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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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어떤 것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법에 대한 체계적 연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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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의 기술
  2. 발전과 도시혁명
  3. 그리스 로마 시대의 기술
  4. 중세의 기술
  5. 서양기술의 출현
  6.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
  7. 20세기의 기술
  8. 기술에 대한 인식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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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계장치가 신석기시대에 등장한 이래, 도기제조용 돌림판과 바퀴가 만들어졌고, 이후 쟁기·돌낫·맷돌 등이 제작되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관개술이,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제련술이 두드러진 기술이었다.

중세 중국에서는 황허 강[黃河]의 범람으로 수리학이 발전해왔고, 철·놋쇠·종이·도자기 등도 일찍부터 출현했다. 서양에서는 수력·풍력과 같은 자연력을 이용하게 되었다. 18세기초에는 증기기관이 제작되어 철도시대가 열렸고, 1884년에는 증기 터빈이 발명되어 고속기관이 제작되었다. 또한 토머스 에디슨에 의해 전기 분야가 개척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도시가스 공급이 시작되었고, X선이 사용됨으로써 정교한 수술이 가능해졌으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 핵물리학은 학문적 연구 부문에서 주요기술로 변모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는 급속히 발전했다.

20세기 이후의 혁명적 기술 발전은 컴퓨터로 인해 가능해졌다.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소련에서 발사되었고, 1980년대에는 고밀도 집적회로를 내장한 컴퓨터가 출현했다.

고대의 기술

어떤 동물들은 간혹 막대기나 돌과 같은 자연도구를 사용한다. 원시인들 역시 수십만 년 동안 이러한 동물들과 같은 행위를 하고 나서야 고유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비로소 본격적으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대략 1만 5,000~2만 년 전에 몇몇 인간공동체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신석기시대에는 동물을 사육하거나 경작을 시작하여 비교적 정착된 생활을 했으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돌을 정교하게 변형시켜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부싯돌·사암·화산암을 이용하여 절삭면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이러한 도구들을 손으로 직접 잡고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도구를 자루에 고정시켜 사용했고, 이에 따라 여러 기능을 지닌 도구와 무기들이 속출하였다.

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인간은 불을 통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2개의 마른 나무 표면을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기도 했다. 불은 들짐승을 막는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다. 또 기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남부 프랑스 지역과 북부 스페인 지역의 벽화에는 활과 화살이 뚜렷이 그려져 있다. 초기 사냥꾼들의 재간은 이들의 새총·부메랑(현존하는 예로 주목할 만한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부메랑임)·바람총(blow gun)·덫·그물에서도 보여진다.

회전운동을 응용한 최초의 기계장치들도 신석기시대에 등장했다. 발로 차서 작동시키는 도기제조용 돌림판과 초기 수송수단인 바퀴는 모두 한 방향으로 연속적인 회전운동을 하는 것들이었다. 한편 활에서 유래한 천공선반은 송곳이나 공작품을 처음에는 한 방향으로,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또한 식량생산 방식의 변화로 도구도 점점 세련되어갔다.

구석기시대에는 한 장소에서의 수렵·채집·어로 활동이 집단공동체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게 되면, 단순히 다른 장소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나 BC 3000년경 최초의 쟁기, 돌로 만든 낫, 돌 사이에 곡물을 넣어 빻는 맷돌, 그리고 관개술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발전했다. 신석기시대에는 곡식을 갈거나 점토를 굽고 실을 내거나 옷감을 짜는 기술이 응용되면서 염색·발효·증류 등에 해당될 만한 최초의 제조업이 출현했다. 또 초기 금속세공인들은 녹기 쉬운 금속(금·은·구리·주석)을 추출하여 세공하는 기법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최초의 전문분야들이 생겨남에 따라 다른 지역들과 공동체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사실 신석기시대 말기에 제조품의 이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인상적인 증거가 있다. 기술이 최초로 발전한 지역들은 모두 생물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따뜻한 기후와 매년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범람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그밖의 지역에서는 기술혁신을 위한 조건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발전된 지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이 이전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발전과 도시혁명

BC 3000~500년경 신석기시대의 농업기술은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것은 다시 금속세공인과 같은 전문화된 장인들의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광석에서 추출한 최초의 물질은 공작석으로 알려진 구리의 탄산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작석은 강력한 화로에서 구리로 쉽게 제련되었다.

