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피터르 브뤼헐

대 피터르 브뤼헐

다른 표기 언어 Pieter Bruegel de Oudere
요약 테이블
출생 1525년경,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브레다
사망 1569년 9월 9일, 브뤼셀
국적 네덜란드

요약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의 결혼식>과 <교수대 위의 까치>와 <눈 속의 사냥꾼들>. 브뤼셀의 화가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 아래서 도제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제로 있는 동안 일찍이 인문주의를 접했으며 메헬렌의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아 농부들에 관한 주제를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산악지대의 변화무쌍한 지형을 그린 풍경화와 성서의 장면들, 신화의 장면들도 다루었다. 브뢰헬은 종교적인 충돌이 일어나던 시대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코른헤르트의 견해를 따랐으며,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탐욕과 욕망이 주된 비판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브뢰헬(Pieter Bruegel de Oudere)
브뢰헬(Pieter Bruegel de Oudere)

농민생활의 활달하고 재치 있는 장면과 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 서명과 연대를 적었기 때문에 16세기 플랑드르의 풍경화 전통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초기의 풍경화에서 이탈리아 양식에 영향을 받은 말기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발전을 추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의 회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으며, '벨벳의 브뢰헬'과 '지옥의 브뢰헬'로 각각 알려진 그의 두 아들 얀과 피테르를 거쳐 18세기까지 있었던 한 화가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플랑드르 미술).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1604년(브뢰헬이 죽은 지 35년이 지난 해)에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카렐 반 만데르의 〈화가들의 생애 Het Schilderboeck〉에 따르면, 브뢰헬은 브뤼셀에 살고 있었던 안트웨르펜의 주요한 미술가인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 아래에서 도제로 지냈다. 대규모 작업장의 감독이었던 쿠케는 조각가 겸 건축가이자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디자이너로, 이탈리아와 투르크를 여행했다. 남아 있는 브뢰헬의 초기 작품들이 양식면에서 쿠케의 이탈리아식 미술과 아무런 관계도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후기 특히 브뢰헬이 쿠케의 딸인 마이켄과 결혼한 1563년 이후에는 쿠케의 구도와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여하튼 쿠케의 도제로 있는 동안 그는 일찍부터 인문주의를 접했다. 브뢰헬은 쿠케를 통하여 또다른 전통과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쿠케의 아내인 마리아 베룰스트 베세머스는 달걀 노른자나 끈적끈적한 용매로 갠 안료로 린넨 위에 그리는 템페라나 수채화로 유명한 화가였다.

그 기법은 그녀의 고향인 메헬렌(말린)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브뢰헬도 그것을 사용했다(템페라). 또한 농부들에 관한 주제를 처음으로 우의적으로 다룬 것도 바로 메헬렌의 미술가들이다. 후에 브뢰헬은 안트웨르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 주제들을 다루었다. 1551년 또는 1552년에 브뢰헬은 북부의 미술가들이 그래왔듯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는데, 아마 프랑스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아 있는 여러 점의 회화·소묘 및 에칭들을 보면, 그가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 및 멀리 팔레르모까지 여행했으며, 1553년에는 얼마간 로마에 살면서 미켈란젤로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뒤에는 젊은 엘 그레코를 후원한 유명한 세밀화가인 줄리오 클로비오와 함께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로비오의 재산 목록을 보면 그들이 합작으로 그린 세밀화뿐만 아니라 브뢰헬이 그린 많은 회화들과 소묘들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뢰헬이 처음으로 서명과 연대를 적은 작품인 〈그리스도와 12제자가 있는 티베리아스 호의 풍경 Landscape with Christ and the Apostles at the Sea of Tiberias〉은 1553년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거룩한 인물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트웨르펜 출신의 화가인 마르텐 데 보스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1552년 남쪽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이탈리아 경치를 스케치한 2점의 소묘를 비롯해 남아 있는 초기의 작품으로는 풍경화들이 있다.

