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로즈

세실 로즈

다른 표기 언어 Cecil John Rh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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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3. 7. 5, 영국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비셥스토퍼드
사망 1902. 3. 26, 케이프 식민지 뮤젠베르크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재정가, 정치가, 영국령 남아프리카 제국의 창설자.

목차

접기
  1. 로즈의 초기 생애
  2. 로즈의 정치입문과 아프리카 개척
  3. 로즈의 케이프 식민지 총독 시절
  4. 로즈의 후기 생애
세실 로즈(Cecil Rhodes)
세실 로즈(Cecil Rhodes)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을 지냈으며(1890~96) 거대한 다이아몬드채광회사인 데베르스통합광산회사를 설립했다(1888). 세실 로즈의 유언에 따라 옥스퍼드대학교에 로즈 장학회가 설립되었다(1902).

로즈의 초기 생애

그는 비셥스토퍼드의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시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어린시절의 꿈은 변호사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조림과 농업증진사업이 그가 평생 동안 간직한 열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꽤 부유한 편이어서 첫째 아들을 이튼 칼리지에, 둘째를 윈체스터 칼리지에, 그리고 셋째를 군대에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폐가 좋지 않던 그는 집에 남아 지방의 그래머 스쿨(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건강 때문에 자신이 꿈꾸었던 전문직 역시 포기해야 했다.

1870년 대학에 가는 대신 남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목화농장에서 일했다. 그곳에는 먼저 건너간 형 허버트가 이미 기반을 잡고 있었다. 나탈에 있는 농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형은 이미 그리콸랜드웨스트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아 떠나고 없었다. 농장으로 돌아온 형 허버트와 함께 세실은 묵묵히 1년 동안 목화 재배에 힘썼지만 결국 '다이아몬드 열병'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1871년 그들은 광산의 중심지인 킴벌리 시로 갔으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나탈에서보다 더 힘들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허버트는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1873년 이 광산을 떠나갔으나 세실은 특유의 끈기를 발휘하여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을 오가며 킴벌리 시에 머물러 있었다.

1881년 뒤늦게 학위를 받을 때까지 8년 동안을 킴벌리와 옥스퍼드를 오가며 보냈으며 외관상 두 사회의 관례에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괴짜로 비추어졌다. 옥스퍼드대학교 시절 그의 주변에는 늘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의 괴팍한 버릇, 낄낄대는 목소리, 두서없는 장광설, 남다른 배경 등이 그보다 어린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의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제국주의에 관한 그의 철학 또한 인기를 끈 한 요인이었다.

점차로 그는 모험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캐러 다니는 사람에서 다이아몬드 산업의 미래에 대한 야망을 가진 자산가로 성장했다. C.D. 러드와 같은 그의 초기 동료들은 그만큼이나 곤궁한 젊은이들이었다. 로즈는 러드와 함께 데베르스통합광산회사를 세웠는데 이른바 데베르스 광산 클레임이 일어난 후 소유권 중 많은 부분을 그가 차지했다. 결국 그는 성공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경쟁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시장을 잘 알고 있었던 독일인 알프레트 바이트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바이트의 도움으로 그는 데베르스 광산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장하여 마침내 광산 전체를 소유했다. 1887년에는 바니 바나토가 소유하고 있던 킴벌리 광산 인수에 착수했으며, 1888년 주식을 매입하려는 격렬했던 경쟁은 그가 원하던 대로 끝났다. 그는 바나토가 소유했던 주식에 대해 500만 프랑(2,500만 달러) 이상의 후한 가격을 지불해주었고, 그 경쟁자를 이전에는 결코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킴벌리 클럽의 회원으로 가입시켜주고 축하해주었다.

다른 소규모의 여러 광산 역시 그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1891년경 데베르스통합광산회사는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90%를 점유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885년에 발견되었던 트란스발 금광의 거대한 지분을 차지했으며 1887년 사우스아프리카금광회사를 설립했다. 그가 세운 주요한 두 회사가 합병계약에 합의함으로써, 북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로즈의 정치입문과 아프리카 개척

로즈는 결코 돈벌이를 목적 그 자체로 보지 않았다.

'지도 위를 붉게 칠하는 것', 즉 케이프 시에서 카이로 시까지 철로를 건설하고 붉은 색의 영국기 아래서 보어인과 영국 국민을 화해시키는 것, 심지어 대영제국에게 미국의 여러 식민지를 되찾아주는 것 등이 그가 꿈꾼 모든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1881년 정치에 처음 입문하여 보어인의 지지로 선출되었고 케이프 식민지 의회에 진출한 뒤 여생을 정치활동에 바쳤다.

