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베첼리오

티치아노 베첼리오

다른 표기 언어 Tiziano Vecellio
요약 테이블
출생 1488년~경, 베네치아 피에베디카도레
사망 1576년 8월 27일, 베네치아
국적 이탈리아

요약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베네치아파 화가로 주요 작품은 <성모승천>과 <비너스 예찬>. 당대 가장 뛰어난 화가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였으며 벨리니의 또다른 제자 조르조네와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로 인해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초기 작품들은 구별하기가 어려우며, 조르조네의 미완성작 <잠자는 비너스>의 배경을 티치아노가 그려넣기도 했다. 티치아노는 평생에 걸쳐 신화를 주제로 한 연작과 종교화, 초상화를 그렸다. 전성기에 그린 종교화 <빌라도 앞에 선 예수>에는 미켈란젤로로부터 받은 영향이 반영되어 있으며 르네상스 이후 16세기 중반에 등장할 마니에리스모 양식도 예견되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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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치아노의 초기생애와 작품
  2. 티치아노의 성숙기
    1.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
    2. 종교화
    3. 초상화
  3. 티치아노의 말기
    1. 초상화
    2. 종교화
  4. 티치아노의 말년
    1. 베네치아에서의 말년
    2. 초상화
    3. 종교화
    4.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

티치아노는 일찍이 뛰어난 대가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왔다. 미술이론가 조반니 로마초는 1590년에 그를 '이탈리아의 여러 대가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화가들 가운데 태양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오늘날에도 티치아노의 천재성은 전혀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성을 꿰뚫고 있으며 종교화는 젊은 시절에 즐겨 그린 성모상으로부터 말기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예수의 매장 Entombment〉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정서를 보여준다. 한편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에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교적인 쾌활함과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벌거벗은 비너스(〈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나 다나에(〈다나에와 유모 Danae with Nursemaid〉)의 표현에서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관능성의 기준을 세웠고 루벤스나 니콜라 푸생 같은 후세의 대가들도 즐겨 그를 모방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비너스 예찬(Worship of Venus)
비너스 예찬(Worship of Venus)

티치아노의 초기생애와 작품

초기 오랫동안 티치아노의 출생연대는 1477년으로 알려져왔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은 그보다 다소 늦은 1488(또는 1490)년으로 보고 있다.

티치아노는 하급관리였던 그레고리오 디 콘테 데이 베첼리와 그의 아내 루치아의 아들로, 베네치아 북쪽 지방의 작은 마을인 피에베디카도레에서 태어났다. 9세에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삼촌댁에서 살기 위해 베네치아로 갔으며 곧 그곳의 모자이크 제작자 세바스티아노 추카토의 도제가 되었다. 그후 벨리니가(家)의 공방으로 옮겨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베네치아파 화가였던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가 되었다.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들은 벨리니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주며 또한 벨리니의 또다른 제자였던 조르조네(1477~1510)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받은 영향도 보여준다. 1508년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와 공동으로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인 교역소에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이와 같은 공동작업으로 인해 16세기초에 그린 이 두 화가의 그림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프레스코들은 군데군데 파손된 윤곽들만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주요장면인 〈정의 Allegory of Justice〉는 티치아노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760년 안토니오 마리아 차네티가 이 프레스코들을 본떠 만든 동판화도 상당히 훼손된 상태이기는 하나 이 두 화가의 작품을 특징짓는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육감적인 미감각을 더 잘 보여준다.

