계를 보여주는 창이 되었다(내러티브). 인물들 간의 관계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옛날 옷을 입었으나 당대의 모습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사도들·성인의 살아있는 듯한 표현을 볼 수 있다. 비유적 설화 주제는 미술에서 감각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것으로 푸생과 루카 시뇨렐리가 묘사한 상징적 뮤즈와 15세기 프랑스 필사본 삽화가들의 낙원동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편 인간에게 경고하기도 하는데, 16세기에 대(大) 피테르 브뢰헬은 〈죽음의 승리 The Triumph of Death〉·〈낙원〉 같은 그림에서 그로테스크한 상징과 준엄한 교훈을 주는 미묘한 시각적 은유를 결합했다. 〈농부의 춤〉·〈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같이 풍속적 주제가 뚜렷한 그림에서조차 인간의 우매함과 죄에 대한 비유를 드러내는 한편,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방탕아 The Prodigal Son〉 같은 전통적인 설화에 난해한 비유적 풍경을 결합시켰고 〈쾌락의 동산 Garden of Delights〉을 기쁨보다 혐오스러운 표현으로 나타냈다.

보티첼리의 말기 그림들은 염세주의적 비유를 보여 주는데 15세기 수도사이며 개혁가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버지니아 로마나의 이야기〉·〈루크레티아의 비극〉은 죽음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는 덕을 표현하며, 〈아펠레스의 비방 The Calumny of Apelles〉에서는 시기·의심·비난·배신·회개·진실들이 의인화되어 중세의 배우 같은 의상과 몸짓으로 표현된다. 19세기의 유명한 우의화는 페르디낭 빅토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피에르 폴 프뤼동의 〈죄악을 뒤쫓는 복수와 정의〉이다. 현대의 서사적 회화의 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민족적 영웅 네드 켈리를 그린 시드니 놀런의 설화 시리즈가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는 서구의 화가들에게 풍부한 이미지와 주제, 그리고 누드화를 그릴 기회를 주었다. 역사적 설화 회화는 당대사건에 대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고전 신화와 영웅적 전설을 표현했던 것이다. 대표적 예로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프란시스코 호세 드 고야의 〈마드리드의 5월 3일〉 등이 있다.

인물

특정 개인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인물 초상은 이집트 왕조의 석관에 그려진 엄숙하고 이상화된 얼굴들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미라 초상은 실물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을 보여준다. 초상이 회화에서 가장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술가가 동시대인을 그릴 때 전체적인 주제는 특수한 문제점을 야기한다. 라파엘로, 루벤스, 앙투안 장 그로, 자크 루이 다비드 등의 화가들이 그린 후원자의 초상은 고상함·품위·권위를 표현할 것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 캉팽, 알브레히트 뒤러, 얀 반 에이크, 디에고 로드리게스 벨라스케스, 고야, 귀스타브 쿠르베같이 객관적 사실주의자들이 그린 설득력 있는 초상에서는 모델의 자존심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배려가 무시되어 있는 것 같다. 초상화와 평범한 사람들을 그린 습작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작품으로, 심리적 통찰, 감정이입, 미적 가치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발달하면서 세잔과 조르주 브라크가 대상에 대한 구조적 탐구를 위해 주제를 사용하거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섕 수틴, 프랜시스 베이컨같이 카메라의 범위를 넘어 개인적 시각의 표현으로 주제를 사용한 것 외에는 진지한 예술형태로서의 목적으로 그려진 초상화는 크게 줄어들었다.

풍속
타작
타작

풍속화는 일상의 장면들을 그린 것이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에는 사냥 장면이나 종족 번성을 위한 주술적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극동지방의 부채, 병풍 그림에는 궁정의 예식, 마을의 혼잡함, 시골의 궁핍함이 탁월하게 나타나 있다. 세상사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금지되었으나 중세의 기도서에 그려진 삽화에는 북유럽 사회의 축제와 일상을 아름답게 기록하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통속적 주제들은 초상과 역사 설화의 배경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적 장면들은 브뢰헬에게는 도덕적 비유의 주제가 되었으며 렘브란트에게는 극적인 종교주제의 감정을 대비적으로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북유럽에서 미술에 대한 교회의 후원이 줄어들자 화가들은 세속적 주제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17세기 홀란트에서 전성기를 맞은 풍속화는 실내에서 대화하는 모습이나 일 또는 놀이 장면을 그린 소(小)다비드 테니르스, 프란스 할스, 얀 스텐, 피테르 데 호흐, 아드리안 반 오스타데, 얀 베르메르 등의 작품으로 대표된다. 전원생활을 그린 그림들은 18세기 프랑스영국에서 수집가들을 매혹시켰는데 장 바티스트 그뢰즈, 부셰, 조르주 모를랑,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아름다운 농촌생활이었다.

