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 안젤리코

프라 안젤리코

다른 표기 언어 안젤리코 , Fra Angelico 동의어 귀도 디 피에트로, Guido di Pietro, 베아토 안젤리코, Beato Angelico
요약 테이블
출생 1387년~경, 피렌체 공화국 비키오
사망 1455년 2월 18일,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수도사로 주요 작품은 <성모의 대관식>과 <수태고지>. 대부분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에 사는 동안 산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벽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양식을 따라 평온한 종교적 자세를 구체화하고 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생애를 마칠 무렵인 1450년경 역시 피렌체에 있는 산안눈치아타 교회의 지성소에 비치된 은궤의 문들에 35점으로 이루어진 일군의 그림을 그렸다. 안젤리코의 그림은 그의 제자뿐 아니라 프라 필리포 리피와 같은 대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목차

접기
  1. 산도메니코 수도원 시기
  2. 산마르코 수도원 시기
  3. 로마 시기
  4. 평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산도메니코 수도원 시기

그의 세례명은 구이도 디 피에트로이며, 1417년까지 이 이름으로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해에 후기 고딕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세밀화가 바티스타 산구이니와 사귀었고 산구이니는 후에 그의 조수가 되었다. 1420~22년의 어느 시기에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가 되어 피에솔레의 산도메니코 수도원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프라 조반니 다 피에솔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피에솔레에서 그는 도미니쿠스회 가운데 개혁파 수사들의 호전적 지도자 조반니 도미니치의 교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도미니치의 글들은 인문주의의 맹공격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영성(靈性)을 옹호했다.

안젤리코는 동료 수사인 성 안토니누스 피에로치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안젤리코가 피렌체의 대주교직을 거절하자 대신 대주교가 된 사람으로, 안젤리코의 믿음을 돈독히 하고 그의 그림들에 착상을 불어넣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젤리코는 고딕 양식의 가장 뛰어난 화가이자 세밀화가인 로렌초 모나코에게 미술을 배운 듯하다.

안젤리코의 그림에서 인물을 숭고하게 보이게 하는 생생한 광휘와 분명하고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솜씨가 그의 영향을 말해준다. 이러한 특징들은 피렌체의 산마르코(또는 안젤리코) 박물관에 있는 2점의 작은 제단화 〈별의 성모 Madonna of the Star〉·〈수태고지 The Annunciation〉에 뚜렷이 나타난다.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안젤리코가 피렌체의 산타트리니타 교회를 위해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position〉는 로렌초 모나코가 1425년 죽기 전에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한때 그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모나코는 이 작품을 3부작으로 나누어 가운데 부분을 그렸다. 그러나 안젤리코는 그것을 언덕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마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풍경이 있는 제단화로 통합시켰다. 그것은 아마 프라 안젤리코가 한때 살았고 그의 중요한 작품들이 발견된 코르토나를 생각나게 한다. 풍경을 배경으로 윤곽이 뚜렷한 인물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연결되어 있으며, 얼굴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초상화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인물의 배치는 그가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인 형식주의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피에솔레에서 안젤리코는 경건한 수사이자 화가로서 계속 활동했다. 바사리는 그를 '신앙심이 깊고 뛰어난' 인물로 평했으며, 그의 고결한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안젤리코('천사 같은'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뒤 그는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종종 베아토('축복받은'이라는 뜻)라는 말이 그 앞에 붙기도 한다. 안젤리코는 수도원에서 기도에만 열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대의 새로운 미술 경향들, 그중에서도 특히 원근법을 이용한 공간 묘사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열심히 따랐다. 예를 들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대작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성모의 대관식 The Coronation of the Virgin〉에서 뒤쪽으로 멀어져가는 인물들은 당대의 뛰어난 피렌체파 화가 마사초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공간감각을 일으킨다.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그의 가장 초기 작품은 린넨 상인 길드(아르테 데이 리나이우올리, 여기에서 〈리나이우올리 제단화〉라는 작품명이 나왔음)를 위해 그린 거대한 3폭 제단화로, 1433년 7월 1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 그림은 피렌체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설계한 대리석 성골함 안에 들어 있는데, 앞쪽을 향하고 있는 성모와 예수를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별의 성모〉의 주제를 발전시켜 침울한 기분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매력적인 천사들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14세기 피렌체파의 마에스타(엄숙한 모습을 띠고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 그림)와 비슷하지만, 형식주의 구성에서 마사초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2개의 접는 덧문 위에 그려진 다소 형태가 뒤틀린 4명의 성자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안젤리코는 프레델라, 즉 아랫부분의 좁은 그림띠로 이 작품을 끝마무리 했다. 그 그림띠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Magi〉·〈성 마르코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 Mark〉가 그려져 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Magi)
동방박사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Magi)

이 그림들은 내용이 쉽고 간결하며 원근법을 엄격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기법은 세례 요한의 명명식을 그린 작은 그림에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나타나 있다.

