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엘리엇

다른 표기 언어 T(homas) S(tearns) Eliot
요약 테이블
출생 1888. 9. 26,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사망 1965. 1. 4, 런던
국적 미국/영국

요약 <황무지> 같은 시와 <성당의 살인>·<칵테일 파티>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를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엘리엇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은 그가 주로 관심을 쏟은 일에 부수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맡았던 계간 비평지 <크라이테리언>은 당시 가장 탁월한 국제적인 비평지였다. 엘리엇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 발표한 <4개의 4중주>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가정 배경과 초기생애
  3. 초기의 출판물
  4. 〈황무지〉와 비평
  5. 후기의 작품활동과 영향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개요

〈황무지 The Waste Land〉(1922) 같은 시와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1935)·〈칵테일 파티 The Cocktail Party〉(1950)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성공적인 뮤지컬 〈캣츠 Cats〉는 〈늙은 주머니쥐의 고양이에 관한 책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1939)을 기초로 한 극으로, 1981년 영국에서 막을 올렸고 1982년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시인·극작가·문학평론가·편집인으로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英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사회적·문화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가정 배경과 초기생애

엘리엇의 첫 미국 조상은 앤드루 엘리엇으로 그는 영국 서머싯 이스트코커의 구두제조공이었으며, 1670년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인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 목사는 1834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즉시 보스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그는 열렬한 연방주의자·유니테리언교도였으며 노예제도가 허용된 주에서 활동했던 반노예주의자로서, 워싱턴대학교를 창설했으며 그가 반대하지만 않았다면 그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1872년 그는 워싱턴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버지인 헨리 웨어 엘리엇은 가문의 전통을 깨고 사업을 했다.

어머니인 샬럿 챔프 스턴스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났던 다작(多作) 시인으로서 시아버지의 전기를 썼다.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인 사보나롤라의 순교를 소재로 한 시극을 짓기도 했는데, 1926년 그녀의 아들이 이 시극에 서문을 붙였다. 엘리엇이 태어날 무렵, 그 가문은 54년 동안이나 미주리 주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나 서부의 영향을 배제하고 뉴잉글랜드의 정치적·신학적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말년에 자신이 보스턴이나 뉴욕·런던에서 태어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뉴잉글랜드인이었다.

엘리엇의 가정 배경은 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실무적'이 되거나 사업에 투신하지 않은 채 당시 가능했던 가장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를 다닌 후 매사추세츠 주의 대학 예비학교인 밀턴 아카데미를 다녔고, 그곳을 졸업한 뒤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다.

보통 대학 수학 기간이 4년이었지만 그는 3년 만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 재학 당시 그에게 깊은 감화를 준 사람은 철학가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와 비평가인 어빙 배빗이었다. 그는 배빗으로부터 반낭만주의적 태도를 흡수했는데, 훗날 영국 철학자들인 F.H. 브래들리와 T.E. 흄의 사상을 전공함으로써 반낭만주의적 태도가 더욱 심화되어 그의 일생 동안 지속되었다.

1909~10년에 그는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조교를 지냈다.

1910~11년은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시인인 엘리엇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그 해를 보내면서 소르본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강의를 들었고, 알랭 푸르니에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프랑스어를 완전히 익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샤를 보들레르에서 쥘 라포르그를 거쳐 스테판 말라르메에 이르는 상징주의 시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1914년 처음으로 에즈라 파운드를 만났다. 1946년 〈포이트리 Poetry:A Magazine of Verse〉에 그의 정치성을 무시한 채 파운드의 문학 경력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 젊은 미국 시인들이 처했던 무미건조한 문학적 환경을 묘사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모두 외국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파운드는 투르바두르(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인들을, 엘리엇은 라포르그와 단테를 사숙(私淑)했는데, 이들은 엘리엇이 자신의 문체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존 웹스터와 존 던 이상으로 영향을 주었다. 1911~14년 그는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탁월한 학자인 찰스 랜먼으로부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1913년 그는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를 접하게 되었고, 1916년 유럽에서 〈F.H. 브래들리의 철학 지식과 체험 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H. Bradley〉이라는 표제의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1964년에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최종 구두시험을 치르기 위해 하버드대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의 출판물

엘리엇은 편집인, 극작가, 문학비평가, 철학적 시인이라는 4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영어권 시인들 중 가장 해박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대학 재학시절에 쓴 그의 시들은 '문학적'이고 관습적이었다. 그의 최초의 중요한 출판물이며 영어로 씌어진 '모더니즘'의 첫 걸작은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였다. "자 우리는 가세, 그대와 나,/저녁은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처럼/하늘에 몸을 뻗어 누워 있는 이때……" 엘리엇은 이 시의 복사본을 그의 친구인 콘래드 에이컨에게 주었고, 그는 이 시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전했으며, 파운드는 다시 이 시를 〈포이트리〉지의 편집장인 헤리엇 먼로에게 보냈다.

