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김억

다른 표기 언어 金億 동의어 김희권, 金熙權, 안서, 岸曙, 석천, 石泉, 돌샘, 안서생, 岸曙生, 김포몽, 金浦夢
요약 테이블
출생 1896. 11. 30, 평북 정주
사망 미상
국적 한국

요약 시인·문학평론가. 외국시를 번역·소개하여 근대문학 형성에 이바지했으며, 김소월을 발굴,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키웠다. 대표작으로 <연분홍>, <봄은 간다>가 있다.

1910년대부터 프랑스 상징파의 시 등 외국시를 번역·소개하여 근대문학 형성에 이바지했다. 초명은 희권, 필명은 안서·안서생·AS.

오산중학교를 거쳐 1913년 게이오[慶應]의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중퇴했다. 도쿄 유학시절인 1914년 4월 〈학지광〉에 시〈이별〉을 시작으로 〈학지광〉 5호에 시 〈야반〉·〈밤과 나〉·〈나의 적은 새야〉, 6호에 〈예술적 생활〉, 10호에 〈요구와 회환〉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16년 오산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김소월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 4호에 투르게네프의 시를 번역하고 5호에 〈믿으라〉·〈오히려〉·〈봄은 간다〉등의 시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했다. 최남선이 보여준 계몽성의 시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유시 형태를 보여주었다.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이란 시를 번역했으며, 〈프랑스 시단〉·〈소로굽의 인생관〉을 통해 서양 문예이론을 소개했다. 〈시형의 음률과 호흡〉(조선문예, 1919. 2)에서 운율은 생리현상인 호흡에 기초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후기 상징파 시인인 폴 클로델의 '호흡률'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여기서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이원구조성을 '심령과 육체의 조화'로 표현하여 예술의 기본개념을 밝히고 있다.

1920년 〈폐허〉·〈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폐허〉에 베를렌의 시를 연재하고, 번역시 〈가을의 노래〉·〈작시론〉 등 19편과 문예이론으로 〈스핑쓰의 고뇌〉(폐허, 1920. 7)·〈플로베르론〉(폐허, 1921. 1) 등을 소개했다. 〈창조〉에는 투르게네프의 시를 비롯한 많은 외국시를 번역했고 모파상의 소설 〈고독〉(창조, 1921. 1)을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퇴폐주의 시인과 작품은 1920년대 문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한때 퇴폐주의 문학이 문단을 휩쓸기도 했다.

초기의 창작시는 〈해파리의 노래〉(1923)에 싣고 그밖의 번역시는 〈오뇌의 무도〉에 모아 펴냈다.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 경성방송국 등에서 일했으며 〈가면〉의 편집을 맡기도 했는데, 이무렵 많은 번역시와 민요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해방 후에는 수선사라는 출판사의 주간으로 있었고, 6·25전쟁 때 이광수·박영희와 함께 납북될 때까지 잡지 〈개벽〉·〈조선문단〉·〈신동아〉·〈신인문학〉·〈동아일보〉·〈매일신보〉를 통해 300편이 넘는 시와 150편 정도의 평론을 발표했다.

그의 시세계는 〈해파리의 노래〉·〈안서시집〉(1929)·〈안서시초〉(1941)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해파리의 노래〉는 자유시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안서시초〉의 시대에는 7·5조의 민요시 형태를 보여준다. 후기 시에 보이는 정형성은 뒤에 그가 한시를 번역하면서 영향받은 듯하다. 시집 〈금모래〉(1925)·〈민요시집〉(1948), 희곡 〈젊은 그들〉(1933), 수필집 〈사상산필〉(1931), 번역시집 〈기탄잘리〉(1923) 등이 있으며 한시를 번역한 〈망우초〉(193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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