그러나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그림에 나타난 하인과 아이들은 시대를 초월한 위엄과 당당함을 보여준다.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화가로는 장 프랑수아 밀레, 오노레 도미에, 쿠르베, 반 고흐, 드가 등이 있으며, 카페나 연예장의 쾌활함은 로트레크, 존 슬론, 에버렛 신, 월터 리처드 시커트가 포착했고 친근한 가정의 모습은 보나르와 뷔야르가 그렸다. 현대의 풍속화 경향으로는 미국 풍경화가들, 애시캔파, 키친싱크파, 캠던타운 그룹, 유스턴로드 그룹, 영국과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등이 있다.

풍경

고대 로마의 대저택 장식에는 이상적인 풍경을 그린 프레스코가 많이 쓰였다.

풍경화는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크게 발달했는데, 특히 중국의 화가들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힘 등에 정신성을 부여했다. 유럽 최초의 자연주의적 풍경화는 뒤러와 브뢰헬에 의해 그려졌다. 그러나 대체로 르네상스 미술에서 풍경은 초상 등 주제의 배경으로서만 나타났다. 서양에서 풍경이 독립된 주제로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던 것은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회화에서였다. 19세기 회화의 가장 획기적인 발전은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등의 풍경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현대의 풍경화로는 도시와 강을 그린 오스카 코코슈카, 빛의 표현을 위해 풍경화를 그린 모네, 에두아르 마네, 피에르 오커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쇠라, 세잔 등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과 바실리 칸딘스키의 상상적 풍경화, 비에이라 다 실바, 니콜라 드 스탈 등의 추상적 풍경 등을 들 수 있다.

정물

회화에서 정물은 종종 구도에 있어서 부차적 요소로 나타난다.

극동예술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서구에서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정물화가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널리 그려졌던 바니타스가 그 좋은 예이다. 당시 화가들은 정물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종교적·문학적 의미와 연결시켰는데, 일반적으로 포도주·물·빵은 수난을, 해골·모래시계·촛불은 인생의 덧없음을, 꽃과 과일은 계절을 상징했다. 특히 일본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폴 고갱, 반 고흐를 비롯한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꽃에 정신적·감정적 의미를 부여했다(플라워 페인팅). 정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왔는데, 윌리엄 하네트의 눈속임 환각주의, 앙리 루소, 세라핀, 마티스, 라울 뒤피 같은 현대화가들의 장식적 형태, 피카소, 후안 그리스, 윌리엄 스콧의 반추상적 구성, 샤르댕, 세잔, 조르주 모란디의 위풍당당한 정물 등을 들 수 있다.

기타

고대로부터 동물과 새는 회화의 기본 주제로서 상징적 중요성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 동굴과 이집트 왕조의 분묘회화에서는 동물이 인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유명한 화가가 재해석하여 그리는 경우 이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모사보다는 창조적인 개작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젠틸레 벨리니의 〈질투심 많은 남편〉을 드가가, 또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Déjeuner sur l'herbe〉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ñinas〉과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을 피카소가 개작한 것 등은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작품으로 감상될 수 있다.

추상회화는 아무런 재현적 의미도 갖지 않는 순수한 형식요소로서의 선·형태·색채를 통해서만 표현된다.