연설에 서투르고 의회적 절차를 경멸했지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에 힘입어 존경을 받았다. 많은 보어계 정치인들과 사귀었으며, 지금은 각각 레소토보츠와나로 일컬어지는 바수톨란드와 베추아날란드에 사는 원주민들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의 관심은 항상 북쪽에 있었다.

1882년 처음으로 원주민정책에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바수톨란드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난 직후 혼란 수습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전에 이집트의 수단을 통치했으며 당시 케이프 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인 찰스 고든 장군이 반란을 진정시켰다.

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원주민 족장들과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성공한 것이었다. 로즈는 그와 그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으나 고든의 돈에 대한 경멸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겠다고 결심함으로써 그는 많은 분쟁에 휘말렸다. 독일인·벨기에인·포르투갈인을 비롯한 다른 여러 열강들이 각자 트란스발의 보어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 미지의 내륙을 향해 서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로즈가 보기에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이해만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케이프 정부는 허약했고 그가 '제국주의 중개인'이라고 부른 영국 정부는 그와 너무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에 로즈의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에서 정부의 관리들, 특히 고등 판무관인 허큘레스 로빈슨 경과의 사교에 힘써 유익한 결과를 얻었다.

결정적인 지역은 베추아날란드였는데 선교사들이 이용하는 길이 그 지역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

그는 현재 짐바브웨의 로디지아에 있는 마쇼날란드와 마타벨렐란드의 북쪽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그 길을 이용하려고 했다. 광물자원과 교통로의 획득이 그의 목적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인정착이 목표였다. 그러나 모든 경계선이 확정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여러 차례의 침입이 좌절되었다. 트란스발 출신의 보어인들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베추아날란드를 통합하려고 노력했으며 스텔랄란드와 고센에서 2개의 작은 독립공화국을 선포했다.

1882년 그는 다시 경계선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그리콸랜드웨스트의 여러 경계선을 설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2개의 작은 공화국들에게 통치위임권을 베풀어주도록 위원회를 설득했다. 1884년 남서아프리카에 있던 독일인들이 두 지역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다. 이것은 스텔랄란드와 고센을 연결하여 북으로부터 케이프 식민지를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대영제국 정부가 중재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등판무관을 설득했다. 1884년 런던 의회는 두 공화국을 트란스발로부터 추방했고 케이프 식민지 정부는 베추아날란드를 보호령에 포함시키는 데 필요한 자금조달을 약속했다.

그가 베추아날란드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곧바로 그 해결책은 다시 위협을 받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역에서 판무관들이 보어인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여 자신이 요구한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스텔랄란드의 보어인들을 중재하는 데 성공했지만 트란스발의 대통령인 파울 크뤼에르가 고센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크뤼에르는 케이프에서 원정대가 파견된 뒤에야 고센에서 철수했다. 1885년 2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바알 강 근처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로즈와 크뤼에르가 처음으로 만났다.

이 고집센 두 사람은 서로 아프리카를 지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성경을 인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떠한 합의점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크뤼에르는 고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로즈가 원하던 대로 모든 것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베추아날란드 남부는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고 북부는 보호령 아래 두기로 결정되었다. 로즈는 두 지역 모두가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1885년 3월 이러한 결정에 항의하면서 사직서를 냈다.

이후 케이프타운과 런던에 그 식민지를 케이프 식민지에 이전해줄 것을 요구하며 분투했다.

한편 여전히 북부개발계획을 방해하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보어인인 크뤼에르가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 정책을 주장했다. 1890년의 선거법에서 그는 트란스발에서 금광을 운영하는 외국인들(Uitlanders)에 대한 정치적 권리들을 부정했다.

또한 마쇼날란드와 마타벨렐란드에 대한 보어인의 통제력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로즈의 또다른 장애물은 마타벨렐란드의 통치자인 로벤굴라 왕이었다. 1887년 크뤼에르는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로벤굴라는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백인들을 한번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결코 다시는 그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신뢰했던 백인들은 선교사들이었다.

로즈는 때마침 한 유명한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존 모펏을 만나 도움을 얻었다.

모펏은 한때 영국의 직할식민지인 베추아날란드에서 부(副)판무관으로 일했다. 1888년 2월 모펏이 로벤굴라를 설득하여 배타적인 친교협정에 서명하도록 했다. 로즈는 이 협정에 입각하여 광산채굴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신뢰하는 3명의 대리인을 파견했다. 그리고 1888년 10월 로벤굴라로부터 채굴권을 얻어냈다.

