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리쿠스

테오도리쿠스

다른 표기 언어 Theodoricus
요약 테이블
출생 454경
사망 526. 8. 30, 라벤나
국적 이탈리아

요약 동고트족의 왕(471~).
(독). Theoderich. (영). Theodoric. (이). Teodorico. 별칭은 테오도리쿠스 대왕.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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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이탈리아 통치

개요

488년에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493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시칠리아를 사실상 정복한 뒤, 이탈리아의 왕(493~526)이 되어 라벤나에 수도를 세웠다.

그는 독일과 아이슬란드의 전설에 나오는 디트리히 폰 베른의 원형이다.

초기생애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족의 족장 테오데미르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로마 교육을 받으며 자라는 이점을 어느 정도 누렸지만, 끝내 문자를 깨우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과장된 이야기로, 그가 문맹자였다는 말은 5, 6세기에 통치자들에게 교양으로 요구되었던 필기법을 끝내 익히지 못했을 뿐이었음을 뜻한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동고트족은 훈족 제국의 가혹한 압제로부터 벗어난 직후였다. 훈족은 그들을 우크라이나의 고향 땅에서 판노니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해마다 곡식을 강탈했다.

테오도리쿠스가 태어난 지 30년 뒤에도 동고트족의 주요목표는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판노니아 북부에서 다른 게르만족과 끊임없이 싸웠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협력하거나 저항했으며, 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을 때도 있고 거부당할 때도 있었다. 471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동고트족의 족장이 된 테오도리쿠스는 곧 백성들을 하(下)모이시아(지금의 불가리아 일부 지방)의 새로운 고장으로 이끌고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가 이끄는 또다른 동고트족 집단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노 황제는 그에게 귀족 칭호와 군대 지휘관 자리를 주고, 484년에는 그를 콘술(집정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테오도리쿠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헛수고를 하면서 번번이 제국 영토를 약탈하고 사실상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했다. 488년에 제노 황제는 테오도리쿠스에게 이탈리아로 출병하여 이민족 지배자 오도아케르를 타도하고 동로마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테오도리쿠스는 1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고트족을 이끌고 489년 8월말경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듬해에 그는 3차례의 격전에서 오도아케르를 무찔러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통치

테오도리쿠스가 독립된 왕으로 이탈리아를 다스렸는지 아니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 제국 황제의 신하로 이탈리아를 다스렸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는 명목상 동로마 제국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에 사는 로마인과 이민족의 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합법적인 콘술을 임명할 수 없었고, 고트족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주지 못했으며, 고트족을 로마의 공무원이나 원로원 의원에 임명할 수도 없었다. 고트족은 로마인과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도 없었다. 통치 초기에 테오도리쿠스는 게르만족 통치자들이 평소에 입는 모피를 벗어던지고, 옥좌 주위를 비잔틴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또한 황제들이 입는 자줏빛 옷을 입었다. 테오도리쿠스가 다스린 33년 동안 이탈리아는 평화를 유지했다. 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정착했고,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남부 지방은 고트족의 침범을 받지 않았다. 고트족의 일부는 달마치야와 판노니아 같은 동고트족의 해외 영토에서 살았다. 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6세기 중엽의 고트어는 구어인 동시에 문어였고, 세속적인 일과 종교적인 일에 모두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트족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아니라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였고, 4세기에 고트족의 주교였던 이단자 울필라스의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교의 장벽도 고트족과 로마인을 갈라놓았다.

6세기초에 테오도리쿠스는 154개의 규정과 조례를 모은 〈칙령집 Edict〉을 발표했다.

한 두 가지 예외는 있지만, 여기에 실린 규정과 조례는 새로운 법령이 아니라 기존의 로마 법을 쉽고 간략하게 고친 것이었다. 〈칙령집〉은 재판관의 편의를 위해 발간된 안내서로서, 왕이 생각하기에 법정에 가장 자주 제기됨직한 사례들을 다루었다. 〈칙령집〉에 실린 규정들은 로마인뿐만 아니라 고트족에게도 적용되었다.

테오도리쿠스의 주요통치목표는 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고트족은 로마인을 억압해서는 안 되며, 로마인의 재물을 강탈하거나 농작물을 약탈해서도 안 되고, 로마인들과 우호적으로 평화롭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 그가 임명장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서 특히 강조한 점이었다. 그는 전사들에게 품위 있게 처신하라는 고매한 호소를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평온하게 살면 너희들한테도 이롭다. 로마인들이 우리 금고를 가득 채워주면, 너희들의 연금도 늘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저자세로 지적하기까지 했다.

사실 로마인에 대한 고트족 사병들의 증오심은 연거푸 표면화되었고, 이를 억제하기 위해 왕은 로마인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온갖 구실을 생각해내어 고트족에게 호소했다. 그는 틈만 있으면 '키빌리타스'('문화생활' 또는 '문명')라는 개념을 선전했는데, 이 개념에는 평화와 질서의 유지, 민족 사이의 화합, 그리고 억압과 폭력의 금지 같은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한 공문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야만적인 것은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악한 자긍심과 그것을 조장하는 자를 증오한다. 우리의 독실한 믿음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를 저주한다.

법정에서는 폭력이 아니라 정의가 이기게 하자."

테오도리쿠스의 통치 말년은 로마인 학자 보이티우스를 죽인 수치스러운 일로 얼룩졌다. 왕은 나중에 이 일을 후회했다. 테오도리쿠스는 526년 8월에 죽었으며, 라벤나에 있는 무덤에 묻혔다. 이 웅장한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딸 아말라순타의 아들인 아탈라리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