그러므로 추상회화의 주제는 창조적인 회화 자체에 관한 제안이거나, 병치된 색채, 형태,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 사이의 상호적인 운동감, 긴장, 시각적 변형과 공간적 다의성을 보여주는 회화의 형식요소에 관한 제안일 수 있다. 추상회화는 시각적·형식적인 측면에 주로 의존하며 상승·하락, 전진·후퇴, 균형, 부동, 해체, 재편성하는 듯이 보이는 환영적 형태와 색채를 통해 관람자에게 물리적·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즉 기쁨·슬픔·평화 등의 전조를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빛의 효과, 진동하는 운동감이 주는 효과이다. 특정한 시간·장소·사건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하는 추상회화에서는 그 제목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판초 빌라, 죽음과 삶〉(로버트 머더웰)·〈늦은 아침〉(브리짓 라일리)·〈브로드웨이 부기우기〉(피테르 몬드리안)·〈변하기 쉬운 형태〉(칸딘스키) 등이 그것이다.

회화적 상징

미술에서는 장소·디자인·기능·형태·색채·주제 등 회화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도상학적 체계가 매우 일찍부터 발달했다.

그 예로 초기 비잔틴 벽화의 위치는 바실리카의 상징적 건축설계를 반영한다. 따라서 천상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바실리카 중앙의 돔에 그려져 있고 성모는 제단에 표현되어 있으며, 사도들·예언자·순교자·군주들은 회랑벽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하느님과 부처는 구도의 중심, 즉 관람자의 눈높이 위에 위치하며, 주변 인물들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진다(불화). 그리고 성삼위일체 같은 그리스도교적 주제에 대한 전통적 구도에서는 하느님이 중앙에 있고 대천사가 양측에 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성령을 나타내는 비둘기가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는 그리스도가 관중을 향하고 성모 마리아가 왼쪽에, 세례 요한이 오른쪽에 있다. 극동에서는 전통적으로 연꽃으로 만든 옥좌에 부처가 앉거나 수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구름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묘사했다. 신은 보통 미묘한 흰색(영원, 무를 의미)·푸른색(천상의 하늘)·황금색(빛의 구름으로 인한 햇살이나 영기)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낸다.

그림을 그릴 바탕 표면에 대한 정교한 준비작업과 값비싼 재료로 공들이는 제작과정은 신에게 바치는 그림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제·형태도 정신적 상징의 기능을 갖는다. 사냥에 대한 기원이라 생각되는 빙하시대 동굴벽화에는 대체로 인간을 도식적으로 표현한 반면, 동물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고대 이집트 벽화에는 세속사의 즐거운 일들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고인이 사후에도 계속 즐거움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모래그림은 주술적 치료 의식을 위한 것이며, 탄트라(탄트리즘과 관계된 마하야나 불교)의 만다라는 명상과 계몽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동양화에서의 상징주의는 그림의 분위기와 정신성에 대한 체험을 심화시키고자 한 것으로 서양예술보다 보편적·시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일본 불화의 제작 및 주제설정은 종교적·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다.

작가의 직관적·서체적 필치는 자연과의 불가사의한 공감을 상징하며 그림에 나타난 윤회적 풍경과 꽃은 자연의 형태와 그 힘의 정신적 조화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대체로 상징주의적인 인도 회화는 시각적으로도 매우 뛰어나며 뱀, 바나나 잎, 양성 파충류들, 물결 무늬 등에서는 관능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특히 상징적 표상과 더불어 색채 사용 등에서 인도 회화 고유의 신비한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서구의 상징체계는 보다 지적인 경향을 보이며 각각의 형상도 명쾌한 의미를 드러낸다.

또한 그 주제에 따라 색채의 사용도 근본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도상학은 시점·행위·표정·팔·손·다리의 자세가 종교적 형상으로서의 복합적 형식을 규정하고 있다. 성인들과 대천사들을 구별하기 위해 확립된 도상학적 원리로는 흰 수염의 성 베드로와 검은 수염의 성 파울루스, 바퀴를 들고 있는 성 카타리나, 칼과 피부껍질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우스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도상은 그리스 로마와 유대교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수용해 다듬어졌다. 예를 들면 담쟁이와 물고기의 이교적 상징과 그리스의 헤르메스 크리오포로스에 기초한 선한 목자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 등이 그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미술이론가들은 초승달, 섬게, 이단을 의미하는 올빼미, 악마를 나타내는 두꺼비·적적새, 성적 상징으로서의 계란·백파이프 등 회화에서 쓰이는 방대한 상징적 이미지들을 규명해 저술했다.

