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1세

빌헬름 1세

다른 표기 언어 Wilhelm I 동의어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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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7. 3. 22, 베를린
사망 1888. 3. 9,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성실한 마음과 자제력으로 유력한 정치가들의 협조를 얻어 프로이센과 호엔촐레른 왕가를 독일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1858년 10월부터 병든 형을 대신해 섭정을 하다가 1861년 1월 2일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했다. 섭정시절에는 자유주의의 '새 시대'를 선언해 인기를 모았으나 내각을 임명할 때는 온건 자유주의자뿐 아니라 단호한 보수주의자들까지 망라했다. 국내문제에서는 자신의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향을 다시 드러냈다. 후에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 창설계획을 받아들여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빌헬름 1세(Wilhelm I)
빌헬름 1세(Wilhelm I)

성실한 마음과 자제력으로 유력한 정치가들의 협조를 얻어 프로이센과 호엔촐레른 왕가를 독일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후에 프로이센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1세에 맞서 독일해방전쟁이 진행되던 1814년 바르쉬르오브 전투에 참여했으며, 그후 프로이센군과 군사업무에 헌신했다. 1840년 자녀가 없는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자 프로이센의 왕위 계승예정자가 되었다.

1848년 3월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보수적인 그는 무력사용을 주장해 '포도탄 공'(Kartäschenprinz)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848년의 혁명). 잠시 영국에 망명했다가 1848년 6월 프로이센으로 돌아와 1849년 바덴 봉기 진압군의 지휘를 맡았다.

1848년 혁명의 교훈과 새로 접한 영국의 정치사상, 배우자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그는 젊은시절 엘리자 라치빌과 연애에 빠졌다가 단념한 뒤 1829년 이 재기발랄하고 온화한 성품의 공주와 결혼했음)의 영향으로 입헌제도에 대한 불신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1849년 라인란트 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베를린의 반동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의 중심지인 코블렌츠에 관저를 마련했다. 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사상을 "국민학생의 정치학"이라며 꼬집었다.

1858년 10월부터 병든 형을 대신해 섭정을 하다가 1861년 1월 2일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했다. 섭정시절에는 자유주의의 '새 시대'를 선언해 인기를 모았으나 내각을 임명할 때는 온건 자유주의자뿐 아니라 단호한 보수주의자들까지 망라했다. 1859년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인해 프로이센이 부딪친 문제는 그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에 맞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옹호했으나 프로이센이 라인 강 전선의 최고 지휘권을 가져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뜻하지 않게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빌라프란카 휴전협정을 맺는 사태를 맞아야 했다.

국내문제에서는 자신의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향을 다시 드러냈다.

육군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과 군사내각 수반 에트빈 폰 만토이펠의 지지를 받아 3년간 복무징병제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적인 하원은 1862년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그는 퇴위하려 했으나 이 위기의 와중에 총리로 임명된 비스마르크가 그를 만류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7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비스마르크와 의견충돌이 잦았지만 프로이센에는 자신보다도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870년 호엔촐레른가(家)에서 스페인 왕위 후보자를 내세운 결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비스마르크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해 전쟁중 줄곧 자신의 최고 자문역인 비스마르크와 헬무트 폰 몰트케 사이를 중재했다.

비스마르크와 자유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이자 그는 매우 난처했으나 1877년 비스마르크가 최후통첩으로 사임하겠다는 청원을 했을 때 "절대로 안 된다"고 대답했다.

프로이센 군주정치의 전통에 젖어 있었던 그로서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 창설계획을 받아들여 독일 제후들이 제시한 허울뿐인 제안(비스마르크의 작품)에 따라 황제 호칭을 수락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1871년에 1월 18일 점령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독일 황제로 선포되었다(그 자신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더 적당한 호칭이라고 생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1878년에 그에 대한 2번의 암살기도(5월 11일 막스 회델의 기도와 6월 2일 심한 상처를 입힌 K. E. 노빌링의 기도)가 잇따르자, 대중들은 크게 분개해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 입법을 폭넓게 지지했다.

에리히 마르크스가 쓴 권위있는 전기 〈황제 빌헬름 1세 Kaiser Wilhelm I〉가 1897년 간행되었다(9판,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