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

체임벌린

다른 표기 언어 Joseph Chamberlain
요약 테이블
출생 1836. 7. 8, 런던
사망 1914. 7. 2,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체임벌린은 소속 정당에 충성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기보다는 실제적인 성공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인 급진주의자이자 제국주의 정치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런던에서 유복한 제화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주의적이고 비국교도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6세에 가업을 물려받아 38세의 나이에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사업 일선에서 은퇴했다. 버밍햄 시장을 역임한 후 급진주의자로 의회에 입성하여 1880년에 자유주의 정부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지지함과 동시에 제국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1895년에 보수당을 지지하는 자유통일당 세력을 이끌었고, 보수내각에서 식민장관을 역임했다. 영국과 보어인 사이에 벌어진 '남아프리카 전쟁'후에는 영국과 그의 식민지 국가들을 공동시장으로 묶는 보호관세계획을 발표했으나 자유무역 옹호자들로부터 공격받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그는 소속 정당에 충성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기보다는 지방적·전국적·제국적 차원에서 실제적인 성공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인 건설적인 급진주의자였다.

그가 주장한 관세개혁과 제국의 통합이란 개념은 그당시에 선진적인 사고였으며, 20세기에 영국이 취해야 할 정책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런던에서 유복한 제화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체임벌린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고 종교적으로는 비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6세에 가업을 물려받았다. 2년 후 그는 버밍엄으로 이사하여 그의 사촌이 경영하던 나사 제조업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의 거물다운 풍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조직적인 감각으로 체임벌린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물리쳤으며, 1874년 38세의 나이로 상당한 재산을 모아 사업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후 그는 공무를 맡아보았으며, 1873년 버밍엄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교육제도의 개혁, 빈민가 일소, 주택개량, 공익사업의 시영화 등에서 보여준 선구자적 업적으로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40세의 나이에 가냘픈 체구, 날카로운 얼굴생김, 그리고 줄달린 외눈안경으로 널리 묘사되었던 '가스와 물의 사회주의자' 체임벌린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876년 곧바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의원들 사이에서는 비국교도이며 벼락출세한 사람으로 취급당해 불신임을 받았다. 반면에 확신에 찬 급진적인 내용의 연설로 보수당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버밍엄을 기반으로 한 그의 산업중산층 지지자들은 그를 숭배했고, 그는 코커스라는 효율적인 당조직을 통해 미들런즈에서 많은 자유당표를 얻어냈다. 배후조종자로 알려진 그는 하원에서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1882년에는 글래드스턴의 제2차 내각(1880~85)에서 상무장관을 역임했다.

체임벌린은 그의 급진적인 동료 찰스 웬트워스 딜크 경과 자유당의 좌파를 이끌었다. 1885년에 그들은 누진세, 무상교육, 빈민층을 위한 주택개량, 지방정부의 개혁, 그리고 농민들에게 '3에이커의 땅과 소 1마리'를 줄 것을 요구하는 '비권위적인 강령'(unauthorized programme)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전국을 돌며 유세했다.

아일랜드의 토지개혁과 자치에 대한 요구가 영국 정치를 점차 혼란에 빠뜨리고 자유당 내에 깊은 분열을 야기한 1880년대 동안 체임벌린은 아일랜드의 개혁, 특히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의 소요에 진압군을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는 글래드스턴의 입장을 지지했다(자치운동). 그러나 체임벌린은 이미 본능적으로 제국의 통일이란 입장을 지지했다.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의 자치문제에 대한 당의 입장을 분명히 한 1885년에 그는 더이상 글래드스턴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아일랜드 자치문제가 하원에서 표결에 부쳐진 1886년, 체임벌린은 자유통일당원(Liberal Unionist)들과 더불어 정부안을 부결시켰다.

자유당 내의 분열은 영구화되었다.

자유통일당원의 지지를 받는 보수당이 1886~06년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영국 정계를 지배했다. 체임벌린은 자유통일당원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이용하여 보수당이 보다 진보적인 사회정책을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892년까지 그는 보수당이 다양한 사회개혁 조치들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보수당 정권은 국내에서 사회개혁에 대한 환멸이 점차 증대하고 있음을 반영했고, 제국 내의 문제와 외교문제에 새롭게 중점을 두었다.

체임벌린 역시 자신의 급진주의를 포기하기 시작했으며, 애국주의적인 산업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제국주의적 웅변가로 점차 변해갔다. 1895년에 그는 훗날 솔즈베리 후작 3세가 된 로버트 세실의 보수당 내각에 들어가 식민장관이 되었다. 식민장관으로 있으면서 체임벌린은 곧 남아프리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1895년 12월 제임슨 레이드를 중심으로 인접한 케이프 콜로니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트란스발의 보어 공화국을 침략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가 제임슨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후에 하원 조사위원회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그가 반(反)보어적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악화된 영국과 보어인 간의 관계가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으로 폭발하자 체임벌린은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전쟁 기간 동안 세계 여론이 영국을 무법자로 비난하자 체임벌린은 영국이 군사적으로 취약하며 외교적으로 유럽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가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항상 선호했던 독일이 특히 적대적이었다. 영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인식하에서 체임벌린은 전쟁중에 영국을 지원한 자치식민지에 주목했다. 1902년에 평화협상을 마치고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국가들을 하나의 공동시장으로 묶는 새로운 관세계획을 발표했다. 영국 연방 소속국이 아닌 경우에는 엄격한 관세를 부과하고 영국 연방 소속국일 경우에는 특혜관세를 적용함으로써, 영국 연방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보호할 이 관세계획이 영국의 국제적 안전을 강화시키고 영국의 새로운 경쟁국들인 미국과 독일로부터 영국의 제조업자들을 보호할 것이며, 또 국내적으로는 사회사업을 위한 수입원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체임벌린은 그 특유의 정력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당을 그의 새로운 구상에 맞추어나갔다.

보수당의 지도자이자 훗날 밸푸어 백작 1세가 된 아서 밸푸어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을 거절하자 체임벌린은 각료직을 사퇴하고, 1903~06년 '제국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것을 호소하면서 개인적으로 강력한 운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보호관세정책은 정치적 불안의 불씨가 되었다. 영국인들에게는 값싼 수입식품으로 의미되었던 자유무역은 반세기 이상 영국인들의 전통적인 경제 상식의 시금석이었다.

자유당원들은 도처에서 값싼 빵을 요구했고, 보수당은 자유당이 20년 전에 아일랜드 자치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한 것과 같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었다. 1906년 총선에서는 체임벌린이 자유무역을 반대했기 때문에 보수당과 자유통일당원들이 패배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그의 고향인 버밍엄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정치적 승리였다. 선거 직후인 1906년 7월 그는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남은 생애 대부분을 무력하게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