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게인즈버러

토머스 게인즈버러

다른 표기 언어 게인즈버러 , Thomas Gainsborough
요약 테이블
출생 1727년 5월 14일, 잉글랜드 서퍽 서드베리
사망 1788년 8월 2일, 런던
국적 영국

요약 18세기 영국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앤드루 부부>와 <푸른 옷의 소년>와 <아가일 공작 4세 존>. 모직물 제조업자인 존 게인즈버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런던으로 가 위베르 글라블로의 밑에서 프랑스의 로코코풍을 배웠다. 이는 게인즈버러가 그의 화풍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찍부터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주로 초상화 의뢰를 많이 받았지만 목가적인 풍경화도 계속 그렸다. 런던으로 이주한 뒤로는 왕실로부터 인정받아 조지 3세와 왕비의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게인즈버러는 당시 영국의 모든 화가 중에서 새로운 생각과 기술을 기꺼이 시험해보고자 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 받는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과 서퍽 시절
  3. 바스 시절
  4. 런던 시절
  5. 평가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개요

몇몇 초기 초상화에는 〈앤드루 부부 Mr. and Mrs. Andrews〉(1750경) 등과 같이 풍경을 배경으로 모델들이 무리지어 있는 그림도 있다.

앤드루 부부(Mr. and Mrs. Andrews)
앤드루 부부(Mr. and Mrs. Andrews)

유명해진 뒤부터는 상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하면서 〈푸른 옷의 소년 The Blue Boy〉(1770경)에서와 같이 어느 정도 반 데이크의 영향을 보이는 좀더 형식주의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그의 풍경화는 목가적이다. 말년에는 바다 풍경화도 그렸고 시골 사람과 어린이들을 실물 크기로 이상화하여 그리기도 했다.

푸른 옷의 소년(The Blue Boy)
푸른 옷의 소년(The Blue Boy)

어린시절과 서퍽 시절

게인즈버러는 모직물제조업자인 존 게인즈버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풍경화에 소질이 있던 그는 13세 때 아버지를 설득하여 런던으로 가서 공부했다. 당시 런던 미술계의 중요인물이었던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 위베르 그라블로의 조수로 일하면서 프랑스 로코코풍을 배웠고, 이는 그의 화풍이 발전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746년 런던에서 보퍼트 공작의 서녀(庶女) 마거릿 버와 결혼했다. 그뒤 서퍽으로 돌아와 1752년 입스위치에 정착했고 1748년과 1752년에 두 딸 메리와 마거릿을 낳았다.

그곳에서 그의 첫번째 전기작가인 필립 식니스를 만났으며 일찍부터 초상화 겸 풍경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했다.

바스 시절

좀더 폭넓은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1759년 바스로 이주했다.

그의 작업실은 곧 상류층 고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음악계와 연극계의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그중에는 그가 초상화를 그려준 린리가(家) 사람들도 있었다. 바스에서 자신이 찬양하는 배우 데이빗 개릭을 만나 여러 차례 그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평생 음악과 무대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

서부지방에서 여러 명문가(名門家)를 방문했고 윌튼에서는 후기 작품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친 반 데이크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초상화를 부탁하는 요구가 많았지만 풍경화도 계속 그렸다. 1761년 뉴전트 백작의 초상화를 미술가협회에 보냈고 그 이듬해 처음으로 런던 언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760년대에 런던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으며 1768년에는 왕립아카데미의 창립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심의과정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바스로 이주한 뒤 게인즈버러는 풍경을 그릴 시간이 많지 않아 종종 촛불 아래에서 작업실에 꾸며 놓은 소형 풍경 모형을 보고 기억을 되살려 그리곤 했다.

1760년경에는 네덜란드 화가들보다는 루벤스를 더 좋아했다. 이러한 경향은 풍부한 색채와 아름답고 부드러운 파스텔 음영을 띤 작품 〈시장에서 돌아오는 농부 Peasants Returning from Market〉에 잘 나타나 있다.

