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데이크

반 데이크

다른 표기 언어 Sir Anthony Van Dyck
요약 테이블
출생 1599. 3. 22, 안트웨르펜
사망 1641. 12. 9, 런던
국적 플랑드르

요약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17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Van Dyck는 Vandyke라고도 씀. (플). Anthonie(Antonie/Anton) Van Dyck.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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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성장배경과 초기생애
  3. 안트베르펜과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4. 영국에서의 말년
  5. 평가

개요

유럽 귀족층의 초상화와 종교적·신화적 주제를 많이 그린 화가이자 섬세한 도안가이며 동판화가였다.

1632년 영국 왕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고 같은 해 기사작위를 받았다(→ 플랑드르 미술).

성장배경과 초기생애

부유한 비단상인 프란스 반 데이크의 12명의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10세 때 안트베르펜에서 성공한 화가 헨드릭 반 발렌의 도제가 되었으며, 그후에는 1608년 이후 안트베르펜 미술계를 주도하던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반 데이크의 가장 초기 작품은 한 남자의 초상화로서 1613년에 그려졌고 자화상도 비슷한 시기의 것이다. 그가 그림을 시작한 처음 8년간의 인물구성은 명백히 루벤스의 감상적 양식을 본뜬 것이지만, 에나멜 같은 광택을 사용하는 루벤스의 기법 대신에 거친 질감으로 직접 채색했다. 그의 색감은 루벤스보다 더 어둡고 따뜻하며 명암이 뚜렷하고 인물상의 동작이 모난 데다 균형의 조화가 덜하다. 그는 인물의 표정을 과장되게 그렸는데 이를테면 성인들이 격심한 열광이나 열띤 도취경에 빠진 모습, 사형집행인들의 잔혹한 태도, 사티로스들의 호색적인 미소, 주신 디오니소스와 함께 실레누스 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모습 등이 그렇다.

그가 초기에 그린 벨기에의 귀족계급과 그 부인들은 주로 흉상이나 무릎 길이의 반신상으로 묘사되었으며 손은 장갑이나 다른 물건을 들고 있지 않으면 의자 뒤나 팔걸이에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가장 초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배경에 아무 것도 없었으나 루벤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배경을 풍부하게 해주는 기둥 따위의 지지물이 도입되었고 의상과 장식물은 완숙한 기량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언제나 실물과 꼭 닮은 느낌을 주는 그의 초상화는 모델을 차분하고 기품있게 나타내며 표정도 다정하기보다는 신중한 느낌을 준다.

반 데이크는 조숙한 화가로서 겨우 18세 때 법정소송에서 가장의 역할을 했고 19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법적인 성년으로 인정받았으며 1618년 2월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에 장인으로 등록했다. 그가 언제 루벤스의 작업실에 들어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620년 7월 17일 아룬델 백작 토머스 하워드가 쓴 편지에 따르면 "반 데이크는 여전히 루벤스와 함께 지내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그의 작품은 점차 스승에 못지않게 칭찬받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

1620년 3월 루벤스는 '반 데이크와 다른 문하생 몇 명'을 조수로 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가 완숙한 개성적 화풍을 이루었음을 볼 때 그는 루벤스의 제자라기보다 협력자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630년 이후 루벤스와 반 데이크의 관계는 갈등을 겪지만 루벤스가 이 젊은 경쟁자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루벤스는 반 데이크를 도와 자신의 후원자인 아룬델 백작의 보호 아래 반 데이크가 최초의 영국 여행(1620. 11~1621. 2)을 할 수 있도록 천거했다.

안트베르펜과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100파운드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궁정에 머물러 있기가 싫어서 반 데이크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1621년 10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때에도 루벤스의 천거 덕택에 순탄하게 활동해나갈 수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제노바였는데 여기서 그는 14년 전 루벤스의 활동을 후원했던 귀족가문의 즉각적인 후원을 얻었다.

반 데이크는 줄곧 제노바를 본거지로 삼았지만 한편으로 로마·베네치아·파도바·만토바·밀라노·토리노 등지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24년에는 팔레르모를 방문하여 스페인계 부왕인 사보이의 마누엘 필리베르트를 그렸다. 곳곳에서 그림 주문을 맡았지만 그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시기를 위대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활용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스케치 화집을 보면 그는 베네치아파의 거장들, 특히 티치아노에게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빠른 스케치로 무수하게 베끼면서 이따금 색채에 관한 메모와 자연스러운 찬탄의 말을 덧붙였다. 이탈리아 시절의 반 데이크가 그린 몇 안 되는 인물화는 은연중에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채색과 세련된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루벤스와 볼로냐파 거장들에게 영향받은 흔적은 이탈리아에서 그린 종교화 가운데 가장 완성된 작품인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 Madonna of the Rosary〉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개 전신상인 이탈리아 초상화는 장중함과 귀족적 세련미를 강조하는데 반 데이크는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기마초상화를 제작했다.