혼합된 금속광석의 제련은 합금술의 발명으로 이어져 구리를 다른 금속과 함께 녹여서 청동을 만들어냈다. 청동은 매우 중요한 재료로, 구리와 주석의 혼합비율이 보통 10:1이었다. 강유역에 형성된 중동 고대 문명지역에는 충적토가 많아서 주석이 매우 귀했으며, 이 때문에 중동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주석을 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중동 사람들의 기술적 지식은 지중해 무역로를 따라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동력기술의 발전은 금속세공인과 도공들의 수요에 따른 화로나 가마의 건조에서 볼 수 있다. 또 이 시기에는 선박의 규모와 기능도 향상되었다. 초기 선박은 뱃머리에 돛을 단 작은 배로서 나일 강에서 탁월풍(卓越風)인 순풍만을 타고 배를 띄울 수 있었지만, 이후의 선박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졌고, 중앙에는 4각형의 커다란 돛이 설치되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관개체계는 급수(給水)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매우 복잡한 법전과 숙련된 토지측량술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용두레와 같은 용수장치(湧水裝置)와 한쪽 끝에 평형추를 달고 다른쪽 끝에 물통을 단 균형보, 그리고 증발에 의한 물의 손실을 막을 수 있는 지하수로와 송수로 건설 능력이 관개시설의 성공을 좌우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붙임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움으로써 기존의 거대한 정4각피라미드형 신전의 경사진 벽을 없앴는데, 신전의 전체적인 구조는 꼭대기까지 2~3층 정도 쌓아올린 것이었다.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점토는 지방의 필경사(筆耕士)들이 글을 쓰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집트에는 훌륭한 석재들이 풍부했고, 이는 신전과 가옥 건축에 사용되었다. 또한 건축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구성도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숙련된 석공들이 건축에 종사했지만 나중에는 설계의 정확성에서 드러나듯 수학과 천문학에 능통한 성직자와 건축가들이 담당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기술

그리스 로마 시대의 두드러진 기술적인 요소는 을 제련하는 기술이었다.

이 시기(BC 500~AD 500)에 목탄을 사용한 노(爐)는 철광석을 완전한 철로 제련하지는 못하고 다공질의 작은 공 모양으로 생산했는데, 이 쇠공을 두드려서 펴면 막대 모양의 연철이 만들어졌다.

어떤 대장장이들은 일찍부터 침탄 공정을 고안했는데, 목탄층 사이에서 쇠막대를 다시 달구어 표면이 탄소처리되어 강철을 도금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자들은 펌프, 풍력·수력 기관, 압축공기기관, 그리고 나사깎기기계를 발명했다. 또한 이들은 증기력에 의한 회전장치(aeolipile:'아에올리스의 공'이라고 함)도 고안했는데, 이것은 최초로 성공한 증기 터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회전운동을 널리 이용했다. 이들은 기중기에 사용되는 발로 밟아 돌리는 바퀴, 관개사업에 쓰이는 회전식 용수장치, 그리고 수차를 개발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아치형·볼트형·돔형과 같은 건축양식들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 제국 전체에 걸쳐 세심하게 배치되고 잘 닦여진 대규모 도로망을 건설했으며 그중에는 상당한 길이의 포장도로도 있었다.

중세의 기술

중세(500~1500년경) 유럽의 기술사는 대체로 이전의 성과들을 보존·복구하고 개조한 역사이다.

이 시기의 핵심적인 발명 가운데 몇 가지는 서양과 동양에서 동시에 개발되었다. 그러나 다른 몇 가지 발명들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되었음이 확실하다. 기술 전파에서 이슬람의 중요성은 아랍 문명이 헬레니즘 문명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흡수하고 거기에다 몇 가지 중요한 성과들을 덧붙인 데 있다. 그리고 아랍 문명의 새로운 성과들은 모두 서양에 도입되었다. 인도 아대륙의 고대 힌두교 문화와 불교 문화는 아랍 세계와 오랫동안 긴밀하게 교류해왔다.

