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미술

플랑드르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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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5세기에서 17세기초까지 플랑드르에서 전개된 미술.

특히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과 뛰어난 회화 기법으로 유명하다.

얀 반 에이크(1395~1441)로부터 브뢰헬(1525~69)을 거쳐 루벤스에 이르기까지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유화의 대가였으며 주로 유화로 주변 세계를 힘차고 상세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묘사했다. 플랑드르는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에 둘러싸인 좁은 지역으로 15세기에 부르고뉴의 공작들이 통치하던 평화로운 번영기 이후 종교적인 위기와 내전으로 이어진 오랜 혼란기를 거쳐 끝내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에게 전제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플랑드르 회화에는 그러한 운명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플랑드르파의 선구자들은 대체로 부르고뉴의 공작들이 최초의 수도로 정한 디종에서 활동했다. 필리프 공(1363~1404 재위)은 플랑드르와 부르고뉴의 강력한 동맹을 이루었으며 이 동맹은 1482년까지 1세기가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는 또한 거의 비슷하게 지속된 미술 후원의 전통을 수립했다. 그가 디종에 끌어들인 미술가로는 하를렘 출신의 조각가인 클라우스 슬뤼테르(1340~1406)와 이페르 출신의 화가인 멜키오르 브루데를람(1381~1409경 활동)이 있었는데, 그들의 작품에 두드러진 풍부한 질감은 플랑드르 미술에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형상적 세계에 대한 애착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선량공 필리프(1419~67 재위)는 부르고뉴의 수도를 양모 무역의 중심지인 북쪽의 브뤼헤로 옮겼으며, 이 상업적 도시를 미술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1425년 필리프는 에이크를 공식적인 '화가 겸 시종'으로 고용했다. 〈헨트 제단화 The Ghent Altarpiece〉(1432, 헨트 신트바보 교회)·〈롤린 대주교와 성모 마리아 The Madonna of Chancellor Rolin〉(1432, 파리 루브르 박물관)·〈조반니 아르놀피니 부부 Giovanni Arnolfini and His Bride〉(1434, 런던 국립미술관) 등 에이크의 주요작품은 초기 플랑드르 회화의 시초이자 동시에 절정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조반니 아르놀피니 부부(Giovanni Arnolfini and His Bride)
조반니 아르놀피니 부부(Giovanni Arnolfini and His Bride)

바사리에 따르면, 에이크가 유화기법(불투명한 흰색 바탕 위에 유성 바니시를 사용)을 고안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 기법이 고안되자마자 완벽한 수준에 달했다가 그뒤 쇠퇴해버린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어떤 화가도 표면의 생생함과 색채의 화려함을 그렇게 잘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이크의 미술적 시각은 비록 경직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힘이 있으며 물질적인 현상들을 자유롭게 추구하면서도 그 모든 것에 압도적인 정신성을 확고하게 불어넣었다.

그 다음 세대의 화가들은 계속 화려한 색채와 풍부한 표면 질감으로 그들의 작품을 장식했지만 현명하게도 에이크를 모방하지 않고 이탈리아 미술에 관심을 돌려 회화 구도를 발전시켰다.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1400~64)은 그의 걸작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The Escorial Deposition〉(1435, 마드리드 에스코리알)에서 이 장면의 극적인 효과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 비본질적인 요소는 모두 제거했다. 슬픔에 잠겨 모여든 사람들이 이루는 선의 리듬은 좁고 빽빽한 구도를 수평으로 가로질러 그림을 보는 이의 시선이 세부에 치우치는 것을 막는다. 페트루스 크리스투스(1410~72)는 인물의 신체적 구조를 연구하여 기묘한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냈으며 디르크 보우츠(1415~75)는 플랑드르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정확한 일점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물과 주변 사이의 비례를 조화롭게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들은 초기 플랑드르 전통의 성향과는 이질적인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15세기 후반 부르고뉴 가문이 멸망하고 브뤼헤가 경제적으로 붕괴되면서 플랑드르 사람들이 자신감이나 종교적 신념을 잃게 됨과 아울러 필연적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초기 플랑드르 미술의 후기 대가들 중 휘고 반 데르 후스는 미쳐버렸고, 한스 멤링과 헤라르트 다비트는 주로 우울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으며 때때로 초기 작품을 묘사한 진부한 작품들을 남겼다.

세기말에 대륙을 지배한 정신적 위기와 좀더 일치한 것으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가 그린 기괴한 우의화들이 있었다.

3개의 패널에 그린 〈쾌락의 동산 Garden of Earthly Delights〉(1500경,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인류는 낙원에서 타락하여 벌을 받고 무리지어 옮겨다니면서 감각적인 만족을 주는 무수한 환상들을 쫓는다. 16세기의 플랑드르는 혼란에 빠졌고 미술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 때의 뛰어난 대가로 오로지 피테르 브뢰헬 만을 들 수 있다.

얀 호사르트(1478~1535)는 바사리가 극찬한 이탈리아풍의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요아킴 파티네르(1475~1524)는 네덜란드 풍경화 전통의 시조가 되었지만, 당대의 혼란은 바로 농민의 생활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브뢰헬의 그림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보스의 영향을 받고 이탈리아에 2년 동안 머무르면서 미술을 공부한 브뢰헬은 단단한 구조와 율동적인 붓놀림, 기괴한 것에 대한 도덕적 풍자를 특징으로 하는 힘 있는 양식을 개발했다.

브뤼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저주를 그린 그림으로 말미암아 헬 브뢰헬이라고도 불리는 피테르 브뢰헬이고, 다른 한 명은 정물화를 전문으로 그렸고 벨벳 브뢰헬이라고도 불리는 얀 브뢰헬(1568~1625)이다.

얀 브뢰헬은 플랑드르 바로크 시대의 뛰어난 대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거대한 공방에 들어가 조수로 일했다.

루벤스는 유화를 다루는 솜씨가 대단히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 못지않은 사교성과 수완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주들(그는 이들과 친한 관계였음)을 위해 매우 힘 있고 활기차며 부드럽고 밝은 그림들을 그렸다. 〈세워지는 십자가 The Elevation of the Cross〉(1610, 안트웨르펜 대성당)와 같은 초기의 성숙한 작품들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의 대가인 미켈란젤로, 틴토레토, 카라바조를 주의 깊게 연구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한편, 물결 모양의 비단 같은 표면처리와 동물적인 활기 등에서 전적으로 플랑드르 성향을 지니고 있다.

세워지는 십자가(The Elevation of the Cross)
세워지는 십자가(The Elevation of the Cross)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기념한 연작(1622~25,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루벤스의 성숙한 우의적인 양식은 바로크 시기의 화려한 취향에 이상적으로 어울렸다. 이 화려한 작품들에서는 고대신화에 나오는 육감적인 신들이 공중에서 빙빙 돌면서 내려오거나 바다에서 솟아오르면서 이 여자의 생애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

전성기에 루벤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완성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일거리를 주문받았다. 그의 공방은 많은 플랑드르 화가들의 수련장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뒤에 영국에서 궁정 초상화가로서 유명해진 천재 안톤 반 데이크와 정물화를 전문으로 그린 프란스 스네이데르스 및 흥겹게 즐기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다비트 대(大)테니르스와 아드리안 브라우어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