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

다른 표기 언어 Arianism

요약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는 하느님일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아리우스주의는 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황제들에 의해 지원을 받거나 박해를 받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면서도 그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유니테리언파도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론도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聖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는 하느님일 수 없다고 했다(그리스도 양성론). 그러므로 성자는 무(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로 본다.

게다가 성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한 사람들, 특히 주교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고 성자에 대한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다신론(polytheism)을 다시 도입했으며, 참된 하느님인 성자만이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고 논박했다.

이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325)가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를 정죄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조를 공포함으로써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니케아 신경). 이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homoousion tō Patri)라고 진술하며, 이로써 성자가 성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완전한 신이라고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일 뿐이었다(호무시오스). 325년부터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337년까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축출되었던 아리우스주의 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며 과거에 일했던 교회와 교구로 돌아와 그들의 적들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성공했다. 337~350년 정통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호의적이던 콘스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341)는 '호모우시온'(homoousion)을 삭제한 신앙 진술을 공포했다(안티오키아 공의회). 342년에 사르디카(지금의 소피아)에서 또다른 공의회가 열렸지만, 두 공의회는 소득 없이 끝났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자 그의 지배하에 니케아파(정통 그리스도교도들)는 널리 박해를 받았다.

그때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anomoios)고 선언했다. 이 '아노모이오스'주의자들은 357년 시르미움에서 자기들의 견해를 승인받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성자가 성부와 '비슷한 본질'(homoiousios)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온건론자들을 자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처음에는 이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성자가 성부와 '같다'(homoios)고 주장한 아카키우스가 이끄는 '호모이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36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그들의 입장을 승인하여 기존의 모든 신조를 배척했고, '우시아'(ousia:본질 또는 물질)라는 용어를 거부했으며, 성자는 '그를 낳은 성부와 같다'고 하는 신앙 진술을 공포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361) 후 서로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정통 그리스도교는 그 입장을 강화했다. 동로마(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364~378 재위)가 정통파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했지만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가르침이 널리 퍼진 뒤에 동로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니케아파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라티아누스(367~383 재위)와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 같은 황제들이 정통파 견해를 옹호하자 아리우스주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했고 니케아 신경을 승인했다(니케아 신경). 이로써 제국 안에서 이단설은 뿌리뽑혔지만, 아리우스주의는 7세기말까지 일부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계속 존속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유니테리언파가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락시키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론도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들은 아리우스를 '여호와의 증인' 운동을 시작한 찰스 타즈 러셀의 선구자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