앞선 시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들이 대개 관람객을 마주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마치 무슨 중요한 문제에 골몰한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제노바 귀족계급 부인들을 그린 초상화 중 일부는 화려하게 비단옷으로 치장한 모습 속에 겸손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1627년 7월 반 데이크는 다시 안트베르펜에 돌아와 1632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루벤스가 외교직책에 발을 디딘 1626년부터 외국사절로 나간 1630년까지 빈번하게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많은 후원자들이 반 데이크에게로 몰려들었으며 제단화와 초상화 주문이 쇄도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조수를 고용했다.

이 시기 동안 반 데이크는 유채 및 초크를 사용하여 제후와 병사, 학자, 예술후원자, 특히 동료예술가들의 소형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를 장차 동판화로 새겨 출판할 구상을 했다. 이 초상화들 중 적어도 15점은 반 데이크가 직접 에칭으로 제작했으며 나머지는 동판화로 새겨, 1645~46년 반 데이크의 〈도상학 Iconography〉으로 널리 알려진 연작화집을 최초로 출판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작품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경향은 안트베르펜에서 보낸 5년 동안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반 데이크와 그의 후원자들은 격렬함보다는 부드러운 정서를 담은 주제가 그의 재능에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시기의 걸작품들을 보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자애로운 성모상이나 비탄에 잠긴 슬픈 성모상이 등장하며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성인들을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로 감동을 준다. 1629년 반 데이크는 아버지를 기념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와 성 도메니쿠스를 그렸는데, 이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 중 하나로서 반(反)종교개혁에 의해 권장된 정신의 강렬함이 잘 나타나 있다.

신화나 우화에서 따온 반 데이크의 가장 매력있는 설화 그림 몇 점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당시 그의 그림기법은 상당히 간소화되어 청색·회색·분홍색·황토색·적갈색 등을 미묘하게 배합하여 엷게 칠했으며 색상과 색조의 감미로운 분위기에 역점을 두었다. 그의 그림은 비단과 머리카락, 사람의 피부 등을 그리면서 관능적이라고 할 만한 질감 표현을 계속 추구했지만 점차 차갑고 인위적인 느낌을 주었다.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초기시절처럼 흉상과 반신상이 다시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모델 가운데는 유럽의 대단한 왕족가문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최고 걸작들 일부는 세리라든가 예술후원자, 학자, 성직자, 수많은 안트베르펜 미술가 등을 그린 그림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1634~35년 대륙 방문중에 그린 초상화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유능한 외교관 아베 스칼리아의 초상화인데, 반 데이크는 그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종교화인 〈탄식 Lamentation〉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들 초상화에는 과장된 수사학적 포즈를 애호하는 새로운 경향이 눈에 띈다. 일부 인물들은 경쾌한 손동작으로, 청중에게 연설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영국에서의 말년

1632년 2월 네덜란드를 잠시 여행한 뒤 반 데이크는 또다시 영국으로 가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 왕 찰스 1세는 그를 '국왕의 상시적인 수석화가'로 임명하고 기사작위를 수여했으며 황금사슬을 하사하고 200파운드의 연봉을 책정했다. 그러나 1634년 3월 반 데이크는 또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다. 표면상의 이유는 자기 가문의 토지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지만 아마도 그해 가을 부임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스페인 총독을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안트베르펜의 미술가 길드는 그를 '명예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러한 칭호는 일찍이 루벤스에게만 부여되었을 뿐이었다. 1635년 반 데이크는 1년가량의 부재 이후 다시 영국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지방 길드의 관할구역 밖에 있는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에 살았으며 찰스 1세가 즐겨 그곳을 방문하곤 했다. 여름 동안에는 켄트 주의 엘덤 성을 별장으로 사용했다.

그는 거의 초상화만 그렸는데 초상화는 그의 그림 중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었다. 1648년 혁명 이전의 영국 상류사회 인물들의 모습은 항상 반 데이크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는 찰스 1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미술의 역사 The Story of Art〉(1950)의 저자인 E. H. 곰브리치의 표현을 빌리면 찰스 1세의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역사 속에 이렇게 남았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즉 비길 데 없는 우아함과 권위, 높은 교양의 소유자이자 예술의 보호자이며 신성한 왕권의 보유자로' 그려졌다.