티치아노가 단독으로 맡은 첫번째 주문 작품은 파도바에서 성 안토니우스의 3가지 기적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들이다. 〈말하는 아기의 기적 Miracle of the Speaking Infant〉은 이 연작 중 가장 뛰어나다. 또다른 작품인 〈화를 잘 내는 아들의 기적 Miracle of the Irascible Son〉의 아름다운 배경은 당시 티치아노와 조르조네가 그린 작품들과 분위기와 지형 면에서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당대의 미술이론가인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의 기록에 따르면, 1510년 조르조네가 죽은 뒤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미완성작 〈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드레스덴 회화관)의 배경에 풍경을 그려넣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티치아노가 〈예수의 세례 Baptism of Christ〉(1515경,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의 배경에 그린 풀이 무성한 풍경은 여전히 조르조네풍이다.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작품을 구별하기 가장 어려운 분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푸른 옷을 입은 남자 Gentleman in Blue〉(〈아리오스토 Ariosto〉로도 알려져 있음)는 T.V.(Tiziano Vecellio)로 서명되어 있어 분명히 티치아노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모델이 입은 옷의 누비 소매에서 볼 수 있는 풍만함과 재질감은 티치아노 특유의 화풍에 가깝다. 반면에 〈전원의 합주 The Concert〉는 가장 논란이 많은 초상화들 가운데 하나인데, 이 작품은 17세기 이래 조르조네의 대표작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의 학자들은 중앙 인물의 명확한 묘사와 현저한 심리적 표현으로 미루어 이 작품을 티치아노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신화를 주제로 한 초기 작품들도 역시 시적인 이상향의 세계만을 그린 조르조네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것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인 야코포 산나차로와 피에트로 벰보의 애정시에서 엿볼 수 있는 목가적인 세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젊은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 조심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감미로우면서 슬픈 분위기가 감도는 〈남자의 세 시기 The Three Ages of Man〉를 꼽을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성애와 속애 Sacred and Profane Love〉 역시 이상화된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이 나타내는 우의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이론과 상징적 의미에 따라 두 여성이 쌍둥이 비너스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왼쪽에 있는 지상의 비너스는 물질적이며 지적인 자연의 생식력을 나타내는 반면, 오른쪽의 벌거벗은 비너스는 영원하고 신성한 사랑을 나타낸다.

티치아노의 성숙기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

바코스와 아리아드네 티치아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에스테의 알폰소 1세는 페라라에 있는 그의 성에 새로 개축한 알라바스트로실(室)의 장식화 책임자로 그를 불러들였다.

신화를 주제로 한 이 연작들 중 〈비너스 예찬 Worship of Venus〉·〈안드리아 사람들 The Andrians〉은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바코스와 아리아드네 Bacchus and Ariadne〉는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다. 〈바코스와 아리아드네〉는 쾌활한 분위기와 이교도적인 자유분방함 및 절묘한 유머 감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의 목가적 세계를 해석하고 있어 르네상스 미술의 기적으로 손꼽힌다.

의도적으로 비대칭을 이루도록 나누어놓은 인물들의 무리는 녹음이 우거진 풍경 속에 따뜻하고 풍부한 색채로 조화롭게 표현되어 있다. 이 무렵 그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인 〈신들의 향연 Feast of the Gods〉(워싱턴 국립미술관)의 배경을 다시 그려 이 그림이 걸린 페라라의 알라바스트로실을 장식한 다른 연작들과 좀더 어울리게 했다. 화면에 비스듬히 누운 여인 누드의 전형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에서도 이상화된 여체의 묘사와 자세는 변함 없으나 다만 비너스가 깨어 있는 모습으로 궁전의 커다란 방에 놓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이 두 작품은 비길 데 없이 빼어난 형태미를 보여준다. 티치아노는 본질적으로 관능적인 느낌의 이 주제를 평생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절제와 운치 있게 그렸다.

종교화

1516~38년에 티치아노가 남긴 종교화들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대작에 속하는 것은 〈성모승천 Assumption〉(1516~18)이다.

