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뤼에르

크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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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5. 10. 10, 케이프 식민지 크래덕 지구
사망 1904. 7. 14, 스위스 클라랑
국적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약 남아프리카의 농부·군인·정치가.
본명은 Stephanus Johannes Paulus Kruger. 별칭은 파울 삼촌(Oom Paul).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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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년기
  3. 보어인의 지도자
  4. 트란스발의 골드 러시
  5. 보어 전쟁

개요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 국가를 건설했다.

1883년부터 보어 전쟁 발발 후인 1900년에 유럽으로 피신할 때까지 트란스발(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초년기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북부 외곽지역에서 존경받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식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글로써 자신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었다. 그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엄격한 네덜란드 칼뱅주의에 따라 부모로부터 배운 종교적 가르침이었다. 10세 때 그의 가족은 북부 내륙지역으로 독립된 정치생활을 찾아 떠나는 국경지역 농민들의 이주 물결에 가담했다. 어린 소년이었던 크뤼에르는 이주민들이 벌여야 했던 호전적인 부족들과의 싸움과 자신들의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불과 10대였을 때 민간업무와 군사업무를 함께 다루는 지방 민병대장을 지냈고 1852년 1월에는 트란스발의 지도자였던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와 함께 영국 대표와 '샌드 강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 협약으로 발 강 북부에 살고 있던 보어인의 독립이 인정되었다(샌드리버와 블룸폰테인 협약). 1855~56년 새 공화국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861~64년 시민소요기에는 총사령관으로서 헌정기구의 지지를 받으며 공화국의 통일과 평화를 유지하는 뛰어난 역할을 했다.

보어인의 지도자

1877년 영국이 트란스발을 합병하자 크뤼에르는 독립을 되찾으려는 투쟁에서 국민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독립을 염두에 두고 1877, 1878년에 영국을 방문했으나 합병을 취소하도록 디즈레일리 정부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트란스발로 돌아와 영국 정부에 대한 수동적인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1880년에는 영국 자유당의 새로운 지도자인 글래드스턴의 약속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 자유당 정부가 그의 기대를 저버리자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이 트란스발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지역을 강제로 연방화하려는 시도에 대항해 케이프 식민지에 대한 동정과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 국민을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끈 크뤼에르는 1881년 2월 27일 '마주바 힐 전투'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둔 뒤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평화협상에 성공함으로써 제한적인 독립을 달성했다. 1883년 독립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보어인이 영국에게 항복한 1902년까지 그 직을 역임했다.

한편 1883년 크뤼에르는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 오랜 협상 끝에 서부국경을 조정하고, 트란스발에 대해 영국이 가지는 모든 종류의 종주권을 제거하는 새로운 협약(1884. 2. 27, 런던 협약)을 체결했다(런던 의회). 남아프리카로 돌아온 그는 서부국경 주변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케이프 식민지 당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분규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케이프의 정치가 세실 로즈는 이 서부국경선이 림포포의 북부영토인 '수에즈 운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85년 크뤼에르는 남아프리카군은 문제의 지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영국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보츠와나 지역에 대한 영국의 보호령 실시에 동의했는데, 이러한 그의 동의는 이후 케이프 식민지가 북부로 팽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트란스발의 골드 러시

1886년 비트바테르스란트 지역,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남쪽으로 약 64㎞ 떨어진 새로운 중심지 요하네스버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크뤼에르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수많은 '외지인들'이 트란스발로 몰려들어 보어인들의 농촌사회 한가운데에 주로 영국인 거주지로 이루어진 거대도시를 건설했다. 이것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그는 이들을 '신의 국민'이라 불렀음)들의 민족동질성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한 그는 1890년 선거권을 적어도 이 지역에서 14년 이상 거주한 남자로 엄격하게 제한하여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금광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독립된 입법기관(Volk-sraad)을 소집했으나 이 기구는 외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크뤼에르의 경제·철도 정책은 트란스발의 독립촉진을 목표로 했으나 금의 생산비용을 상승시켜 금광사업가의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크뤼에르에게 특권을 받은 '네덜란드 - 남아프리카철도회사'가 요하네스버그와 델라고아 만(灣)을 연결하는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고율의 철도관세를 부과한 데에 불만을 품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크뤼에르는 케이프 철도를 둘러싼 살인적인 경쟁을 막기 위해 이 철도회사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문에 조국의 이득을 추구할 수 없었다.

막대한 금 산출 이익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케이프 총리 로즈는 영어권 남아프리카를 통일하려고 노력했으며 란트 지역에서 크뤼에르 정권에 대항해 자본가와 외지인들의 운동을 지지했다.

남아프리카 관세동맹에 가입하도록 크뤼에르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로즈는 이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키기로 결심했다. 결국 크뤼에르는 로즈가 꿈꾸는 제국의 실현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1895년 크뤼에르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과, 트란스발에서 일어난 갈등의 이면에는 커다란 문제가 자리잡고 있으며, 영국이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반대하는 주도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선거권을 새로운 이주민에게 확대하는 문제가 단지 로즈가 꾀하는 계획의 미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았다.

보어 전쟁

1890년 이후 크뤼에르는 남아프리카 내부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반대파와 싸워야 했다.

영국의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의 확고한 신임을 받고 있던 로즈가 '제임슨 습격'(1895년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반대하여 일어났음)을 지지했을 때 크뤼에르는 이 습격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자신의 명성을 되찾았다. 1898년 5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크뤼에르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로즈가 강제로 물러나는 사이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은 정면으로 드러났다.

영국의 식민장관 체임벌린은 외지인들을 강력히 지원했고 1897년에는 앨프레드 밀너 경을 케이프 식민지 총독 겸 고등판무관으로 남아프리카에 파견했다. 체임벌린의 지지를 받은 밀너는 쟁점을 공략하여 트란스발에서 투표자격권자의 거주제한을 5년으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 1899년 5월 크뤼에르는 오렌지 자유주의 주도 블룸폰테인에서 밀너와 협상했다. 비록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크뤼에르는 유권자의 거주지 제한규정을 7년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밀너가 이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긴장이 고조되었고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1899년 10월 9일 크뤼에르가 국경지역에서 영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전쟁의 위험은 더욱 커졌다.

이틀 뒤 발발한 전쟁에서 처음에는 보어인이 승리했지만 곧 영국 침략군이 보어인의 수도를 2군데 점령했다. 크뤼에르는 최후의 보어 군대와 함께 델라고아 만 철도를 따라 후퇴했다. 유격전을 지속하기에는 너무나 늙은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1902년 5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1904년 7월 스위스에서 죽었으며 헤이그에 있는 임시 무덤에 묻혔으나 1904년 12월 16일에 프리토리아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