마지막까지 로벤굴라는 로즈에게 단지 '큰 구멍'을 파도록 허용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자신의 왕국을 양도하는 것에 서명한 것이었다. 로즈는 재빨리 고등판무관을 통해 대영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새로운 영토를 개발하기 위해 새 회사인 브리티시사우스아프리카사에 대한 설립인가서를 승인하도록 했다. 1889년 10월에 설립인가서가 승인되었고 로벤굴라 역시 채굴작업을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여성 혐오자라는 비난에 대해 "폐하가 속해 있는 성(性)을 제가 어찌 감히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반박한 로즈와 그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빅토리아 여왕은 매력을 느꼈다.

그의 성공적인 모험의 요지는 대영제국 정부가 승인한 설립인가서가 로벤굴라가 허용해준 권리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인가서에 정해진 북쪽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공인된 회사의 통제권을 베추아날란드 보호령뿐만 아니라 지금의 잠비아와 말라위에 해당하는 북부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까지 넓힐 작정이었다.

1890년 로즈의 개척자들은 마타벨렐란드와 그곳에서부터 마쇼날란드에 이르는 모험적인 행군을 시작했다.

그해 9월 마쇼날란드에 영국 총리의 이름을 따 솔즈베리라는 요새를 세웠다. 이듬해 해리 존스턴은 대영제국 정부의 판무관이자 공인된 회사의 고용인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권한 아래 니아살랜드의 행정권을 양도받았다. 결국 그 보호령은 대영제국 정부에게 완전히 귀속되었지만 로즈의 영향력은 잠제지 강 북부와 서부에까지 미쳤으며 곧 그 새로운 영토는 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즈의 케이프 식민지 총독 시절

1890년 그는 만족스러운 직책인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으로서 공직에 복귀했다.

5년 동안 그는 자신이 성공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총독임을 입증했다. 흐로테스휘르라고 하는 영지를 구입한 뒤 네덜란드 식민지풍 양식으로 개축하여 미래의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들을 위한 주거지로 남겼다. 또한 그곳에서 케이프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영국계 주민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저명한 방문객들을 아낌없이 환대했다. 그가 착수한 모든 일은 규모가 방대한 것이었다.

의회에서 그는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선의를 잃지 않으면서 아프리카 태생 백인들의 결속에 의한 지지를 구했다(아프리카너 연맹). 그가 행한 여러 농업정책들은 현명하고 효과적인 것이었으며 원주민에 대한 정책은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1892년 재정상태와 교육정도에 따라 원주민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선거 및 투표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1894년 그가 자랑스럽게 불렀던 '아프리카를 위한 법안'이라는 최고의 동기를 가지고 아프리카를 배타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일정한 지역을 지정하는 글렌그레이 법안을 도입했다. 그의 주요한 목표는 이러한 여러 개방정책을 둘러싸고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싸우는 일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싸움이 '원주민문제를 인종문제와 혼동하는' 위험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북부정책을 통해 보어인과 영국인을 결속시키려고 노력했다.

크뤼에르의 완고함으로 케이프의 네덜란드인들이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전망이 밝았다. 크뤼에르는 상업교역이 케이프 식민지를 거쳐 트란스발에 다다를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델라고아 만에 이르는 철로를 건설했다. 1894년 당시 그는 케이프에서 산출되는 물품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 외에도 짐마차로 물품을 수송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발 강의 '여울'을 막아버렸다. 로즈가 트란스발 수도로 가서 이에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로즈의 법무장관이 크뤼에르가 런던 의회의 결정사항을 위반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1895년에 식민지 서기관이 된 조지프 체임벌린이 군대파견을 후원하겠다는 위협을 가세함으로써 결국 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과 트란스발의 금 매장량은 어마어마한 반면 마쇼날란드의 금 매장량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북부정책은 예기치 않은 차질을 겪고 있었다. 회사는 재정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필요한 자원을 과도하게 늘리고 있었다.

그의 대리인들이 몇몇 새로운 영토를 회사에 확보해주었지만 그는 다른 곳에서 기선을 제압당했다. 1889년 영·독협정에 의해 일정한 부분의 땅을 독일에게 넘겨줌으로써 베추아날란드는 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890년 벨기에 왕인 레오폴은 로즈가 카탕가 지방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선수를 쳤다. 1891년 영국과 포르투갈의 협정체결로 아프리카로부터 포르투갈을 축출하려는 그의 희망은 사라졌다(영국·포르투갈 협정). 해리 존스턴은 니아살랜드를 통치하는 데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1891년 로디지아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먼저 와 있던 개척자들이 화가 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털어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1893년 로벤굴라가 마쇼날란드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서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짧고 격렬한 전쟁은 로벤굴라의 참패와 죽음으로 끝났다. 당시 로즈는 인생의 절정기에 달해 있었지만 남부아프리카 연합이라는 광대한 꿈은 더욱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화를 잘 내고 참을성도 없어졌으며 늙었다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1895년경 그는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크뤼에르 대통령에게 보복하기로 결심했다.