이 대작은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데이프라리 교회 주제단에 놓여 있어 성모의 승리가 나타내는 장엄한 광경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성모는 천사들과 함께 승천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이 기적을 보고 흠칫 놀란 모습들이다. 〈성모 승천〉에 그려진 성모의 자세와 〈성 프란체스코와 성 알비세 및 기증자인 알비세 고치의 경배를 받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with SS. Francis and Alvise and Alvise Gozzi as Donor〉의 구도를 보면 티치아노가 당대의 라파엘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제단화 〈부활 Resurrection Altarpiece〉에 그려진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자세는 미켈란젤로에게서 받은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그의 특징을 이루는 풍경과 신체 유형 및 채색은 전적으로 티치아노만의 고유한 표현이다.

〈페사로의 성모 Pesaro Madonna〉(1519~26)에서 티치아노는 새로운 유형의 구도를 창안했다. 여기에서 성모와 성인들은 페사로가(家)의 남자들과 함께 교회의 거대한 주랑 현관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져 있다. 명암 표현이 풍부한 이 작품은 이후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 및 루벤스와 반 데이크를 비롯한 여러 바로크의 대가들에 의해 널리 모방되었다.

배경에 그려넣은 풍경으로 더욱 두드러지는 티치아노 작품의 시적인 매력은 〈성녀 카타리나 및 토끼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with St. Catherine and a Rabbit〉·〈세례자 요한과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경배를 받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with SS. John the Baptist and Catherine of Alexandria〉(1530경)에서 계속 엿볼 수 있다.

비극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첫번째 걸작인 〈예수의 매장〉에서는 황혼녘의 풍경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예수의 죽음과 제자들의 절망이 생생하고도 뛰어나게 표현되어 있다. 대작인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바치는 성모 Presentation of the Virgin in the Temple〉의 배경에는 부분적으로 당대의 건축가들인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와 야코포 산소비노의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들을 그려넣어 르네상스기 베네치아 사회의 광영을 반영하고 있다.

또 그 화려한 표현은 베네치아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에 속한다. 수직·수평 구도에 역점을 둔 작품의 구성은 그 나름대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해석한 결과이다.

초상화

티치아노는 1530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즉위할 때 볼로냐로 불려갔다.

이로써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531년 계속 명성을 날리며 카사 그란데로 알려진 베네치아궁으로 이주했다. 1532~33년 겨울에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2번째 회합을 한 뒤 다시 볼로냐로 돌아가 카를 5세의 초상을 그렸다. 〈갑옷을 입은 카를 5세 Charles Ⅴ in Armour〉(1530)와 1533년 1월에 그린 또다른 초상화는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비교적 덜 중요한 작품인 〈사냥개를 데리고 있는 카를 5세 Charles Ⅴ with Hound〉(1532~33)만이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를 5세는 그의 작품에 너무 흡족한 나머지 1533년 5월 티치아노에게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家)는 티치아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주요한 귀족들을 그린 1520, 1530년대의 다른 초상화들 중 뛰어난 작품인 〈바스토의 후작 알폰소 다발로스 Alfonso d'Avalos, Marques del Vasto〉(1533)에는 후작이 시종 아이를 거느리고 금으로 장식된 눈부신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티치아노는 초상화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내주는 보조 인물을 곧잘 그려넣었다. 〈우르비노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공(公) Francesco Maria della Rovere, duke of Urbino〉(1536~38)은 보조 인물 없이 갑옷과 손에 든 지휘봉 및 배경의 3가지 다른 것들로 대공의 군사적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인물을 이상화시켜 그린 공식 초상화들이다. 〈총독 안드레아 그리티 Doge Andrea Gritti〉는 커다란 화폭에 인물을 거대한 규모로 묘사해놓아 베네치아의 통치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후기 작품들에서도 캔버스가 꽉 차도록 인물을 그려 인물의 지위를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가령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 Portrait of Pietro Aretino〉에서는 인물의 당당한 체구가 돋보인다. 그러나 〈영국인 청년 The Young Englishman〉에서는 인물 주변에 좀더 많은 공간을 남겨 교양을 지닌 인물의 우아한 성격과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티치아노의 말기

초상화

티치아노는 말년에도 계속 수많은 초상화 걸작들을 남겼다.