1436년에 안젤리코는 산타마리아델라크로체알템피오 교회의 수사회로부터 제단화를 의뢰받고 그해 12월경 완성했다. 고요한 분위기의 〈비탄 Lamentation〉에서 그는 조용히 묵상에 잠겨 있는 인물들이 죽은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14세기의 대가 조토가 그린 유명한 그림(우피치 미술관 소장)에서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인물들을 좀더 복잡하게 배치하기 위하여 주제를 발전시켜서 하늘이 무겁게 걸려 있고 예루살렘의 긴 벽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우울한 풍경 속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끊임없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설에 나오는 성스러운 인물들과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1430년대에 안젤리코는 피렌체 르네상스기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의 하나로 〈수태고지〉(코르토나 디오체사노 박물관)를 그렸다.

이 제단화는 같은 주제를 그린 다른 두 그림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 그림은 천사가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냈지만 그들이 여전히 하느님의 빛나는 사자(使者)와 순결한 처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사자와 처녀는 르네상스 양식의 주랑(柱廊)에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프레델라는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들, 특히 사실적인 파노라마로 된 '방문'에 관한 이야기 등의 여러 장면으로 훌륭하게 나누어져 있다.

그는 세밀화 기법을 사용할 때에도 언제나 실체를 엄밀하게 모방했다. 때때로 그는 작품을 의뢰한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배경에 금도금을 하는 것과 같이 중세의 기법들을 사용했지만, 인물들은 계속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뚜렷하게 그렸으며 점점 확고하고 조화로운 회화 양식을 띠었다. 역시 1430년대에 그린 〈안날레나 제단화 Annalena Altarpiece〉는 르네상스기에 제작된 최초의 '사크라 콘베르사초네('성스러운 대화')로 알려져 있다.

산마르코 수도원 시기

안젤리코는 1439년까지 피에솔레 수도원에 있다가 그해에 피렌체에 있는 산마르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가 만든 벽화의 대부분을 그렸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1436년에 실베스테르회 수사들에서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에게로 이전되었으며, 1438년경 피렌체의 건축가·조각가인 미켈로초의 설계를 기초로 교회와 널찍한 수도원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메디치가(家)가 이 건축사업에 풍부한 지원을 했다. 1438년경 대(大)코시모 데 메디치가 안젤리코에게 이 수도원의 제단화를 맡기자 또 하나의 '사크라 콘베르사초네'를 그렸다.

1443년 구세주의 공현축일(公現祝日)에 교회를 헌당할 때 틀림없이 이 제단화가 예배당에서 주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안젤리코는 동정녀와 아기예수를 한가운데 성좌에 높이 배치하고 양쪽의 멀어져가는 빈 공간에 성인들을 그렸다. 그 성인들 가운데는 메디치가의 두 수호성인 코스마스와 다미아누스가 있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제작된 그의 가장 뛰어난 그림들 중 하나로 짙으면서도 단조로운 하늘을 배경으로 사이프러스·야자나무·소나무 등의 울창한 숲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 인물들은 어떤 세속적인 감정도 없이 가장 평온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피에타(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를 중심으로 양쪽에 메디치가의 두 수호성인에 관한 8개의 전설을 보여주고 있는 프레델라와 함께 이 작품은 완성되었다. 불행히도 이 그림들은 현재 여러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 이 작품의 모든 장면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전 작품보다 더 체계적이고 간결하며, 나중에 벽화에서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에 있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벽들에는 안젤리코가 절정기에 그린 그림들이 있다.

그는 참사회 회의장에, 지상의 덧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을 강조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Crucifixion〉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14세기의 〈교훈 Moralities〉과 비슷해 보인다. 그는 이 그림에 하늘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세 인물 외에도 메디치가의 두 수호성인, 순교자, 수도회의 창시자, 은둔자, 도미니쿠스회의 수호자(그들의 가계도가 이 인상적인 장면의 바로 밑에 그려져 있음)들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함께 제례를 올리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율동적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그리하여 안젤리코는 이 작품을 통해 이전의 제단화들에서 어렴풋이 암시했던 포괄적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안젤리코는 이 수도원의 첫번째 회랑과 작은 방들에 그린 많은 그림에서 메시아를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회랑에는 일찍이 코르토나에서 그린 것을 확대한 〈수태고지〉 그림과 그 위에 찬란한 빛을 받고 있는 '사크라 콘베르사초네'를 그렸다. 독방들에는 모두 수도원생활과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졌는데 20점이 넘는 작품들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독실한 믿음을 강조했다.

