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벽화

다른 표기 언어 mural , 壁畵

요약 벽화는 건축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회화예술의 다른 양식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색·구도·주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건축물의 공간적 균형감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벽화는 주어진 공간을 수정하고 동시에 그 공간에 실제로 한몫 끼는 3차원적인 유일한 회화 양식이다. 벽화의 또다른 특징은 공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벽화 화가는 벽에 표현하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적절한 크기로 사회적·종교적 또는 애국적인 주제를 회화적으로 고안해내야 한다. 벽화는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시기에 많이 그려졌으며, 바로크 양식이 풍미하던 17세기에 크게 발전했다. 20세기 들어 파리의 입체파와 야수파 화가들이 추상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양식으로 제작했고, 멕시코에서는 혁명운동에서 기인한 양식이 발전했다.

불에 구운 타일 위에 그린 그림도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 모자이크 기법은 그것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요소로 사용되지 않는 한, 벽화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벽화는 건축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회화예술의 다른 양식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색·구도·주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건축물의 공간적 균형감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벽화는 주어진 공간을 수정함과 동시에 그 공간에 실제로 한몫 끼는 3차원적인 유일한 회화 양식이다.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가 건축 형태의 유기성을 크게 고려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벽화를 통해 벽 아닌 다른 공간이 실재하는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주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뒤 바로크의 대가들은 벽이나 천장이 거의 없는 듯이 느껴질 정도로 근본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건축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 다음으로 벽화의 2번째 특징은 그것이 폭넓게 공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벽화 화가는 벽의 구조적 상태 및 거기에 표현하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적절한 크기로 사회적·종교적 또는 애국적인 주제를 회화적으로 고안해내야 한다.

벽화의 역사를 보면 예로부터 다양한 기법들, 즉 납화와 템페라, 프레스코, 도자기를 이용한 방법, 캔버스에 그린 유화를 이용한 방법 및 최근에는 액화규산염과 불에 구운 에나멜 도자기를 이용한 기법 등이 사용되어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납화가 가장 널리 쓰였는데, 뜨겁게 녹인 밀랍(또는 수지) 정착제에 안료를 넣고 개어 식기 전에 그림의 표면에 바르는 기법이었다. 템페라도 일찍부터 사용되었는데, 달걀노른자나 물로 희석시킨 흰자위와 같은 단백질 성분의 재료가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가 벽화에 널리 사용되었다. 벽화를 작업실에서 완성한 다음 운반하여 벽에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편리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유화는 벽화에 가장 적절하지 못한 재료이다. 그것은 색의 광채나 표면의 질감이 모두 떨어지며, 대부분의 색이 접착제로 인해 노랗게 변하고 온도나 습도에 영향을 받으며, 캔버스 표면이 급속히 상하기 쉽다.

벽화는 로마 시대에 현저히 증가했다.

폼페이와 오스티아에서 공공 및 개인 건물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벽과 천장에 풍경과 정물 및 상징적인 장면들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창조적인 벽화들을 그려넣었다. 그러나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미술가와 후원자들이 벽화 제작에 열의를 쏟았다. 끊임없는 창조와 탐구정신, 후원자들의 풍부한 지원,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태도 등이 두드러지게 보여진 시기였다. 이 시기의 양식은 대체로 초기 르네상스(15세기)와 성기 르네상스(1500~30), 후기 르네상스 또는 마니에리스모(1530~80경) 양식으로 나누어진다.

주로 각 지역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는 가문이나 개인들 사이의 경쟁이 활발한 도시들이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로마, 르네상스 미술). 그중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는 독특한 형태의 표현이 크게 강조되면서 전개되었다. 그 초기에 마사초는 엄청나게 큰 인물화에 몰두했는데, 특히 극적 통일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스처와 명암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다듬은 형태를 3차원의 공간에 밀집시켜 그렸다.

그뒤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멜로초 다 포를리 등의 미술가들이 이 기법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산브리치오 예배당에 있는 루카 시뇨렐리의 웅장한 프레스코를 보면, 효과와 명료성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해부학과 훌륭한 골격의 인체 소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세기에 등장한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미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육체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Flesh)
육체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Flesh)

르네상스 벽화의 2번째 전통은 프라 안젤리코의 단순하고 신비주의적인 표현(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에서 뚜렷이 보이는, 일종의 보수적인 고딕 양식이다.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3번째 전통은 프라 필리포 리피(프라토 대성당)와 베노초 고촐리(피렌체 메디치 궁 예배당)의 프레스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낭만적 사실주의이다. 이 두 전통은 마사초의 회화에 나타난 새로운 문제를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자연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은 15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레스코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양식으로 통합되었다.

