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크

딜크

다른 표기 언어 Sir Charles Wentworth 2nd Baronet Dil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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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3. 9. 4, 영국 런던
사망 1911. 1. 26,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급진주의 정치가.

W. E. 글래드스턴의 2차 내각에 입각했으나 공동피고로 이혼법정에 소환됨으로써 정치적인 파멸을 맞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일주여행을 마친 뒤 1868년 하원에 진출했으며 군주제에 반대하는 일련의 극좌적인 연설로 주목을 끌었다. 1874년부터는 자유당 지도자들과 교분을 쌓았고 글래드스턴의 2차 임기가 시작되자 1882년 지방자치부장관으로 입각했다. 딜크는 조지프 체임벌린과 함께 자유당 정부내 급진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열정은 수차례 사직서를 제출하게 했으나 이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입지에 도움이 되었다. 1885년 6월 글래드스턴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1879년 딜크의 총리취임 가능성을 내다보았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예상이 적중하는듯이 보였다.

그로부터 1개월 후 존 딜크는 가능성을 시험해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이혼법정에 소환되는 충격을 맛보게 된다. 22세인 스코틀랜드 변호사의 아내 버지니아 크로포드가 1882년 이래 그의 정부노릇을 해왔다고 밝혔던 것이다. 딜크는 줄기차게 그녀의 진술을 부인했고 1886년 2월의 심리에서는 증거불충분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이미 크로포드 변호사는 부인과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다.

딜크는 〈폴 몰 가제트 Pall Mall Gazette〉가 선봉이 된 언론의 선동으로 자신의 승리가 희석되기 시작하자 국왕 대소인을 통하여 공판을 재개했고 1886년 7월 제2차 심리가 개시되었다. 공판의 재개는 딜크에게 재앙을 안겨주었다. 그는 버지니아 크로포드의 주장을 논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버지니아의 어머니와 관계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6년 후 찰스 딜크는 서민원(하원)에 복귀했고 사망시까지 의석을 지켰다. 의회내 군사전문가이자 진보적인 노동입법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많은 시간들이 과거의 오명을 씻기 위한 증거수립에 할애되었다. 딜크의 자료에 근거할 때 버지니아의 진술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 분명하지만 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