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2세

빌헬름 2세

다른 표기 언어 Wilhelm II 동의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알베르트, Friedrich Wilhelm Victor Albert, 카이저
요약 테이블
출생 1859. 1. 27, 베를린 근처 포츠담
사망 1941. 6. 4, 네덜란드 도른
국적 독일

요약 빌헬름 1세 손자, 프리드리히 황태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2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외팔이로 선천적 기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신체장애 때문에 엄격하고 조급하며 결단력 없는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사임시킨 후 1900년 베른하르트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황제와 상층계급이 택한 정책을 제국의회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국민의 관심을 외교정책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빌헬름 2세는 재임 기간 중 영국과 대립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모든 협상의 기회를 외면, 수많은 정치가와 장군의 전쟁 확장 음모를 부추겼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한 그는 시골에서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다가 1941년 죽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성장과정
  3. 황제로서의 빌헬름
  4. 외교정책
  5.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역할
  6. 빌헬름 2세에 대한 평가
빌헬름 2세(Wilhelm II)
빌헬름 2세(Wilhelm II)

개요

호전적 행위와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유명하다.

성장과정

프리드리히 황태자(나중에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됨)와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장녀 빅토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빌헬름 2세(Wilhelm II)
빌헬름 2세(Wilhelm II)

왼팔이 선천적 기형(발육부진)이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신체장애에서 그의 행동의 단서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모였다. 아버지는 훌륭하고 지적이며 사려깊으나 통치에 필요한 의지나 정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에게서는 진지한 목적의식, 어머니에게서는 정서와 끈기를 배운 빅토리아는 좋고 싫음을 신속히 결정하고 지성보다는 감정이 훨씬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19세기 영국 자유주의자의 풍모를 강요하면서 영국신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의 교육방식은 오히려 빌헬름 스스로 프로이센 국민의 이상적 지배자 상(신념·용기·검약·정의·남자다움·자기희생·자기확신을 갖춘 인물)을 추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빴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양육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밴 자유주의적 가치와 생활습관에 대한 존경심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강인하고 무사다운 왕이 되는 일이 그에게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좇아야 할 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결국 그는 도가 지나치고 말았다. 그자신의 성향과 칼뱅주의자 교사에게서 배운 의무감은 서로 대립을 일으키며 번갈아 좌절을 맛보게 했다. 이러한 정신적 긴장상태와 더불어 신체장애 때문에 결국 엄격하고 조급하며 결단력없는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1881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단순하며 지적 관심이나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루하게 했고 그의 반동적 경향을 부채질했으나 그녀는 그에게 아들 6명과 딸 5명을 낳아주었으며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황제로서의 빌헬름

1888년 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90세의 나이로 죽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제위에 오를 무렵이었다.

빌헬름 1세(Wilhelm I)
빌헬름 1세(Wilhelm I)

프리드리히는 총리가 제국의회의 책임을 지도록 헌법을 개정하려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숙원이었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라이히슈타크).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황제로 즉위할 즈음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위기가 다가왔을 때도 부모에게 무관심했던 빌헬름은 2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1890년 3월 빌헬름은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사임시켰다.

비스마르크가 처음 총리가 되었을 때 여러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프로이센 상층계급으로 하여금 정치변동에 반대하도록 했고, 프랑스를 영원한 적으로 만들었다. 이제 75세의 노인이 된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주도한 독일 제국 창설과정에서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황제 스스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빌헬름이 비스마르크를 사임시킨 행동은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은 노동자계급을 위해 추진중이던 막연한 계획을 궁정의 반대에 부딪히자 취소했고, 비스마르크 후계자들에게 1887년의 러시아와의 재보장 협정을 갱신하는 데 반대할 여지를 주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피상적으로 볼 때는 정당화할 수도 있었으나, 이 결정은 1891년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뒤 4년 동안 총리를 맡은 카프리비 백작 레오는 제국의회(하원)와 지배계급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뒤를 이은 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 클로트비히 공(公) 역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빌헬름은 1897년 정중한 성품을 지닌 뷜로 후작 베른하르트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가 1900년에는 총리로 승진시켜 황제와 상층계급이 택한 정책을 제국의회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정치적 변화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며 오히려 국민의 관심을 외교정책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외교정책