선이 유연하고, 서퍽의 땅딸막한 오크 나무와는 사뭇 다른 커다란 너도밤나무를 그린 〈추수마차 The Harvest Wagon〉에서도 루벤스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목가적인 풍경에는 현실과 이상이 완벽하게 뒤섞여 있다. 마차에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은 안트웨르펜 성당에 있는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scent from the Cross〉(1611~14)에 기초해서 그린 것으로 게인즈버러는 루벤스의 이 작품을 모사한 바 있다.

바스에서 게인즈버러는 더 세련된 고객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윌튼에서 반 데이크를 연구한 것을 기초로 하여 더 형식적이고 우아한 초상화 양식을 채택했다.

그는 윌튼에서 펨브로크 가족을 그린 반 데이크의 그림을 자유롭게 모사했다. 〈세프턴의 이사벨라 백작부인 Isabella Countess of Sefton〉을 그린 1769년까지의 작품에 나타나는 장엄하고 단순한 구도와 미묘한 옅은 색조에서 반 데이크의 세련된 영향력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게인즈버러의 유명한 작품 〈푸른 옷의 소년〉은 1770년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소년을 반 데이크풍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리면서 그는 그 대가에게 경의를 표했을 뿐 아니라 18세기 화풍을 따랐다.

반 데이크의 영향은 공식적인 초상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화려한 옷을 입은 〈아가일 공작 4세 존 John, 4th Duke of Argyll〉은 장엄한 양식으로 그려졌으며 〈브리스톨 백작 3세 어거스터스 존 Augustus John, Third Earl of Bristol〉은 같은 부류의 레이놀즈 작품과 견줄 만하다.

아가일 공작 4세 존(John, 4th Duke of Argyll)
아가일 공작 4세 존(John, 4th Duke of Argyll)

게인즈버러는 유명인사보다 친구들을 그리기 좋아했다. 나이 지긋하고 성격이 강한 모델들인 위브데일 프라이스, 윌리엄 세인트 퀸튼 경, 토머스 카워드 등을 그린 1760년대의 초상화들은 그의 유머감각 및 모델들과의 공감이 나타나 있다.

런던 시절

1774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팔말에 있는 숌버그하우스에 정착했다.

곧 왕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행동과 토리당을 지지한 덕분에 공식 궁정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보다 조지 3세의 사랑을 더 받았으며, 1781년에는 조지 3세와 왕비의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게인즈버러는 풍경화도 계속 그렸다. 영국의 문필가 호레이스 월폴은 〈휴양지 The Watering Place〉가 루벤스 화풍을 보여준다고 했으나, 게인즈버러가 동판화 몇 점을 갖고 있던 클로드 로랭의 고전적인 평온함도 상당히 엿보인다.

1783년 그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애호가들이 격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직접 보기 위해 디스트릭트 호수로 원정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당시 영국의 시골 저택들에 흔히 걸려 있던 가스파드 뒤게의 그림과 유사한 산(山) 경치를 여러 장 그렸다.

1780년대부터 그린 바다풍경화 몇 점에는 네덜란드 바다풍경화의 전통이 느껴지는 새로운 유형의 사실주의가 나타나 있다.

말년에 그는 영국 시골의 목가적 이상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인 농부의 생활을 담은 그림을 잇달아 그렸다. 〈시골집 문 The Cottage Door〉이 그 예이다. 그러나 가장 말년에 그린 풍경화 가운데 하나인 〈시장 마차 The Market Cart〉는 이상화된 측면이 덜하고 실제 자연에 더 가까우며, 울창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빛의 처리에서 컨스터블(Constable:영국의 풍경화가, 1776~1837)의 화풍을 예고한다.

영국의 주요 초상화가들 가운데 풍경화를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은 사람은 게인즈버러뿐이었다.

