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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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707년 케이프 식민지에 살던 백인은 네덜란드와 독일계였고 프랑스 위그노계도 약간 있었다. 현재 보어인의 대부분은 이들의 후손이며, 보통 아프리카너라고 부른다. 보어인은 가부장적인 자급자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유목민이었고 칼뱅교도였다. 1806년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지배하게 되자 보어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영국은 1852년 트란스발 정착민들의 독립(남아프리카 공화국)을, 1854년 발 강과 오렌지 강 지역 정착민들의 독립(오렌지 자유국)을 승인했다. 두 나라 모두 흑인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폈다. 1867년에서 19세기말 보어인 거주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견되자 남아프리카전쟁이 일어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02년 영국군에게 패했으나, 결국 정치적인 지배권을 회복했다.

보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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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트란스발오렌지 자유주에 최초로 자리잡았던 정착민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보어인의 후손을 보통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른다.

1707년 케이프 식민지에 살던 백인 인구는 1,779명이었는데, 대부분 네덜란드와 독일계였고 프랑스 위그노계가 약간 있었다. 현재 아프리카너의 대부분은 이들의 후손이다. 아프리카너의 인구는 1970년대에는 약 220만 명으로 전백인의 약 60%를 차지했다.

1652년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희망봉에 항구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얀 반 리베크를 지휘자로 하는 일군의 군인과 관리를 보냈다. 초기에 이 회사는 이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나 18세기 이후부터 케이프 식민지는 주로 자연증가된 인구에 의해 발전했다. 식민지는 번창했지만 백인의 절반 이상이 결국 유랑 농민(trekboeren)이 되었다. 케이프타운 농산물 시장은 공급과잉이었고 식민지의 일은 노예들이 해치웠기 때문에 케이프 남서부에서는 백인이 늘어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많은 보어인들은 흩어져 자급자족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보어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과 케이프 식민지 정부 모두에게 적대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은 그들의 땅을 위협해 자주 방목(放牧) 경계 다툼을 벌였으며 케이프 식민지 정부는 보어인들의 이동과 교역을 축소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보어인들은 가부장적인 자급자족 공동체들을 기반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정착농업과는 전혀 무관한 떠도는 유목민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보어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족장 중심 생활에 비유했다. 또한 이들은 엄격한 칼뱅교도였으며 자신들을 미개지에 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지역과 그곳에 사는 뒤떨어진 원주민을 지배하라는 소명을 받은 선택된 그리스도교도라고 생각했다. 18세기말경 그들은 케이프 식민지에 사는 다른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1806년 케이프 식민지는 영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초기에 보어인들은 영국의 통치를 인정했으나 곧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반기를 들게 되었는데 특히 개척자와 노예 해방에 대한 정책에 반대했다. 1835~43년 1만 2,000여 명의 보어인들이 대이주를 통해 식민지를 떠나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게 사는 높은 초원지대와 나탈 남부로 이동했다. 영국 정부는 1852년에 트란스발 정착민들의 독립(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1854년에는 발 강과 오렌지 강 지역 정착민들의 독립(오렌지 자유국)을 승인했다.

두 나라 모두 교회와 국가에서 흑인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폈다.

1867년에서 19세기말 보어인 거주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견되자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이 일어났다. 전쟁은 보어인이 오이틀란더(uitlander:트란스발의 금광과 다이아몬드광에서 일하는 이주민으로 주로 영국인)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자 이를 빌미로 영국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공격을 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오렌지 자유국과 케이프 식민지에 있는 네덜란드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2년이 넘게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보어인은 매우 뛰어난 유격전술을 구사했지만 결국 1902년 영국군에게 굴복함으로써 공화국의 독립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고, 결국 정치적인 지배권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