인도의 장인들은 금속가공품과 직조기술로 평판이 나 있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수리학(水理學)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농업생산에 중요하기도 했지만 사회적인 피해를 가져오는 황허 강[黃河]의 범람을 억제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철·놋쇠·종이·도자기 등도 일찍부터 출현했다.

이러한 중국 문명은 선비계층으로 이루어진 보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권력집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은 관료주의에 아주 많은 보탬이 되지 않는 한(예를 들어 수리식 기계시계) 새로운 기술들을 배척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기행과 같이 가끔씩 빚어지는 접촉을 계기로 서양 사람들은 중국의 기술적 성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많은 기술을 서양으로 적극 이전하게 되었다.

서양에서 거둔 뛰어난 업적은 동력원의 혁명적 변화였다.

말굽, 푹신한 마구, 채찍이 개발되어 말을 매우 유용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력·풍력과 같은 자연력의 이용이었다. 최초의 물레방아는 기어(gear) 없이 수평으로 설치된 수차가 직접 1쌍의 회전숫돌을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수직으로 설치된 하사식(下射式) 물레방아가 개발되어 가파르지 않은 경작지에서도 수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풍차는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처음으로 출현했는데, 지표수가 부족한 지역이나 지대가 낮아서 강물을 동력원으로 쓰기에 부적당한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서 널리 보급된 최초의 풍차 형태는 기둥 모양이었다. 기둥 풍차에서는 몸체 전체가 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날개가 바람을 맞을 수 있도록 움직였다. 이어서 탑 풍차가 개발되었다. 탑 풍차의 몸체는 고정되어 있었고, 다만 날개가 바람을 향하도록 꼭대기 부분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농업기술로는 소 대신에 좀더 빨리 움직이는 말을 농업에 이용한 것과, 새로운 작물을 도입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기술진보에 힘입어 식량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등장하여 건축에 대한 미적 감각이 크게 향상되었다. 교차 리브 볼트(cross-rib vault),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그리고 새로운 유리 패널(window panel) 등의 이용으로 자연광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들이면서 매우 높은 석조건축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아라비아에서는 '다우'(dhow)라는 돛단배가 개발되었다.

다우의 돛은 전통적인 4각형 돛과 커다란 3각형 돛을 결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비스듬히 바람을 받으며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선미에 설치된 방향타로 선박의 조종성이 향상되었고, 나침반으로 어떤 날씨에도 광활한 바다에서 항해의 상황을 점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개선된 통, 더욱 안전해진 로프, 항해지도, 천측구(天測具:수평선 위에서 태양이나 별의 각도를 측정하는 기구)가 개발되어 모험적인 항해가들이 자신만만하게 바다를 탐험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최초의 대규모 인쇄소를 세웠다는 것은 광범위한 평가를 받는 업적이다.

1500년까지 거의 4만 권에 이르는 책이 유럽의 14개국에서 출판되었는데, 하나의 발명이 이와 같이 막대한 결과를 가져온 적은 거의 없었다(금속활자).

서양기술의 출현

1500~1750년의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는 서양 문명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에는 정교한 기어 열(列)과 액체의 흐름 형태에 대한 도면뿐만 아니라 잠수함·비행기·헬리콥터에 대한 천재적인 설계들도 담겨 있다.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은 르네상스와 함께 진행되었다.

기술은 갈릴레오의 망원경과 같이 항해·지도제작·연구실 실험에 유용한 과학기구를 제공함으로써 과학혁명에 일익을 담당했다. 로버트 보일이나 오토 폰 게리케, 그리고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는 증기력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기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기관은 18세기초 토머스 뉴커먼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던 또다른 분야가 농업이었다. 영국에서 토지를 더욱 집약적이고 경제적으로 경작할 수 있도록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제한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일부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농업기술로는 제스로 툴의 씨뿌리는 기계와 같은 새로운 장치들, 과학적인 가축육종법, 새로운 작물의 품종실험, 윤작 등을 들 수 있다.

바다는 여전히 가장 주요한 교역로였다. 4분의(四分儀:보통 각도 눈금이 새겨진 4분원이 달린 기구로 고도를 측정할 때 씀)를 개량해서 8분의로 바꾸어 거울로 별의 영상을 수평선에 정렬시킬 수 있고, 별의 각도를 보다 정확하게 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8분의는 이후에 현대적인 6분의로 개량되었다.