천사와 악마, 지옥불과 황금빛 천국, 영혼 및 부활을 나타내는 천상의 하늘과 새 등은 다양한 종교적·신화적·은유적 전통에 공통적인 상징 의미가 있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몇몇 문화권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매우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의 우의에서는 탐욕을 나타내는 이 일본 미술에서는 우정을 상징하며, 서양에서는 유혹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인 이 극동에서는 허물을 벗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을 상징하는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서양회화사).

대사들(The Ambassadors)
대사들(The Ambassadors)

동양의 회화

한자문화권을 배경으로 형성된 중국·한국·일본에서는 화(畵)·도(圖)·도화·서화(書畵) 등으로 지칭되다가 1882년경부터 일본에서 서구적 가치관에 기반을 두고 채색을 뜻하는 '회'(繪)자와 선묘를 의미하는 '화'(畵)자를 합쳐 만든 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신분에 따라 문인화·원체화(院體畵), 소재에 따라 인물화·산수화·영모화·화훼화, 재료기법에 따라 수묵화·채색화·담채화, 용도에 따라 일반화·기록화·불화·민화, 화법에 따라 남종화·북종화 등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림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이 구사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비단이나 종이에 모필과 먹을 사용해 표현했다.

작품은 벽화를 제외하고는 옆으로 긴 두루마리[卷], 상하로 긴 축(軸), 앨범 모양의 첩(帖), 부채꼴 모양의 선면(扇面), 병풍과 같은 다양한 화면 형식을 통해 다루어졌다. 작품이 완성되면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號)를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으며, 또한 그림의 제목을 비롯하여 그리게 된 동기와 경위·심정·장소·기일 등과 함께 감상자의 화평이나 찬문 등을 화폭 위에 적어 넣어 독특한 형식을 이룩했다.

동양회화권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던 중국에서는 한대(漢代)를 전후하여 감계적 기능을 지닌 인물화 중심으로 고대 회화가 발전했으며, 남북조시대와 당대를 통해 불교회화 등을 수용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당대 후기부터 북송대 사이에 궁정 및 사대부의 취향과 밀착되어 수묵화를 비롯한 각종 화법이 대부분 형성되었으며, 산수화를 중심으로 모든 화목들의 성격과 전통이 확립되면서 중국미술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송대에 체계화되고 강조되었던 문인화 이념이 원대(元代)에 이르러 남종문인화풍으로 완성되었고 명대 후기부터 중국 및 동양회화의 지도적 양식으로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회화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의 바위그림과 청동기의 선각화(線刻畵) 등 주술성이 강한 도안적 단계를 거쳐 삼국시대에는 고대회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분벽화가 성행했으며 불교회화의 유입 등으로 사실적인 묘사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솔거(率居) 등 전문화가의 활약과 아좌태자(阿佐太子)와 같은 왕족여기화가(王族餘技畵家)가 등장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회화가 대종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고려는 고대적 질서에 반발하여 출현한 국가로 덕교(德敎)와 예교(禮敎)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왕도정치 수행에 필요한 인재등용을 위해 개국초부터 과거제도를 채택했고 유·불·도(儒佛道) 3교에 기반을 둔 문풍(文風)을 진작시킴으로써 한문학(漢文學)의 성행과 지배층의 문사화(文士化)와 함께 감상적 기능을 지닌 일반회화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일반회화는 왕권의 안정과 문신귀족체제의 확립에 따라 문운(文運)이 극에 달했던 문종(文宗:1047~83 재위)대에 왕공문신들의 한묵풍류(翰墨風流) 취향에 힘입어 여기적 문인화가가 출현하고 감상화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전래되었던 북송의 그림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중기에는 곽희(郭熙)의 화풍과 문인화론이 유입되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도화원(圖畵院)의 설립과 이령(李寧)을 비롯한 화원들의 활약, 명승명소도 계열의 실경산수화 전통이 형성되었다. 무신집권기인 후기에는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등장한 문사들의 교양물로 정착되면서 그 성격과 기반이 보다 확고해졌다. 또한 이들을 통해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강조된 북송대의 문인화론과 묵죽(墨竹) 등의 문인취향 화목이 뿌리를 내렸고,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같은 수묵풍 이상산수의 성행과 선승화가(禪僧畵家)들의 활동에 따른 수묵선종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원나라 간섭기인 말기에는 그 이전에 형성된 토대 위에서 조맹부(趙孟頫)의 화풍을 비롯한 새로운 원대의 양식이 유입되어 보다 다양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이어져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불교회화는 쇠퇴하고 일반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회화는 왕조통치의 효과적 수행과 교화를 이룩하기 위한 시각매체로서 적극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왕조 운영의 지도세력으로 문화상황을 앞장서 이끌었던 문인사대부들의 감흥교환·심의표출·심성수양의 미술로서 즐겨 애용되면서 크게 성행했다.

