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티우스

보이티우스

다른 표기 언어 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동의어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세베리누스 보이티우스, 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요약 테이블
출생 470/475(?)
사망 524
국적 로마

요약 신학에 관한 글과 전원시도 썼으며 그리스 논리학과 수학 서적을 라틴어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 〈철학의 위안〉은 지혜를 추구하고 신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행복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적 저서이다. 보이티우스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든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해 되살리는 것"이 학자로서의 그의 목표였다. 보이티우스의 집념어린 지적 활동은 고대 그리스 고전을 남기는 데 기여하여, 전혀 다른 시대인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그가 쓴 유명한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은 지혜를 추구하고 신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행복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적 저서이다.

그의 전기 중에서 가장 간결하고 오래된 것은 원로원 동료였던 카시오도루스가 쓴 것이다.

여기서 보이티우스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왕을 찬양하는 뛰어난 연설을 한 웅변가로 묘사된다. 카시오도루스는 보이티우스가 신학에 관한 글과 전원시도 썼으며 그리스 논리학과 수학 서적을 라틴어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고 쓰고 있다. 보이티우스의 저서인 〈철학의 위안〉을 비롯한 고대 문헌에는 좀더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그는 로마의 오래된 명문인 아니키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올리브리우스 황제를 배출한 이 가문은 그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부터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487년에 콘술(집정관)이 되었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보이티우스는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멤미우스 심마쿠스의 집에서 자라다가 그의 딸인 루스티키아나와 결혼했으며,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왕이 이탈리아 황제 자리를 빼앗은 뒤인 510년에 콘술이 되었다.

보이티우스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것은 분명하다.

수학과 음악에 관한 초기 저서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 저서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았던 수학자 게라사의 니코마코스가 그리스어로 쓴 입문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보이티우스의 기하학 저서와 천문학 저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주석이 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과 "주석이 붙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플라톤의 모든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해 되살리는 것"이 학자로서의 그의 목표였다.

키케로를 본받아 헬레니즘에 몰두했는데, 그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Organon〉(논리학에 관한 6권의 책)과 그에 따르는 그리스어 주석을 번역하는 힘겨운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510년 이전에 이미 포르피리오스가 3세기에 그리스어로 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입문서인 〈이사고게 Isagogé〉를 번역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이중으로 주석을 달았다. 이어서 콘술로 일하던 511년에 〈범주 Katégoriai〉를 번역하고 그에 대한 해설서를 썼으며, 6권으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가운데 2번째 저서인 〈해석에 관하여 Peri hermeneias〉를 번역하고 2권의 해설서를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 Analytika Protera〉에 주석을 붙인 짤막한 고대의 해설서 역시 보이티우스의 저서인 듯하다. 그는 삼단논법에 대해서도 2권의 짧은 저서를 썼다.

520년경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인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본질을 다룬 4편의 서간체 논문을 썼다. 이 짧은 논문들은 기본적으로 아리우스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적 주장을 내세운 데서 비롯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이용해, 신의 단일성을 실체개념으로 기술하고 성부·성자·성령의 3위를 관계개념으로 설명했다(아리스토텔레스주의). 또한 '실체'와 '본질' 및 '위격'(位格)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이용해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신으로 규정한 전통적 해석에서 비롯된 모순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이런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 저술은 이따금 의혹의 눈길을 받았다.

왜냐하면 논리학 저서와 후기에 쓴 〈철학의 위안〉에는 그리스도교적 특징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시오도루스가 쓴 전기가 19세기에 발견됨으로써, 보이티우스의 철학이 비그리스도교적 근원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는 분명 그리스도교 저술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아리우스주의).

520년경 테오도리쿠스 왕 밑에서 모든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최고행정·사법관인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이 되었다.

그리고 2명의 아들은 522년 콘술이 되었다. 그러나 보이티우스는 나중에 테오도리쿠스의 총애를 잃었다. 〈철학의 위안〉에는 그의 몰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남아 있지만, 실제로 그가 무엇 때문에 비난을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이티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은 520년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의 분열을 해결한 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던 것 같다.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였지만, 유스티누스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티우스는 "유스티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테오도리쿠스의 통치를 비난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기소된 원로원 의원 알비누스를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러자 보이티우스도 반역혐의를 받았고 마술을 부려서 신성모독 행위를 저질렀다는 고발까지 겹쳐 죄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 죄로 고발당한 사람은 결백을 입증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원로원은 강요에 못 이겨 이 판결을 승인했던 것 같다. 감옥에서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대표작인 〈철학의 위안〉을 썼다.

〈철학의 위안〉은 보이티우스의 저서 중 가장 개인적인 것이며 그의 철학 연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용구를 바람직하게 변형한 표현방식은 중세 스콜라 철학 용어의 바탕이 되었으며, 18세기 영국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에 의해 "플라톤이나 키케로를 읽는 틈틈이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철학의 위안〉에 나타난 논변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적이다. 여성으로 의인화한 철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죄수 보이티우스는 '선'이라는 플라톤적 개념으로 개종하게 되고, 자신에게 내려진 강제추방 명령은 분명 부당하지만 이 우주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다스리고 관리하는 '최고의 선'(summum bonum)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행운과 불행은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그 '신의 섭리'에 지배되는 것이기에 '악'의 존재는 배제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신의 질서와 예지를 전혀 방해하지 못한다. 미덕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든간에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 죄수는 결국 죽은 뒤에 보상과 보답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얻는다.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쓴 이 5권의 책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교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눈에 띄게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에는 분명 플라톤주의자의 신조가 담겨 있다.

라틴어 번역 성서인 불가타 성서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철학의 위안〉은 플라톤주의의 주요가르침을 중세에 전달했다. 오늘날의 독자는 이 책의 고리타분한 논법에서 쉽사리 위안을 얻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이티우스가 인간이 알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다른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강조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 외에 다른 차원이 존재할 가능성을 강조한 데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보이티우스는 파비아에 감금되었다가 524년에 처형당한 듯하다.

그의 유해는 파비아의 치엘도로에 있는 성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단테는 이 유해에 대해 순교자에게나 어울리는 존경심과 인상적인 인사말을 바쳤는데, 이것은 같은 이름을 가진 노리쿰의 성 세베리누스와 보이티우스를 혼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시오도루스는 캄파니아의 비바리움에 수도원을 세운 뒤 로마식 도서관을 설치하고 수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주석을 달아 작성한 독서목록에 보이티우스가 쓴 교양서적을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고대 귀족계급의 문학적 성향이 얼마간 수도원 전통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논리학은 중세 성직자 교육과정과 수도원 학교 및 궁정 학교의 과목 중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번역서와 해설서, 특히 〈범주〉와 〈해석에 대하여〉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기본 교재가 되었다. 포르피리오스에 관한 해설서에 나오는 한 대목은 보편적인 존재를 부인하는 유명론(唯名論)과 보편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실재론(實在論) 사이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철학의 위안〉은 유럽 각 나라에서 뛰어난 모국어 문학이 싹튼 초기에 번역되었다. 앨프레드 왕(9세기)과 초서(14세기)는 영어, 장 드 묑(13세기 시인)은 프랑스어, 노트커 라베오(11세기경의 수사)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13세기에는 플라누데스가 비잔틴판을 출판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16세기에 영국판을 출판했다. 변화와 재난의 시대에 이루어진 보이티우스의 집념어린 지적 활동은 전혀 다른 시대인 후세에 영향을 주었고, 고대 그리스의 미묘하고도 정확한 용어법이 그리스어 자체를 거의 몰랐던 라틴 시대에서 살아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