성기 르네상스에는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활동했는데, 그들의 장대한 계획들은 미완성으로 남거나 그들의 제자들이 완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풍부하고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2점의 가장 중요한 벽화인 피렌체의 베키오 궁에 있는 〈앙기아리 전투〉(원본은 없어졌지만 부분적인 모사품들을 통해 알려짐)와 유명한 〈최후의 만찬〉(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에 보이는 인물들의 극적인 움직임과 내용의 긴장된 심리적 해석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철저히 과학적이었던 레오나르도에 비해 격정적이며 신앙심이 깊었던 미켈란젤로는 오직 인물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피렌체의 베키오 궁에 그린 첫번째 벽화 〈카시나 전투 Battle of Cascina〉(원본은 없어졌지만 소묘와 판화들을 통해 알려짐)의 전체적 구도는 인물의 극적 움직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한 방대한 벽화는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인물에 더 큰 주의를 쏟았으며, 같은 방의 끝 벽에 이보다 늦게 그린 〈최후의 심판〉은 매우 극적으로 대담하고 강렬하며, 큼직하게 그려진 인물 형체들의 공간에서의 움직임에 더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전(前)세기에 실험한, 형태적·공간적·장식적 통일에 관한 모든 문제들의 가장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이것은 바티칸 박물관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에 그린 〈성찬에 관한 논쟁 Disputation on the Holy Sacrament〉과 〈아테네 학당 School of Athens〉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방에 그려진 벽화들은 동작에 대한 화가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레조는 최성기 르네상스의 마지막 벽화가이다. 파르마 대성당 및 산조반니에반젤리스타 교회에 있는 그의 프레스코들은 당시의 미술이 새로운 마니에리스모 양식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크 양식이 풍미하던 17세기에 벽화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2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반(反)종교개혁, 특히 예수회를 통해 일어난 엄청난 건축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 전역에 걸쳐 귀족지배층의 왕궁과 저택이 사회와 문화생활의 중심지로서 중요하게 부각된 점이다. 바로크 양식의 뿌리는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새로 생겨난 아카데미(예를 들면 이탈리아 볼로냐의 카라치 아카데미와 1648년 설립된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특히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것은 안니발레 카라치가 로마의 파르네세 궁에 그린 설화적인 장식 벽화에서 시작되었으며, 단축법에 의해 표현된 인물들의 극적인 제스처와 원근법에 의한 표현이 건축물과 전체적으로 통합된 조화를 이루어, 실재적인 공간을 구축한 도메니키노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안드레아 포초 등의 더욱 정교한 프레스코로 발전했다. 장식미술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가장 중요한 바로크 미술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로서, 안트웨르펜에 있는 태피스트리와 역사화들(뤽상부르 궁전에 있었던 마리 드 메디치의 연작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음)은 그의 다방면에 걸친 창조적 재능과 국제적 평판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의 유럽에서는 양식이나 기법이 더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에는 3단계에 걸쳐서 벽화 장식이 다시 활발하게 나타났다. 첫번째는 파리의 입체파와 야수파 화가들의 실험적인 이젤화에서 출발한 파블로 피카소(파리의 유네스코 건물 벽화), 앙리 마티스(프랑스 방스에 있는 예배당 장식), 페르낭 레제,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파리 오페라 극장과 뉴욕 시에 있는 링컨 센터의 장식들) 등이 그린 거대한 벽화들로 더욱 추상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양식이다. 2번째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루피노 타마요 등이 그린 일련의 유명한 프레스코들에서 볼 수 있는, 멕시코의 혁명운동으로부터 기인된 양식이다.

그뒤 건축에서 설계와 구조에 관한 20세기의 개념들이 잇따라 받아들여지면서 새롭게 모자이크를 대규모로 사용하는 것이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예를 들면 멕시코의 국립자치대학). 3번째 단계로는 1930년대에 미국 연방정부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나 단명한 미국의 벽화 운동이었다. 미국 전역의 공공건물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표현 양식도 허용되자 벽화 장식이 회화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벤 샨, 보드먼 로빈슨, 토머스 하트 벤턴, 레지놀드 마시, 존 스튜어트 커리 등의 벽화가 여기에 속한다. 한국 벽화에 대해서는 '고분벽화'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