백묵, 펜과 담채, 수채화물감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더러는 니스를 칠한 작품도 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종이와 새로운 기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또한 놀라운 조명효과를 내는 환등기도 만들었는데, 그 환등기 상자와 몇 장의 슬라이드가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도 에칭과 애쿼틴트 판화 연작도 제작했다. 소묘는 절대로 팔지 않았고, 대부분의 소묘들은 회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평범한 습작이 아니라 단연 예술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게인즈버러는 고객 명부를 관리하는 데 꼼꼼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시기에 비해 런던 시절 초기에 그린 초상화들에는 거의 날짜가 씌어 있지 않다. 1777년에는 유명한 〈그레이엄 부인 Mrs. Graham〉·〈아벨 C.F. Abel〉·〈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헨리 William Henry, Duke of Gloucester〉·〈글로스터 공작부인 마리아 Maria, Duchess of Gloucester〉 등을 왕립아카데미에서 전시했는데 모두 매혹적이며 아주 밝은 색으로 그린 것들이다. 〈샬롯 여왕 Queen Charlotte〉은 위의 작품들보다 표현이 절제되어 있고 리본과 레이스로 꾸민 주름잡힌 흰 옷을 입은 주인공은 어느 모로 보나 왕비처럼 보인다.

게인즈버러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많은 화가들과 달리 옷주름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조수 화가들을 거의 고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784년작 〈3명의 손위 공주들 Three Eldest Princesses〉에 대해 왕립미술원은 정해진 높이에 전시할 것을 고집했고 게인즈버러는 그 위치가 너무 높아 가벼운 필치와 섬세한 연필의 선을 감상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하여 아카데미 측과 말다툼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항의로 그는 전시하려 했던 그림을 떼어내 다시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

후기의 여자 초상화 가운데 몇 작품에서 게인즈버러는 깔끔한 마무리를 생략하고 초상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전체 효과에 관심을 집중했다.

〈셰리단 부인 Mrs. Sheridan〉은 풍경 속에 형상이 녹아들어가며, 파랑과 초록이 조화를 이룬 〈베이트 더들리 부인 Lady Bate Dudley〉은 거의 추상에 가까운 환상적 초상화이다. 한편 〈시돈스 부인 Mrs. Siddons〉은 게인즈버러가 여전히 놀랍도록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화가임을 보여준다. 후기의 남자 초상화는 두드러진 것이 거의 없지만 음악가의 초상화인 〈요한 크리스티안 피셔 Johann Christian Fischer〉와 미완성의 〈애빙던 경 Lord Abingdon〉(개인 소장)이 예외적이다.

1783년에 그린 〈성 제임스 공원의 산책터 The Mall in St. James' Park〉는 새로운 모험적 시도를 보여주는데, 이 공원풍경을 호레이스 월폴은 "숙녀의 부채처럼 온통 나부낀다"고 묘사했다.

낭만적 분위기의 사람들이 자연풍경 속에 거니는 〈아침산책 The Morning Walk〉도 같은 화풍으로 그린 것이다.

게인즈버러는 1780년대에 상상화들을 그리면서 특별한 기쁨을 느꼈다. 이것들은 〈우유통을 든 시골 소녀 The Cottage Girl with a Bowl of Milk〉같이 모델을 보고 상상하여 그린 시골 아이들과 농부들의 실물 크기 초상화이다.

이런 작품들에 대한 구상은 서퍽의 작은 시골 사람들을 그린 그림에서 미숙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바르톨로메 무리요의 〈성 요한 St. John〉을 본떠서 그 구상을 더 진전시켰다. 그는 1788년에 죽어 큐 교회 묘지에 묻혔다.

평가

18세기 영국의 모든 화가들 중에서 토마스 게인즈버러는 언제든지 새로운 생각과 기술을 기꺼이 시험해보고자 한 가장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화가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같은 시대의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에 대해서는 '참으로 변화무쌍한 친구'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레이놀즈와 달리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그다지 믿지 않았고 역사화의 유행을 비웃었다. 직관에 따르는 화가였던 그는 시와 같은 그림을 즐겼다. 그의 활기 넘치는 편지를 보면 게인즈버러가 따뜻한 마음씨, 아량, 독자성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의 대가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과 기법에 대해 논한 그의 글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며 당대의 예술관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