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오스

아타나시오스

다른 표기 언어 Saint Athanasius
요약 테이블
출생 293경, 알렉산드리아
사망 373. 5. 2, 알렉산드리아
국적 이집트

요약 4세기에 성자는 성부 하느님과 유사한 본질을 지닌 피조물이지 동일한 본질을 지닌 피조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단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옹호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았다. 325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고, 328년 알렉산데르가 죽자 그를 계승했다. 주교가 된 후 황제주의자 및 아리우스파 성직자들과 맞서기 시작하여 생애 대부분을 그 투쟁으로 보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멜레티우스주의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추방당하고 주교직을 빼앗겼다. 이후 주교직의 복권과 박탈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긴 유배생활 동안 방대한 신학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반박하는 4편의 연설〉을 완성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교리를 확립하고자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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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와 주요저서
  3. 그밖의 저서들
아타나시오스(Saint Athanasius)
아타나시오스(Saint Athanasius)

개요

4세기에 성자는 성부 하느님과 유사한 본질을 지닌 피조물이지 동일한 본질을 지닌 피조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단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앞장서서 변호했다.

주요저서로는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 The Life of St. Antony〉·〈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4편의 연설 Four Orations Against the Arians〉이 있다.

생애와 주요저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신학자이자 금욕주의자로 인정받아 328년 알렉산데르가 죽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를 계승했다. 주교가 된 후 처음 몇 년 동안은 이집트와 리비아의 모든 지역을 포함한 자신의 광범위한 총대교구를 두루 방문하는 데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상(上)이집트의 콥트 수사들과 그들의 지도자 파코미오스와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그 직후 황제주의자들 및 아리우스파 성직자들과 투쟁하기 시작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그 투쟁으로 보냈다.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멜레티우스파와 대결했다. 멜레티우스파는 교회에서 이탈해 나간 리코폴리스의 주교 멜레티우스의 추종자들로서, 니케아 공의회가 마련한 교회와의 재결합안을 일축한 바 있다. 한때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멜레티우스주의자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데 대해 그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두 파에 속한 주교들이 335년 띠로(지금의 레바논에 있음)에서 정통신앙에 반대하는 모임을 열자 그것을 교회 공의회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336년 이 두 분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만난 뒤 아타나시오스는 이집트로부터 곡물 공급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한 죄로 고소당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정식 재판도 열지 않은 채 그를 라인란트로 추방했다.

337년 황제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왔으나, 338년 황제의 아들인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우스에게 다시 추방당한 뒤 로마로 가서 콘스탄티우스의 형제인 서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스의 보호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주교직에는 아리우스파 주교인 그레고리우스가 임명되었으나, 아타나시오스는 부활절 날짜를 공포하는 〈축일 서신 Festal Letters〉을 통해서 교구민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교황 율리오 1세는 그를 옹호하는 편지를 썼으나 효과가 없었고, 343년에 소집한 전세계 교회의 공의회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서방과 이집트 주교들만 사르디카(지금의 불가리아 소피아)에 모여 동방교회에 그의 복권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346년 콘스탄스의 영향력에 힘입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 아타나시오스는 대중의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평화와 번영의 '황금기'를 보냈으며, 이 동안 유배와 귀환에 관련된 문서들을 모아 〈아리우스주의 반박론 Apology Against the Arians〉을 펴냈다. 그러나 350년 콘스탄스가 죽고 잇따라 내전이 발생한 뒤 유일한 황제로 남은 콘스탄티우스는 친아리우스주의 정책을 다시 펴기 시작했다. 아타나시오스에 대한 정치적인 고소가 있은 뒤 추방령이 다시 내려졌고, 356년에는 철야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 그를 체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타나시오스는 이번에는 상(上)이집트로 피하여 수도원들과 그의 편에 선 가정들에서 보호받았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방대한 신학저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반박하는 4편의 연설〉을 완성했고,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는 변명 Apology to Cons-tantius〉·〈도피에 대한 변명 Apology for His Flight〉을 써서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황제가 기존의 정책을 고집하고 새로 부임한 아리우스파 주교 게오르기우스의 주도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박해가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좀더 과격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역사 History of the Arians〉를 써서 콘스탄티우스를 적그리스도의 전조로 간주했다.

361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게오르기우스가 살해당하고 곧이어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아타나시오스는 다시 교구로 돌아온 뒤,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사용하는 용어는 다르나 신앙내용은 동일한 사람들의 연합을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한 본질 안의 세 위격')에 관한 정통교리를 확립하기 위한 길이 준비되었는데, 이 교리는 아타나시오스가 이제까지 강조한 것보다 신격 내의 구별을 더욱 강조했다. 새로 황제가 된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아타나시오스에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라고 명령하자 아타나시오스는 배를 타고 다시 상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가서 363년 율리아누스가 죽을 때까지 유배생활을 했다.

365년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한 황제 발렌스는 다시 한번 그에게 유배를 명령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던 아타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 당국이 황제를 찾아가서 명령을 재고하라고 설득하는 몇 개월 동안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나가 지냈을 뿐이다(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 그후 373년에 죽기 전까지 마지막 몇 년을 평화롭게 지냈다.

그밖의 저서들

두 부분으로 구성된 변증서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Against the Heathen〉·〈하느님의 말씀의 성육신 The Incarnation of the Word of God〉은 335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발전된 그리스 정교회 신학을 보여주는 최초의 위대한 고전이다.

아타나시오스의 신학체계는 하느님이 영원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고, 영원한 말씀인 성자는 이전에 떨어져 나갔던 사람들을 다시 조화의 상태로 이끌어가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들어왔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타나시오스는 성자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아리우스주의를 단호하게 비판했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성자를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갖는 존재로 규정한 것을 환영했다.

아타나시오스의 다른 주요저서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 쓴 〈(사라피온에게 보내는) 편지 The Letters (to Sarapion)〉·〈성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있으며, 이 책들은 곧 라틴어로 번역되어 동방과 서방 교회에 금욕주의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설교와 주석은 단편들로만 남아 있으나, 비교적 짧은 신학논문들과 교회 행정 및 목회 문제를 주로 다룬 많은 편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변호하는 훗날의 논쟁을 예견한 에픽테토스(코린토스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와, 어떤 수사에게 사막을 떠나 교구에서 적극적으로 일하라고 훈계한 드라콘티오스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정확한 사고, 자신의 확신을 변호하는 데 쏟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교회의 자유, 특정한 한계 내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폭넓은 이해 등으로 교회의 교사와 지도자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으며, 애국자로서 이집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