먼로가 그것이 시의 장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1년 이상이나 발표가 늦어지게 되었다. 비록 파운드가 1908년에 개인적으로 소책자 〈A lume spento〉를 이미 출간했었지만,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는 이 문학적 개혁가들이 실험 단계를 넘어 완성한 첫 시였다. 이 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1798)과 같이 과거와 철저한 단절을 이루었음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시의 혁명은 엘리엇의 첫 시집 〈프러프록 외(外)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를 출간한 1917년에 성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시 〈프러프록〉 이외에도, 이 책에는 〈서시 Prelude〉·〈어느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등의 원숙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의 혁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콜리지워즈워스의 낭만주의 혁명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이 18세기 시인들인 콜리지와 워즈워스처럼 시어를 개혁하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워즈워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엘리엇은 교육받은 사람이 쓰는 '현학적이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은' 시어를 추구했다.

그는 스윈번에 대해 "그렇듯 탁월한 시에서 최초로 의미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년 동안 그는 하이게이트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1917년 그는 잠시 로이드은행의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문학비평과 전문적인 철학분야에서 많은 평론을 썼다. 1919년 〈시집 Poems〉을 발표했는데, 무운시 형식으로 씌어진 명상적 내적 독백시 〈제론션 Gerontion〉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는 영시 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황무지〉와 비평

1922년 〈황무지〉가 출판됨으로써 엘리엇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5부로 구성된 이 시는 서유럽의 거대한 현대도시들의 20세기적 감성의 단편적인 경험을 반영한 '수사적 불연속성'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어간다. 엘리엇은 스스로를 영원한 도시가 타락하여 생긴 세속화된 도시의 시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황무지〉의 궁극적인 주제이며, 지속적인 수사학적 전환과 대조적인 문체의 병행으로 주제가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는 초기의 비평가들이 예측했던 대로 훌륭했던 과거와 타락한 현재를 단순히 대조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도덕적 위엄과 도덕적 타락을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인식한 것이다.

원래 800행쯤 되었던 이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제의로 433행으로 줄었다. 〈황무지〉는 엘리엇의 가장 유명한 시이지만 가장 위대한 시는 아니다.

엘리엇은 시인비평가는 불가피하게 '계획적인 비평'(programmatic criticism)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이는 역사적 학문과는 매우 다르게, 시인으로서 시인 자신의 관심사를 표현하는 비평을 말한다. 의식적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이러한 종류의 비평은 시인비평가 자신의 시가 이전 세대의 비평기준이 지배적인 문학적 풍토에서 발표된 경우보다는 더 잘 이해되고 감상될 수 있는 분위기를 창출했다.

엘리엇의 첫 비평집 〈거룩한 숲 The Sacred Wood〉(1920)에 실려 있는 평론 〈전통과 개인의 재능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은 워즈워스의 〈서문 Preface〉만큼 역사상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 엘리엇은 "전통은 반드시 시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 과거에 씌어진 작품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참신한 것이 반복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호메로스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유럽 문학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영어로 글을 쓰는 시인은 과거의 시대나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여러 언어로 인용하고, 다른 시인의 문체를 심각하게 패러디했던 개혁적인 참신성을 독자에게 수용시킨다는 점에서 '계획적'이다. 또한 〈거룩한 숲〉의 〈햄릿과 그의 문제들 Hamlet and His Problems〉에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관계 이론이 설명되어 있다. "예술의 형식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관계', 즉 그 독특한 감정을 나타내도록 관습적으로 정해진 한 무더기의 사물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각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그 외적인 사실들이 주어질 때 감정이 즉시 환기된다."

엘리엇은 그 어구를 산타야나, 미국의 화가이자 작가인 워싱턴 올스턴으로부터 차용해 자신의 일반적인 시이론에 알맞게 적용시켰다. 그것은 단어와 대상과의 대응을 중시함으로써 후기 빅토리아 시대 수사법의 모호성을 수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룩한 숲〉이 출판된 다음해에 처음 발표된 다른 두 평론들은 엘리엇의 비평 기준을 거의 완성시킨 것이다.