개국초부터 국가에서도 회사(繪事)를 전담하는 도화서(圖畵署)를 확장·설치하고 화원들을 양성하여 이러한 회화 상황의 정착·발전에 기여했다. 초기(1392~1550)에는 소상팔경도·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와 같은 고전적 이상경(理想景)을 소재로 한 정형산수화가 유행했고, 기록풍의 실경산수화와 계회도(契會圖) 등도 많이 제작되었다.

화풍은 북송과 남송, 원의 양식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고려 말기의 경향을 계승하여 넓은 공간개념, 삼단구도법, 농담의 대비가 심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주도했다. 이러한 조선 초기적 특색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안견파 화풍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 전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사대부들의 처사적(處士的) 성향을 반영하는 소경(小景) 산수인물화가 유행했다. 자연과 인간과의 친화관계를 보여주는 이러한 소경산수인물화는 산수의 작은 한 부분을 배경으로 구성된 은일적(隱逸的) 고사(故事) 산수인물화의 성격을 띠며 전개되었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이념이나 정서와 밀착된 화조·동물·대나무·매화·포도 그림 등도 많이 그려졌다. 화풍은 초기의 안견파 화풍과 함께 명대의 절파풍(浙派風)이 가미된 짙고 평판적인 강렬한 수묵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1700~1850)에는 지배층의 분열과 두 차례의 파괴적인 전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은 기존의 전통사회를 다시 복구·정비·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이러한 왕조 재흥의 활기는 중세적 봉건질서의 해체와 근대 이행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새롭게 전진시키는 구실을 했다. 회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시대적 조류와 밀착된 새로운 흐름이 1700년경을 전후하여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상승 욕구에 의해 문인층이 서얼출신과 중인들에까지 확대되면서 양반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서화를 겸비하고 이를 향유하는 문인풍조가 저변화되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감상·품평·수장하는 등의 회화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그림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창작에 관한 관념도 새롭게 제시되었다.

표현기법 또한 명대 후기부터 크게 발흥되었던 남종화법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화풍을 쇄신시켜 나갔으며, 사실적 묘사력의 강화를 위해 원근법·음영법 같은 서양화법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의 산천과 각 계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해서 그리는 실경산수화와 풍속화에서도 종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며 성행했을 뿐 아니라, 경제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길상성(吉祥性)과 벽사성(邪性)을 지닌 세화(歲畵) 등 민화류의 생활장식화가 크게 범람했다.

조선 말기(1850~1910)에는 후기에 대두되었던 여항문인화가(閭巷文人畵家)들의 활약이 더욱 커지면서 시서화 일치의 문인화 이념이 화단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군자(四君子) 등 문인적 화목이 널리 성행했다. 화풍은 청대의 남종문인화풍을 토대로 간일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이색적인 경향이 유행했다.

1870년대 후반부터 개항을 통해 근대적인 외국문물이 유입되면서 조선시대 회화는 서구적 근대주의의 지배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10년부터 본격화되어 서양화가의 출현과 함께 동양화와 서양화로 화단이 나누어졌으며, 1930년대 이후부터는 서양화가 한국회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종 미술교육과 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등을 통해 일본화단의 사조와 화풍이 유입되면서 왜곡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해소되었으나 새로운 민족분단의 상황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역사의식 빈곤과 대중적 기반의 취약 등으로 제한된 발전을 해오다가 1980년대부터 한국회화의 주체성과 국제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세계 미술에 기여할 수 있는 질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의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