1896년 빌헬름이 외무장관의 권고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크뤼에르에게 보낸 전문(電文) 때문에 이미 영국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이 전문에는 영국이 이끈 제임슨 부대의 습격을 격퇴시킨 공을 치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음)(→ 제임슨의 급습). 또 1897년과 1900년의 '독일 해군 법안'의 의도가 드러남으로써 영국의 분노는 비상사태로까지 발전했다.

황제는 독일이 영국의 해양지배권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으나 이것이 1897년 해군장관이 된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목표였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1904년 영국이 프랑스와 가장 어려운 쟁점을 해결했을 때 빌헬름 황제는 베른하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듬해 탕헤르에서 모로코 독립 지지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지위를 위협했다.

이를 통해 빌헬름은 영국이 프랑스 동맹국으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으나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독일이 모로코에서 프랑스 우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알헤시라스 회의(Algeciras Conference)
알헤시라스 회의(Algeciras Conference)

1908년 빌헬름은 영국을 방문한 뒤 〈데일리 텔레그래프 The Daily Telegraph〉지(誌)와 가진 재치없는 회견에서 독일 국민 대다수가 반영(反英)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독일 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빌헬름은 미리 베른하르트에게 회견 요지를 보냈지만, 이를 읽은 것 같지 않은 베른하르트는 제국의회에서 황제를 효과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공적 업무에서 빌헬름의 위신을 떨어뜨렸고, 베른하르트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낀 빌헬름은 그를 해임하고 새 총리에 베트만 홀베크를 임명했다. 베트만은 영국과 협상하려 했으나 영국은 독일이 함대수를 줄이지 않는 한 독일과 프랑스 전쟁에서 중립을 약속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협상에 실패했다(황제와 티르피츠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음). 프랑스의 모로코 침략에 독일이 개입함으로써 일어난 1911년 모로코(아가디르) 위기는 독일이 황제의 주도로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아가디르 사건).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역할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막으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어 독일에 의해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비타협노선을 권고했던 빌헬름 황제는 전쟁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놀랐지만 이미 장군들이 그의 준비 허락을 받고 내린 동원령을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전쟁 동안 명목상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그는 장군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평화협상의 기회를 외면하는 수많은 정치가와 장군의 전쟁확장 음모를 부추겼다. 1918년 가을 쯤 독일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때문에 제위에서 물러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퇴위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1월 9일 네덜란드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투옥과 죽음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독일의 군주제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시골에서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다가 1941년 죽었다.

빌헬름 2세에 대한 평가

빌헬름은 자신의 정책결정능력을 과신하는 편이었다. 사실상 1871년 독일 헌법은 그에게 중요한 2가지 권한을 부여했다. 그 하나는 민간정부의 수반인 총리의 임면권(任免權)이었다. 물론 총리는 제국의회에서 다수를 장악해야만 통치할 수 있었으나, 제국의회 대다수 의원이 황제가 임명하는 자를 지지하는 것이 신하된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제의 선택권은 실제로 제한받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독일 육군과 해군이 민간정부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직 황제만이 육군·해군의 정책이 관료와 외교관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감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전쟁 기간과 전쟁 직후에 황제를 '군통수권자' 또는 전쟁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묘사한 영국 언론인과 시사평론가의 관찰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를 전쟁 선동가이기보다는 공범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1890년 이후 독일의 중·상층 계급은 누가 제위에 앉든 세계에서 발언권이 커지기를 원했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 강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기존 열강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 황제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비판은 그가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여 독일인의 야망을 억제하려 하지 않고 특히 막강한 독일 해군을 양성하는 등 오히려 그 야망을 부추겼다는 점에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단호히 맞설 안목과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 이에 편승하는 약삭빠른 호인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