이 〈형이상파 시인 The Metaphysical Poets〉·〈앤드루 마블 Andrew Marvell〉은 〈비평선집 1917~32 Selected Essays, 1917~1932〉(1932)에 실려 있다. 이 평론에서 그는 영시의 계급적 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17세기 형이상파 시인들을 최상의 위치에 두고, 18, 19세기 시인들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있다(마블, 형이상파 시인). 엘리엇의 2번째 유명한 어휘인 '감수성의 분열'도 이 비평문에 나와 있는데, 이 말은 존 던과 앤드루 마블 이후 영시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상과 감정의 조화로운 일치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어휘는 비난받기는 했지만 이러한 어휘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더욱이 엘리엇과 파운드의 시는 17세기의 몇몇 시인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 비평의 최초의 단계, 즉 계획적 단계는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 The Use of Poetry and the Use of Criticism〉(1933)이라는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찰스 엘리엇 노턴에 대한 강연으로 마무리짓게 된다.

이보다 얼마 전에 그는 신학과 사회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혔으며, 3권의 짧은 비평집들인 〈램버스절(節) 이후의 명상 Thoughts After Lambeth〉(1931)·〈그리스도교 사회의 사상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1939)·〈문화 정의론 Notes Towards the Definition of Culture〉(1948)은 그결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평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걸작인 〈단테 Dante〉(1929)와 더불어 문학의 기본영역을 신학과 철학으로 확대했다.

즉 어떤 작품이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기준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위대한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것보다 더욱 높은 기준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과 시는 너무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통합된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므로 이들을 따로 떼어 논의하기는 어렵다. 단테에 대한 위대한 평론은 엘리엇이 영국성공회의 고교회파가 된 지 2년 후에 발표되었다(1927). 그해에 그는 또한 영국 국민으로 귀화했다. 개종한 뒤에 쓴 첫 장시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1930)로, 그의 이전 시들과는 전혀 다른 문체로 씌어진 종교적 명상시이다.

사실상 엘리엇의 시들은 모두 그 자신이 쓴 작품들임이 분명하지만 엘리엇은 절대로 같은 주제나 형태의 시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재의 수요일〉은 아직도 시는 자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엄격히 비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에는 호평받지 못했다. 특히 에드먼드 윌슨 같은 비평가가 그러했듯이, 개인의 환멸감을 표현한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후기의 작품활동과 영향

엘리엇의 걸작은 〈4개의 4중주〉이다.

이 작품은 각 〈4중주〉가 모두 완성된 시들이기는 해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1935~41년에 간격을 두고 출간된 이 4편의 시들은 1943년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으로 엘리엇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희곡으로는 1926년 출간되었고 1934년 초연된 〈스위니 아고니스테스 Sweeney Agonistes〉가 엘리엇의 첫 작품이며, 1958년 초연되었고 1959년 출판된 〈원로 정치가 The Elder Stateman〉가 마지막 작품인데, 그의 서정시나 명상시보다 뒤떨어진다.

세속적인 소재를 다룬 극이라도 무의식적으로 종교를 찾던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야 하며, 사실상 모든 극은 자기인식·화합·정화로 향하는 종교적 발전구조를 갖고 있다는 엘리엇의 신념 때문에, 그는 극을 다른 시형들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의 극들은 모두 그가 고안한 무운시이며, 그 의미는 그 운율적 효과와 분리되어서는 이해되지 못한다. 즉 그는 '시극'을 다시 대중무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가족의 재회 The Family Reunion〉(1939)·〈성당의 살인〉은 그리스도교적 비극들로 전자는 복수 비극이며, 후자는 교만의 죄악을 다루고 있다.

다른 극들은 희극인데, 플롯은 그리스의 극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극작품으로 1949년 초연되었고 1950년 출판된 〈칵테일 파티〉를 들수 있는데 이 극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Alcestis〉이다.

엘리엇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은 그가 주로 관심을 쏟은 일에 대한 부수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맡았던 계간 비평지 〈크라이테리언 The Criterion〉(1922~39)은 당시 가장 탁월한 국제적인 비평지였다.

그는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 즉 사무직도 수행하는 편집인으로서 1920년대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했다. 엘리엇의 사후에 출간된 비평집 〈비평가에 대한 비평 외(外) To Criticize the Critic, and Other Writings〉(1965)에는 매우 중요한 2편의 평론이 수록되어 있다.

〈비평가에 대한 비평〉은 평론으로, 자신의 문학비평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평가이다. 〈미국 문학과 미국어 American Literature and the American Language〉는 미국 영어가 독립된 언어라는 국수주의적인 통념을 다루고 있으며, 그와 같은 확신으로 영국문학과 미국문학이 하나의 문학에서 생겨난 것임을 논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이 존슨 시대라고 불리고 있듯, 20세기 전반은 아마도 역사가들에게 '엘리엇의 시대'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은 신고전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활동하면서 그 시대를 요약했지만, 엘리엇은 비평가 겸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창조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사생활을 가능한 한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고, 1933년 이후 그녀가 정신질환에 걸리자 그들은 별거했으며, 그녀는 1947년 죽었다. 1957년 1월 그는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