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

다른 표기 언어 Chlodwig Karl Viktor, Fürst zu Hohenlohe-Schillingsfürst
요약 테이블
출생 1819. 3. 31, 헤센나사우 로텐부르크안데어풀다
사망 1901. 7. 6, 스위스 장크트갈렌 바트라가츠
국적 독일

요약 독일 제국 및 프로이센의 총리(1894. 10~1900. 10).

빌헬름 2세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관계를 맺어 '클로드비히 아저씨'라는 별칭이 붙었으나 빌헬름 2세의 선동적이고 도를 지나친 행동을 막지 못했다. 바이에른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왕족 가문 출신인 그는 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 후작과 라티보르 및 코르베이 공(公)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 프로이센의 관리로 일하다가 바이에른 왕국의 상원의원이 되었고 1848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임시정부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가 프로이센에게 7주전쟁에서 패한 뒤인 1866년 12월,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추천으로 바이에른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북독일 연방 가입과 독일 관세동맹(Zollverein)의 갱신을 지지함으로써 바이에른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1870년 3월 실각했다.

1871년 바이에른의 독일 제국 편입을 촉진했던 그는 제국의회(Reichstag)의 부의장으로, 그리고 연방의회(Bundesrat)의 바이에른측 대표로 일했다. 문화투쟁(Kulturkampf:독일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분쟁) 때는 정치연설을 할 때 교회의 설교단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을 도입했으며 제국에서 예수회원들을 추방하는 것을 지지했다.

남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성격에다가 재치와 폭넓은 경험까지 갖춘 호엔로에는 1894년 카프리비 백작인 레오가 총리 자리에서 해임된 뒤 그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떠올랐다. 신임 총리로 취임했으나 그의 주위에는 요하네스 폰 미크벨,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비롯해 아돌프 마르샬 폰 비베르슈타인,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 같은 강력한 인물들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빌헬름 2세의 지나친 열정으로 빚어지는 손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려는 빌헬름 황제의 의향에는 찬동하지 않았으나 국가전복행위 방지법(1894)과 프로이센 안에서만 통용되는 사회주의자 처벌법(1897)의 통과를 지지했다. 1897년 뷜로가 외무장관이 되어 국제무대에서 독일의 지위를 신장시키는 새로운 '세계정책'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가 81세의 나이로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뷜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