교황 바오로 3세와 그의 손자인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카를 5세에 맞서 티치아노를 후원하는 데 열을 올렸다. 티치아노는 교황의 요청으로 1543년 5월에 볼로냐로 가서 〈모자를 쓰지 않은 교황 바오로 3세 Pope Paul Ⅲ Without Cap〉를 그렸다. 이것은 교황의 공식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정치적 수완가의 개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1545~46년 티치아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바티칸 궁의 벨베데레 궁전에 머물렀다.

이때 파르네세가와 또다시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처음으로 고대 로마의 유물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걸작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당시 이미 티치아노는 명성을 날리며 성숙한 화풍을 구사하던 터라 로마의 미술과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여 받아들이긴 했으나 거기서 받은 영향은 비교적 미약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그린 파르네세가의 초상화는 극소수만이 남아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오로 3세와 그의 손자들, 오타비오 파르네세와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Paul Ⅲ and His Grandsons Ottavio and Cardinal Alessandro Farnese〉(1546,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이다.

가족 초상화인 이 작품은 인물들의 심리 통찰이 특히 뛰어나다. 78세의 노쇠한 교황은 의자에 앉아 오타비오 파르네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고 오타비오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자세로 교황을 향해 몸을 구부린 약삭빠른 모사가의 모습이다. 반면에 추기경은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어 한결 돋보인다. 바오로 3세는 틀림없이 이 그림이 파르네세가의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므로 이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파르네세가의 가족 초상화와 함께 티치아노의 대표적인 초상화 걸작인 〈벤드라민 가족 The Vendramin Family〉은 파르네세 가족 초상화와 상황이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집안의 두 어른이 8세에서 20세에 이르는 7명의 아들들을 동반하고 성십자가의 성유골함을 경배하며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작품은 엄숙한 느낌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서를 자아내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탁월한 기법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1546년 6월 티치아노는 로마를 떠났고 이로써 파르네세가와의 인연도 끊어졌다. 그는 다시 합스부르크가에 자신의 운명을 걸 결심을 하고 1548년 1월 카를 5세의 궁전으로 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아우크스부르크까지 힘든 여행을 감내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인 말을 탄 황제의 초상화인 〈뮐베르크의 황제 카를 5세 Emperor Charles Ⅴ at Mühlberg〉를 그렸다.

이것은 1547년에 황제가 신교도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우 탁월한 이 공식 초상화에서 티치아노는 홀쭉하게 여위어 보기 흉한 황제의 턱을 되도록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고 위엄이 넘치는 자태로 그를 묘사했다. 하이라이트와 반사광의 적절한 표현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멋진 갑옷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붉은 장식대(가톨릭 교단과 신성 로마 제국의 상징), 그리고 배경에 그린 빼어난 황혼 풍경 등을 볼 때,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걸작 중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

1548년 12월 카를 5세는 티치아노에게 밀라노로 가서 스페인을 처음으로 떠나 여행중이던 펠리페 왕자의 초상화를 그려 오도록 명했다. 1550년 가을에 카를 5세는 또다시 티치아노에게 아우크스부르크로 가서 1551년 5월까지 머물 것을 명했다. 이때 그는 훌륭한 공식 초상화들 중 하나인 〈펠리페 2세 Philip Ⅱ〉를 전신상으로 그렸다. 색채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역작인 이 초상화에서는 이제 겨우 23세된 왕자의 오만하고 시큰둥한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종교화

티치아노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 Christ Before Pilate〉에서도 이전처럼 그림의 초점이 왼편의 예수에게로 쏠리게 했다.