1553~56년에 알프스 지역을 그린 많은 소묘들은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온 브뢰헬이 산악지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행에서 그린 풍경화들은 높은 산들의 압도적인 웅장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산골짜기를 그린 소묘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미술에서 거의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이 소묘들 중 현장에서 그린 것은 불과 몇 점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브뢰헬이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온 뒤에 그린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알프스 산맥을 지나면서 스케치한 것들을 결합하여 자유롭게 구도를 잡은 것들이다. 그중 일부는 안트웨르펜의 주요출판업자이자 판화가인 히에로니무스 코크가 주문한 판화의 도안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브뢰헬은 말년까지 코크를 위하여 일하기로 했었지만 뜻밖에도 1556년부터는 풍자적이고 교훈적이며 도덕적인 주제들에 몰두했으며, 이따금씩은 당시에 매우 인기가 좋았던 보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환상적이거나 괴기적인 그림을 그렸다.

다른 미술가들은 대체로 보스와 유사하게 모방하는 데 그쳤지만 브뢰헬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어 자신의 구도로 발전시켰으며, 곧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러한 구도를 사용한 판화가 코크에 의해 출판되자, 브뢰헬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주제와 인물에 대한 관심 때문에 풍경화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브뢰헬은 이 분야에서의 탐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산을 소재로 한 풍경화와 나란히 시골의 숲을 스케치하다가 얼마 후에는 플랑드르의 마을들을 그렸으며 그뒤 1562년에는 암스테르담의 탑과 관문들을 담은 도시 풍경(브장송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소묘들)을 그렸다.

브뢰헬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의 그림에서는 풍경화와 인물이 들어가는 주제에 대한 이중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그의 모든 그림들, 심지어 풍경이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그림들조차 어느 정도 설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이야기를 주로 다룬 그림들에서는 배경을 이루는 풍경이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도 있다. 1558년과 1561년을 제외하고 그 시기에 해마다 연대가 적힌 그림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로 브뢰헬이 1563년에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서 마이켄 쿠케와 결혼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살고 있던 그 도시로 옮겨왔다.

그가 살던 집은 최근에 복구되어 브뢰헬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집이 정말로 그가 살던 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 않다.

브뤼셀에서 브뢰헬은 가장 완숙한 그림들을 그렸지만 브뢰헬이 안트웨르펜을 떠난 뒤로는 히에로니무스 코크에게 건네주던 판화용 도안을 몇 점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그나마 전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회화에 몰두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이 분야에서 그가 점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원자로는 네덜란드 국책회의의 의장인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 추기경이 있었는데 브뤼셀에 있는 그의 궁전에는 조각가인 자크 용얼링크의 작업장이 있었다. 그와 브뢰헬은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안트웨르펜의 부유한 수집가인 그의 형 니클라스는 브뢰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1566년 당시 브뢰헬의 그림을 16점이나 수집하고 있었다. 또다른 후원자로는 그의 사망기사에서 브뢰헬을 16세기에서 가장 완벽한 미술가라고 평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가 있었다.

브뢰헬은 대부분의 그림을 수집가들의 요구에 맞춰 그렸다.

브뢰헬은 1569년에 세상을 떠났고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 묻혔다. 그의 유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인 피테르(1564~1638)와 얀(1568~1625)이 있었는데, 두 아들은 아버지 브뢰헬이 1559년 그의 이름을 Bruegel로 바꾸기 전에 그러했듯이 h를 넣어 Brueghel이란 이름을 썼다.

농부의 결혼식(Peasant Wedding)
농부의 결혼식(Peasant Wedding)

브뢰헬의 작품세계

브뢰헬의 다수의 소묘와 판화 작품 이외에도 그의 것임이 확증된 45점의 그림이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약 1/3이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6~17세기에 브뢰헬의 미술에 대한 합스부르크가 왕자들의 열렬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아 있는 초기의 작품들을 보면 브뢰헬은 기본적으로 티치아노를 비롯한 베네치아의 풍경화가들뿐만 아니라 16세기 플랑드르의 풍경화 전통에도 영향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능가한 풍경화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그림의 곳곳에 드문드문 군중을 묘사하여 인물이 많이 나오는 구도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도 히에로니무스 보스 등 브뢰헬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화가들의 화풍을 찾아볼 수 있다. 1564~65년 이탈리아 미술, 특히 라파엘로에 매료되어 인물의 수를 과감하게 줄였으며 매우 좁은 공간에 소수의 인물을 더 크게 밀집시켜 묘사했다. 1565년에 그는 〈월별(月別) 노동 Labours of the Months〉으로 알려진 유명한 연작을 계기로 다시 풍경화로 돌아섰다. 남아 있는 5점의 작품 중에서 그는 인물보다는 풍경의 강렬한 선을 강조했다.