이 좁은 공간에 있는 그림들은 제작자가 분명치 않은데, 아마 안젤리코의 가장 초기의 협력자 바티스타 산구이니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제자 베노초 고촐리와 세밀화가로 더 잘 알려진 또다른 제자 차노비 스트로치 등 그가 가르친 많은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안젤리코의 작품은 동쪽에 있는 처음 10개의 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3개의 주제가 특히 눈에 띄는데, 그리스도의 부활, 동정녀의 대관식, 온화한 분위기의 성수태 고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주제는 수수한 흰 회랑에 그린 것으로, 순교자 사도 베드로가 겁먹은 얼굴로 동정녀와 천사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입고 있는 제의는 동정녀와 천사의 은은한 분홍색조의 의상과 대조를 이룬다. 이런 독방들은 화가 겸 수사인 안젤리코가 동료 수사들의 묵상과 기도를 돕기 위하여 순결한 인물들을 그릴 때 느낀 은밀한 기쁨을 전해준다. 이 그림들에는 그들의 원장이기도 한 화가의 서정적 표현이 들어 있다.

로마 시기

1445년말에 안젤리코는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의 부름으로 로마에 가서 1450년 무렵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는 1447년 여름에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산브리치오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을 맡았다. 조수들 중에서도 특히 고촐리는 이 예배당에 인물로 가득찬 2폭의 그림을 그와 함께 열심히 그렸다. 여러 계급의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심판자 그리스도와 예언자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을 다룬 이 그림들은 일부는 안젤리코가 그렸으며, 그뒤 50여 년이 지나 루카 시뇨렐리가 완성했다.

로마에서 안젤리코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예배당(1446경~47)과 바티칸 궁전의 성사(聖事) 예배당(1447 이후) 및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방(1449)에 그린 프레스코들은 모두 파손되었다.

그러나 바티칸 궁전에는 그가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을 위해 그린 장식화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에는 4복음서의 저자들과 성인들의 인물화 및 성 스테파누스와 성 로렌티우스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이 묘사되었고, 산마르코 수도원의 제단화에 들어 있는 프레델라의 일부가 반복되었다.

성 스테파누스와 성 로렌티우스의 봉헌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둘 다 장엄한 대성당 내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성 로렌티우스의 시혜 장면은 신전을 배경으로 걸려 있다. 특히 이 장면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고 그들을 계몽하고 있는 부제(副祭)의 성인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빛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제단화들에 나오는 축복받은 인물들과 동등하게 묘사했다. 동시에 이 작품들의 구성과 건축물의 묘사는 그가 르네상스 미술가로서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안젤리코는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가 수사 신분으로 피에솔레에 있는 산도메니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1450~52년 6월경).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렌체에 있는 산안눈치아타 교회의 지성소에 모셔진 은궤의 문에 그린 그림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과 그밖의 주제들을 다룬 35점의 그림군(群)이다.

지금까지 여러 군데가 보수된 이 작품들은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에 있었던 파괴된 그림들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의 진위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어린아이 대학살 Massacre of the Innocents〉·〈이집트로의 피신 Flight into Egypt〉·〈그리스도의 봉헌 Presentation in the Temple〉은 배경과 풍경의 공간성뿐만 아니라 밝고 자연스럽고 가냘픈 인물들을 볼 때 안젤리코의 작품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벽화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에서 나왔다. 한편 대부분의 이 작은 그림들에는 일종의 단속성과 지루함이 보이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솜씨가 안젤리코 특유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적 감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준다. 안젤리코가 무젤로의 보스코아이프라티 수도원에 그린 후기 제단화(피렌체 산마르코 박물관)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 웅장한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 제단화와 그밖에 몇몇 소품들이 완성된 뒤 프라 안젤리코의 풍부한 미술활동은 끝을 맺었다.

1453년 또는 그 다음해에 안젤리코는 다시 로마에 갔으며, 처음 로마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에서 죽었다. 그의 무덤은 이 수도원에서 가까운 산타마리아델라미네르바 교회에 남아 있으며 지금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평가

안젤리코는 그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피렌체에서 1440~50년에 프라 필리포 리피와 같은 기성 대가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사로서 15세기 이후의 여러 저술에서 칭송을 받았으며, 그중 일부는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했다. 화가로서 그는 일찍이 1438년에 당대의 화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에게 찬사를 받았다. 바사리는 그의 저서 〈미술가 열전 Lives of the Most Eminent Italian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에서 안젤리코의 일대기를 약간 틀리게 기록했지만 그를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로 규정한 점에서는 옳았다.

안젤리코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18세기말에 신고전주의 저술가들이 철학적·교훈적 관점서, 그를 시대에 뒤떨어지는 미술가로 평가하여 과도기 미술가로 단정할 때까지 바사리의 평가가 안젤리코의 예술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대개 현대 미술 비평가들은 그를 다시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안젤리코는 고전적인 양식으로 깊은 종교적 자세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