한편 항해중에 정확한 시간을 기록할 수 있도록 시계가 고안되어 선원들은 선상에서 정오가 될 때 그리니치의 시간이 얼마인지, 또 선박이 그리니치에서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

1750~1900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풍차에서 부채꼴 꼬리부분의 자동조정장치가 개발되자, 풍차를 설치하는 방법이 상당히 개량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증기력이 등장하여 다른 동력원들을 대체했다. 제임스 와트는 분리응축기를 발명하여 1769년 특허를 받았다. 와트는 기관의 매 행정(stroke)에서 실린더를 뜨거운 증기로 데우는 것과 그 실린더를 냉각시키는 두 동작을 분리했고, 실린더를 계속 뜨겁게 하면서 응축기는 계속 차게 유지했다. 그 이후 와트는 매슈 볼튼의 후원으로 기압 펌프 역할밖에 못하던 단동식(single-acting) 기관(단동식 기관은 피스톤이 내려올 때에만 동력을 전달)에서 회전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복동식 기관의 만능 원동기를 발명해냈다.

높은 증기압을 도입했던 리처드 트레비식은 자신의 기관을 수송수단에 응용하여 1804년 처음으로 성공적인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다. 1830년 개통된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철도노선은 철도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뒤 철도는 광대한 지역을 산업사회의 시장으로 개척하면서 급속히 확장되었다.

1884년 찰스 파슨스가 증기 터빈을 발명함으로써 고속기관이 완전히 성공적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 크기가 점차 커지는 일련의 회전자 날개(증기가 팽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에 증기를 통과시키면 증기에너지는 상당히 빠른 원운동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전기발생 과정이었다.

전기와 자기의 본성을 밝혔던 마이클 패러데이는 일련의 실험을 통하여 전류를 기계적으로 발생시키는 방법(이전에는 볼타 전지의 화학반응을 통해서만 전류를 얻을 수 있었음)과 거기서 얻은 전류를 모터에 활용하는 방법을 개척했다.

또한 토머스 에디슨은 새로운 전기사용 분야를 개척했다. 그의 탄소-필라멘트 전등은 당시의 가스 전등과 경쟁하면서 새로운 가정용 조명기구로 이용되었다. 한편 에디슨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뉴저지에 멘로파크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멘로파크는 최초의 산업연구소로 평가된다.

내연기관에 적합한 연료의 발견이라는 중요한 문제는 19세기 중엽 도시가스 공급이 시작됨으로써 해결되었다.

1859년 에티엔 르누아르는 최초의 성공적인 내연기관을 개발했다. 그의 내연기관에서는 실린더 중간지점에서 피스톤이 교대될 때 폭발성 가스와 공기의 혼합물이 전기 불꽃에 의해 점화된다.

니콜라우스 오토는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행정 사이클을 채택했다. 루돌프 디젤은 실린더에서 공기를 고도로 압축시켜 석유를 즉각 점화시킬 수 있는 기관을 고안해냈다. 또한 경(輕)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가장 휘발성이 강한 석유, 즉 폐기물에 불과했던 가솔린이 연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경 내연기관은 고트리프 다임러의 오토바이와 카를 벤츠의 자동차에 최초로 응용되었다.

야금분야에서는 코크스 제련법을 시작으로 연철과 목탄을 용해시킨 도가니강(crucible steel), 그리고 교반(攪拌) 및 압연법의 개발로 이어졌다. 뜨거운 가스를 금속 내부가 아니라 금속 표면을 지나가게 해 연철을 생산하는 방법이 교반 및 압연법인데, 이 경우 불순물을 줄일 수 있었다.

한편 19세기 중엽 베세머법과 지멘스-마르탱법이 도입되어 소량의 주괴(鑄塊 ingot) 대신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레 역시 제니 방적기(spinning jenny:초기의 방적기)로 발전되어 섬유산업의 생산성을 현저히 향상시켰다. 특히 천연 면사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플랜테이션 경제가 융성했고 조면기(繰綿機)가 도입되었다.

최초로 플라스틱과 인조섬유를 생산해냈던 화학산업의 번창과 더불어 의약품의 범위도 넓어졌다.