하지만 구성은 티치아노의 미술 발전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며 빽빽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과 왼편의 비스듬한 계단과 벽, 그리고 전반적으로 극적 효과를 내는 표현 등에서 16세기 중반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예고하고 있다. 1545~46년 티치아노가 로마를 방문한 뒤에 그린 종교화들은 고대 미술과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그 예로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 Christ Crowned with Thorns〉에서는 인물들을 건장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주제를 격렬하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티치아노의 말년

베네치아에서의 말년

1551년 티치아노는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여름에 간간이 고향인 피에베디카도레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마지막 25년 동안 그는 이전에 못지않은 창조적인 착상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초상화

그가 가장 말년에 그린 가장 극적인 초상화로는 〈야코포 스트라다 Jacopo Strada〉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총명한 골동품 연구가이자 작가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모델은 관람객에서 프락시텔레스의 〈아프로디테 Aphrodite〉를 본뜬 로마 시대의 모사품인 작은 조상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이 초상화의 새로운 구도는 놀랄 만큼 폭넓고 다양한 티치아노의 창의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며 생생한 자태, 인간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및 아름다운 화면 구사 또한 빼어나다. 티치아노의 〈자화상 Self-Portrait〉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역작인데, 그는 기사들이 입는 황금사슬 갑옷을 걸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가장 뛰어난 말년작으로는 〈세 인물 Triple Portrait Mask〉(또는 〈신중함의 우의 Allegory of Prudence〉)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흰 수염 난 티치아노는 노년을 상징하며 그의 아들인 오라치오는 장년을, 마르코 베첼리오인 듯한 인물은 청년을 상징한다.

종교화

카를 5세의 개인 예배용으로 그린 〈성삼위일체 Trinity〉(또는 〈하늘의 영광 La Gloria〉)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르네상스 미술에서 받은 영향이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에서보다 덜 나타난다.

선명한 색채의 다채로움이 두드러지는 이 그림에서 카를 5세와 그의 가족은 하느님의 선민들 가운데 서 있다. 〈성 라우렌시우스의 순교 Martyrdom of St. Lawrence〉는 17세기에 절정에 달한 바로크 양식의 구성을 통해 한층 더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전경의 중심 장면에 극적인 힘이 주어져 있으나 불꽃이 높이 치솟고 신비스런 빛을 발하는 밤의 장면은 초자연적인 힘을 암시한다. 그는 말년에 그린 종교화들에서 인물들을 어스름한 빛으로 가려놓아 정신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가라앉은 색조가 지배적인 말년의 〈예수의 매장〉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적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잘 나타나 있다. 말년에 또 그린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는 근본적으로 이전 것과 똑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으나 색조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작은 색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달려 들어오고 한 무리의 천사들이 성모 주위를 맴돌고 있는 〈수태고지 Annunciation〉에서는 모든 것이 초자연적이다. 〈피에타 Pietà〉는 티치아노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위해 그리기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인 채로 남겨져 훗날 팔마 일 조바네가 완성했다. 여기에는 티치아노와 그의 아들 오라치오가 기증자로 오른편의 작은 장식 널빤지 위에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모세상과 헬레스폰트의 무녀상이 각각 놓여 있는 거대한 벽감이 작품의 웅장함을 더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대각선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가라앉은 색채는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슬픔을 부각시키며 무엇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심오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Venus and Cupid with an Organist〉·〈비너스와 류트 연주자 Venus and the Lute Player〉는 이전에 그린 같은 주제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변형시켜 그린 작품들이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Venus with a Mirror〉(워싱턴 국립미술관)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티치아노는 처음으로 비너스를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보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녀는 종래의 모습보다 좀더 당당해 보이며 두상은 고대 조각과 다소 흡사하다.

또 우아한 피부색은 모피 장식을 단 자줏빛 벨벳 망토로 더욱 돋보인다.

1554~62년 티치아노는 카를 5세의 아들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를 위해 신화를 주제로 일련의 중요한 그림들을 그렸다. 국왕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쌍을 이루는 그림들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림의 내용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중 첫번째로 그려진 한 쌍의 그림은 〈다나에와 유모〉·〈비너스와 아도니스〉(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다.