트란스발에 있는 백인들의 불만을 없애주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자는 이야기가 이미 있었다(오이틀란데르). 그 백인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 국민연합을 설립했다.

그 지도자들 중에는 로즈의 형인 프랑크도 들어 있었다. 크뤼에르는 독일 정부에 도움을 호소했다, 1895년에는 다시 발 강을 가로지르는 '여울'들을 막았다. 그는 다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무렵 그에 대한 모반이 진행되고 있었다. 로즈는 그 사실을 알고서 그것을 더욱 조장하기 위해 활동적으로 움직였다.

로즈의 후기 생애

체임벌린이 그 모반계획에 은밀히 관여했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국민연합은 낙담하여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로즈, 고등판무관인 허버트 로빈슨 경, 체임벌린 등은 모두 그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즈가 직접 마타벨레의 통치자로 임명했던 린더 스타 제임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트란스발에 침입하여 외국인들로 하여금 무력을 쓰도록 하겠다고 결정했다. 1895년 12월 29일 그는 그 유명한 급습에 착수했으나 그것은 커다란 실책이었다.

그의 군대 전체가 생포되었고 그중 몇 사람은 죽었다. 로즈는 케이프 정부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임슨에 대한 탄핵은 거부했다.

그 습격사건은 로즈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제임슨과 그의 동료들은 수감되었고 크뤼에르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네덜란드와 영국계 식민지 주민들은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분열되었다. 로디지아와 베추아날란드는 대영제국 정부가 인수했다. 오직 인가서만 남은 로즈는 남은 여생을 북부에서의 여러 개발사업 증진에 바쳤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기까지 했다. 죽기 전의 몇 년 간의 삶은 개인적·정치적으로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1896년초 로즈가 영국에 머물고 있을 때 마타벨렐란드에서 심각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이집트를 경유하고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결국 평화회담을 개최함으로써 반란을 종결지었다. 이때 로즈는 자신이 '세계의 풍경'이라고 이름 붙인 마토포 언덕에 자신이 묻힐 장소를 정했다.

귀족 출신의 모험가였던 라지뷜 공주와의 불운한 관계 때문에 그는 마지막 몇 년 간의 삶을 쓸쓸하게 보내야 했다.

그녀는 대영제국에 관한 자신의 이상들을 실현하기 위해 로즈와 밀너, 심지어 영국 총리 솔즈ㅈㅂ 경까지도 교묘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로즈는 교활한 여인에게 익숙하지 못했으며 그 주위에 있던 젊은 청년들 역시 그녀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이름으로 여러 문서와 환어음을 위조했다. 그녀는 결국 그에게 많은 괴로움과 파문을 주고 난 후 수감되었다. 1901년 유럽에 머물고 있던 그는 그녀의 공판에 증거를 제출하기 위해 케이프타운으로 소환당했다.

그곳에서 돌아와 그가 한 마지막 정치적 활동은 1899년 10월에 일어난 보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식민지 정체(政體)를 일시 중단시키고 있던 밀너의 정책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치료가 불가능한 심장병으로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고사하고 라지뷜 공주의 공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장례 열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통해 마토포 언덕에 이르는 그의 마지막 여행은 마치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1902년 4월 그의 유언장이 낭독되었을 때 그의 명성은 새로운 절정에 달했다. 여러 식민지, 미국, 독일 출신의 젊은이들을 위해 옥스퍼드대학교에 장학회를 설립하고자 했던 상상력이 풍부한 계획은 더욱 청렴한 형태의 제국주의적 본성을 대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로즈 장학금). 그의 재산의 대부분은 이러한 목적에 바쳐졌다.

유언에서 인종을 이유로 한 자격박탈을 금지함에 따라, 이것이 로즈가 의도했던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많은 비백인계 학생들이 장학회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그는 한때 자신의 정책을 '잠베지 강 남쪽의 모든 백인에 대한 동등한 권리'라고 정의내렸다가 후에 자유주의자들의 압력으로 '백인'을 '문명인'으로 고쳤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문명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으므로 그의 생각 속에서의 이 두 표현은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