마취제·방부제가 개선되고 X선이 사용됨으로써 정교한 수술이 가능해졌고, 아스피린과 같은 합성약품이 개발되었다.

영국 철도망에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전신에 이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이용, 메시지를 먼 거리까지 성공적으로 전송했으며,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통신을 개발했다.시카고에서 처음 사용된 철근구조물은 빌딩 건축의 미래를 열었으며, 무엇보다도 싸고 풍부한 재료인 강철과 효율적인 엘리베이터의 채용이 관건이었다.

20세기의 기술

헨리 포드는 일관작업(assembly-line) 생산방식을 채택하여 산업상의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했으며, 그의 T모델 자동차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교통분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라이트 형제의 동력비행기 발명이었다(→ 오빌 라이트, 윌버 라이트).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지속적인 비행과 조종이 가능했다. 이들은 승강타·방향타·날개조작 기술과 같은 비행기 조종장치를 고안했는데, 이 장치들은 보조날개가 도입될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항공산업은 소규모 비행기제작 단계에서 교전국들의 주요산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행기의 뼈대나 껍데기를 금속으로 제작하는 방법이 알려졌고, 단엽(單葉) 비행기가 고안되어 대부분의 복엽 비행기를 대신했다. 또한 왕복 기관은 공기와 연료를 연소실에서 연소·압축시키고, 그결과 분출되는 가스로 추진력을 얻는 가스 터빈으로 대체되었다.

발전(發電) 및 배전(配電)의 일반적인 패턴은 석탄이나 기름 보일러에서 얻은 증기를 이용하는 대규모 발전소로 나아갔다.

초기 도시의 전력원이었던 소규모 직류발전기는 교류발전 장치로 대체되어 보다 높은 점압의 조작이 가능해졌다.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유례없이 전력사용이 늘어나자 발전시설들을 연결해 가변적인 각 지역의 전력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전력원을 가변화하는 거대한 송전계통이 발전했다.

초기 플라스틱은 목재 펄프에서 얻은 셀룰로오스에 포함된 거대분자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도가 크고 화학내성이 강한 가소성 플라스틱(높은 온도에서 포름알데히드와 페놀류가 반응해서 얻어짐)이 개발됨에 따라 복잡한 분자구조에 대한 지식이 증가했으며, 이는 경도와 가소성 같은 독특한 성질을 띠는 중합체(polymer)라는 물질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중합체는 간단한 구조의 분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대분자로서 선형 중합체는 강한 섬유로 되고, 미세하게 형성된 중합체는 페인트의 원료가 되었으며, 거대 중합체는 고체 플라스틱이 되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을 계기로 핵물리학은 이론적 연구에서 주요기술로 변모했다.

핵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속히 발전했다. 1945년의 원자폭탄은 1950년에 보다 강력한 열핵폭탄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에서 개발된 V-2 로켓의 후예들은 핵무기의 사정거리를 수천km로 넓혔고 정밀도도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핵에너지는 또 동력원으로도 응용되었다. 방사성 물질이 방출하는 중성자로 열을 발생시키고, 다시 이 열로 증기를 생성시켜 터빈을 작동시켰던 것이다.

전자공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발전은 열전자관(thermionic valve)의 발명이었다.

열전자관은 고주파수로 진동하는 신호를 한 방향으로 흐르는 단향(單向) 전류로 변환시키는 일종의 정류장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04년 존 앰브로즈 플레밍 경이 2극진공관(diode)을, 1906년에는 리 디 포리스트가 3극진공관(triode)을 개발했다. 영화와 라디오는 20세기 중엽까지 뉴스·선전·상업광고·오락 등을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어서 텔레비전이 매스컴의 보편적인 매체가 되었다.

초기의 컴퓨터는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값도 비싼 기계였다.

열발생이 많고 다루기 어려웠던 컴퓨터의 진공관을 트랜지스터라는 반도체 장치로 대체한 '2세대' 기계는 보다 성능이 뛰어나면서도 소형이고 저렴했다. 또한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다이오드·저항 등을 작은 실리콘칩 위에 조립해놓은 집적회로의 개발로 컴퓨터 산업발전의 돌파구가 열렸다.