거대한 누드의 다나에는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하여 덮치자 소파에 누워 두 무릎을 세우고 있고, 유모는 우스꽝스럽게도 앞치마에 금화들을 담으려 하고 있다. 티치아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육감적인 이 작품은 색채 구사와 기교가 매우 뛰어나고 절세 미인을 그려내는 솜씨와 상상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는 아도니스가 입고 있는 새빨간 옷과 비너스가 받치고 있는 빨간 벨벳 쿠션이 피부색이나 황혼녘의 풍경과 대조되어 두드러진다.

티치아노의 편지를 보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Perseus and Andromeda〉는 〈메데이아와 이아손 Medea and Jason〉(이 그림은 몇 가지 이유로 그리지 못했음)의 짝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한다. 왼편의 바위에 묶여 있는 안드로메다는 페르세우스가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자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힘찬 그녀의 몸매는 미켈란젤로에게서 받은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나 좀더 여성적이고 우아하다.

〈유로파의 겁탈 The Rape of Europa〉은 티치아노가 스스로 '시'(詩)라고 한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명랑한 것으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놀란 유로파는 꽃 장식을 단 흰 황소로 변한 제우스의 등에 실려가며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있고 하늘에서는 큐피드들이 이 즐거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티치아노가 선호한 사선 구도가 매우 효과적으로 적용되어 있어 운동감이 실감나게 전해지며, 넓게 펼쳐진 바다 풍경과 거대한 해변이 잘 살아나 있다. 특히 푸른빛과 저녁놀의 붉은빛으로 물든 희미한 원경과 광활한 진줏빛 바다는 티치아노가 발휘한 마법과도 같은 솜씨의 극치를 보여준다.

다행히도 〈유로파의 겁탈〉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나, 티치아노가 '시'라고 한 또다른 대작들인 〈디아나와 칼리스토 Diana and Callisto〉·〈디아나와 악타이온 Diana and Actaeon〉은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주제에 어울리는 여러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무리의 벌거벗은 여성상들은, 오비디우스가 그의 〈변형담 Metamorphoses〉의 제2·3권에서 다룬 디아나 전설 가운데 2가지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우연히 여신들이 님프들과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된 젊고 건장한 사냥꾼 악타이온을 그린 〈디아나와 악타이온〉은 다소 복잡한 구도로 다시금 바로크 양식을 예고하고 있다. 〈디아나와 칼리스토〉는 순결의 맹세를 깨뜨린 님프 칼리스토가 임신한 사실을 여신이 알아차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신의 위로 보이는 무성한 황금빛 나뭇잎들은 그녀의 신성함과 관련된 정절을 상징하는 배경막에 해당되며 은빛 구름이 떠 있는 눈부신 암청색 하늘과 초록색 나뭇가지들은 다른 누드들의 배경 구실을 한다. 그림의 표면이 많이 손상되어 있지만 키가 크고 당당한 디아나의 모습은 근사하다. 매순간과 모든 몸짓에 섬세함이 배어 있다.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 중 마지막 작품은 〈타르크빈과 루크레티아 Tarquin and Lucretia〉이다.

매우 힘차고 극적인 이 작품은 이 노화가가 결코 창조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여기서도 역시 풍부한 색채가 작품의 주제만큼 중요하다. 초록색 커튼과 흰색 시트와는 대조적으로 타르크빈이 입은 옷의 선명한 색깔이 두드러진다.

베네치아에 전염병이 돌 무렵이던 1576년 8월 27일 티치아노는 노령으로 죽었다. 그는 산타마리아데이프라리 교회에 묻혔다. 그곳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2점이 있다. 티치아노는 종교화뿐만 아니라 초상화로도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작품이 성숙해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구상을 끌어냈다.

또한 오비디우스·카투루스·테오크리투스 같은 고대 시인들에게 영감을 얻어 그리스·로마 신화를 불후의 걸작들로 재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