그와 같은 왕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흉상을 조각했는데 그 조각은 1697년에 소멸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린 초상화처럼 그는 전신상을 주로 그렸으나 영국 후원자들의 모습은 좀더 엄격하고 대체로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문학취미를 반영한 보기 드문 특징으로는 알레고리와 신화적인 장식을 사용한 점을 들 수 있다. 귀부인들은 종종 장미꽃을 들거나 항아리에서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근 모습으로 그려졌다.

해바라기가 있는 자화상은 반 데이크가 왕에 대해 가진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형식성과 자연스러움을 결합해내는 반 데이크의 재능은 군상을 그린 주문 초상화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마지막 10년의 시기 동안에 그린 초상화로는 나소지겐 백작 존 일가를 그린 그림과 현존하는 그의 그림 중 가장 대작(너비 580㎝ 이상)인 펨브로크 백작 필립 허버트 일가를 그린 그림이 있다(〈펨브로크 기족〉). 그밖에 찰스 1세의 자녀들을 그린 몇몇 작품에서 그는 모델이 아무리 신중하게 위엄있는 자세를 취하더라도 소년다운 천진난만함을 빠뜨리지 않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위신을 높일 수 있는 능률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모델들과 약속을 1시간마다 정하고 부수적인 처리는 조수들에게 맡겼다. 국왕이 대가를 늦게 지불하거나 화가 자신의 요구액을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반 데이크는 많은 초상화를 그려 안정된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의 생활은 고객들의 생활에 뒤지지 않을 만큼 사치스러웠다. 1639년 메리 루스벤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조의 정치적 운세가 기울어가는 것을 그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화이트 홀의 연회장을 〈가터 기사들의 행진 장면 Procession of the knights of the Garter〉을 담은 태피스트리로 장식하려던 야심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1640년 9월 다시 영국을 떠났다.

이는 어쩌면 5월에 죽은 루벤스의 직위를 대신하고자 하는 희망에 이끌린 것일 수도 있다. 1641년 11월말 그는 병든 데다 계획도 이루지 못한 채 런던으로 되돌아왔으며 죽어서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평가

반 데이크는 용모가 준수했으나 신체가 약하고 키가 작은 편이었다.

사회적으로 야심가였지만 가족들에게 줄곧 충실했으며 동료 화가들과도 진실하게 교제했다. 그의 태도는 상냥하고 애교가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호색적이고 방탕한 구석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성격상 어떤 결함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결코 게으른 인물은 아니었다. 쉽게 그리는 솜씨뿐만 아니라 대단한 근면성이 있지 않고는 42세에 죽은 사람이 그처럼 방대한 양의 그림을 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린 사본을 제하고도 500점이 현재 남아 있다.

반 데이크의 영향은 지속적이어서 젊은 세대의 플랑드르 화가들은 루벤스보다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초상화가들, 특히 런던에서 활동한 피터 릴리 경과 고드프리 넬러 경 같은 이들은 여러 토착 영국 화가들이 그랬듯이 그의 기법을 계속 이어갔다. 18세기의 위대한 영국 초상화가들 중에서 특히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화풍은 반 데이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주로 목판화로 반 데이크의 작품을 접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화가들도 그의 종교화를 모방하거나 때로는 심지어 그대로 베끼기까지 했다. 반 데이크의 불후의 명성은 주로 그의 초상화로 인한 것이다. 안트베르펜의 상류층과 예술가들을 그리거나 제노바의 귀족들을 그리거나 아니면 찰스 1세의 왕실을 그리거나 간에 그는 모델들의 개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그들을 이상화해냈다.

그는 앞서 한스 홀바인과 안토니오 모로, 티치아노, 루벤스 등에 의해 형성된 초상화 기법을 채용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변화형을 창의적으로 고안해냈으며, 대상을 아무리 정확히 그리더라도 완벽한 형식성을 유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그는 항상 높이 평가받아왔지만, 이전에는 그의 말기 작품이 가장 주목되었던 반면 20세기에는 그의 청년기와 제노바 시대 작품들이 그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자들과 수집가들은 또한 이전에 소홀히 취급되었던 유화 스케치라든가 다감한 풍경습작들을 비롯한 많은 소묘와 수채화에 갈수록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