그뒤 빽빽이 밀집된 상태의 군중이 다시 나타났다.

브뢰헬의 말기 작품들은 이따금 이탈리아 미술과 두드러진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농부의 결혼식 Peasant Wedding〉에서 인물들을 비스듬히 공간에 배치한 것은 베네치아파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농부와 새집을 뒤지는 사람 Peasant and Bird Nester〉(1568, 빈 미술사박물관)과 같은 작품에서의 인물들은 농민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인물에서 풍기는 고상함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아주 말기의 작품들에서는 2가지 경향이 나타나는데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기념비화와 극단적인 단순화가 포함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경이 전달하는 다양한 분위기의 표현성을 탐구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자의 경향은 겨울 그림의 하나인 〈눈 속의 사냥꾼들 Hunters in the Snow〉(1565, 미술사박물관)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후자의 경향은 〈교수대 위의 까치 The Magpie on the Gallows〉의 밝고 쾌활한 분위기와, 마지막 그림으로 추측되는 미완성 작품 〈바다에서의 폭풍우 The Storm at Sea〉의 절박하고 암담한 성격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관찰하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과학적인 정밀성에 입각하여 거의 모든 세부를 주의 깊게 관찰했으며, 여러 그림과 일련의 판화들에서 매우 정밀하게 배를 묘사했다. 당대의 건축 공정을 매우 충실히 나타낸 것으로는 1563년의 〈바벨탑〉(미술사박물관)과 연대 불명의 〈바벨탑〉(로테르담 보이만스반 뵈닝겐 박물관) 2점이 있다. 로테르담에 있는 〈바벨탑〉은 그의 또다른 특징인 동작의 묘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계속해서 실험한 문제였다.

로테르담의 작품에서는 생명 없는 물체인 탑을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여 마치 그것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는 교수대 옆에서 춤추고 있는 농민들과 함께 교수대도 춤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 뚜렷해진다. 농민들의 춤을 그린 여러 그림은 이러한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밖에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길 The Way to Calvary〉·〈성 바울로의 개종〉에서도 그보다는 덜 뚜렷하지만 행렬의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

후자의 작품은 또한 산악지대의 변화무쌍한 지형을 통해 인물들이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산을 그린 초기의 소묘들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후에는 〈이집트로의 피신〉(1563, 런던 세일런 백작 컬렉션)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말년에 브뢰헬은 추락하는 인물을 그리는 데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연구는 〈장님의 우화 The Parable of the Blind〉에 추락의 연속 계단을 묘사한 것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그림은 형식과 내용 및 표현의 완전한 일치로 말미암아 유럽 미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다.

브뢰헬의 그림들은 상당히 폭 넓은 범위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풍경화 이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의 장면들과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풍경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2점의 모사품이 각각 프랑스 왕립미술관과 브뤼셀의 D. M. 반 뷔렌 컬렉션에 있음)과 같이 신화를 다룬 작품, 〈네덜란드 속담〉에서와 같은 속담의 해설들을 다루고 있다.

그의 우의적인 작품들은 2점의 연작 판화인 〈악덕 The Vices〉(1556~57)·〈미덕 The Virtues〉(1559~60)에서처럼 때때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세속적인 사회 풍자도 다루고 있다. 농민 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주제를 분류하기가 어려운 작품들도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싸움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1559, 미술사박물관)·〈어린이들의 놀이 Children's Games〉(1560, 미술사박물관), 그리고 〈미친 메그 Mad Meg〉라고도 알려진 〈뒬레 그리 Dulle Griet〉(1562, 안트웨르펜 마이어반덴베리 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브뢰헬의 많은 작품들이 디르크 코른헤르트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견해를 깊이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윤리에 관한 그의 저술들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와 칼뱅교, 루터파 등 여러 종파의 외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여 그러한 외적인 의식을 신앙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했다. 종교적인 편협으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던 시대에 코른헤르트는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다. 물론 브뢰헬은 좀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결점을 비판했으며, 판화인 〈돈가방과 금고 간의 싸움 The Battle Between the Money Bags and Strong Boxes〉에서 탐욕과 욕망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또한 코른헤르트의 견해를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표면적으로는 예전의 신앙을 유지하여 그랑벨 추기경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