고밀도 집적회로는 하나의 집적회로에 수천 개의 트랜지스터 및 관련장치들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결과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했다.

이것은 명령을 해석·실행하는 통제처리 장치로서 휴대용 텔레비전 수상기보다 작은 마이크로컴퓨터의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들 3세대 장치에 이어서 1980년대에는 수백만 개의 부품을 1개의 칩 위에 집적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러한 고밀도 집적회로를 내장한 컴퓨터가 출현했다. 이것은 또 수백만 개의 회로를 연결해 분리된 몇 가지 연산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병렬처리를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컴퓨터에 인공지능과 판단능력·비교능력·학습능력 등을 부과하려는 노력도 기울여지고 있다.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소련에서 발사되었다. 이후 1961년 유리 알렉셰예비치 가가린은 보스토크 우주선을 타고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돌았으며, 1965년에는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가 보스호드 2호를 타고 궤도상에서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또한 우주정거장 살루트 시리즈에서는 우주비행시간을 장기간으로 늘리는 계획을 최초로 시도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머큐리와 제미니 계획에 이어서 아폴로 계획이 진행되었다. 1969년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2명의 우주인이 달표면에 최초로 발을 내디딤으로써 계획은 절정에 이르렀고, 그후 미국 우주선들은 몇 번 더 달에 착륙했다.

또 소련과 미국은 경쟁적으로 수많은 무인 우주탐사선을 여러 행성에 발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과 유럽의 우주국도 핼리 혜성을 조사하기 위해 우주탐사선을 발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궤도탐사를 본격화하기 위해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왕복선을 개발했지만 발사횟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설계 결함으로 인해 1986년 챌린저호가 이륙 직후 폭발하기도 했다.

기술에 대한 인식과 문제점

19세기에 도입된 기술은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자유방임 경제에 부합하고 부의 폭넓은 분배 실현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들렸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간은 결국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고 거꾸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H.G. 웰스는 자신의 초기 소설을 통해 정교하고 예측력있는 기계장치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문명이 진보적 성격을 가졌다는 환상을 포기하게 되었다.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라는 책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1975년에 발표된 〈원자로 안전 연구 Reactor Safety Study〉는 경수로 원자로의 경우 수많은 사상자를 낼 사고의 위험이 극히 적다고 결론지었지만, 이 보고서의 불확실한 수치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있었다. 5년 후에 스리마일 섬 2기에서 심각한 사고가 생겼다.

조작의 실수와 밸브 고장으로 원자로 노심의 냉각수가 유출되어, 노심의 일부가 녹고 나머지 부분은 파괴되었다. 방사능 물질이 외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격납구조물이 그 대부분을 막았지만, 1차 원자로 시스템에서 많은 양의 핵분열 산물이 방출되었던 것이다. 이후의 공통된 권고사항의 주된 요지는 원자로조작 책임진, 발전소관리자, 원자력 조절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다시 한번 인간의 역할이 중요함을 입증한 것이었다.

키예프 북부의 발전소에서 무분별한 실험(갑작스런 원자로 운전 중지 후에 얼마나 오랫동안 증기 터빈이 계속해서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의 결과로 4개 원자로 중 하나가 폭발하여 불길이 번졌다. 이 원자로에서 약 25%의 방사능 오염물질이 빠져나와 버섯구름을 형성했다. 폭발로 31명이 사망했고, 소련과 그밖의 지역에서 수천 명의 암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핵폐기물 처리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이자 기술적인 문제이다(→ 방사성폐기물). 핵폐기물 저장소로는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나 활발하게 진행중인 지진대를 피해야 하고, 깊고 건조하면서 동시에 자연적으로 대수층(帶水層:지하수를 품은 다공질의 침투성 지층)으로부터 차단된 암석층을 선택해야 한다.

심각한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의 또다른 오염원은 신속히 처리할 수 없거나 전혀 처리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다.

생태계는 분해되지 않는 살충제로 인해 큰 타격을 받는데, 분해가 안된 살충제는 누적되기 때문에 먹이사슬의 위쪽에 있는 고등생물일수록 더 많은 피해를 입는다(생태학).

스모그는 직접적으로 인간의 눈이나 폐를 자극한다. 스모그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사에틸납(tetraethyl lead)처럼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오염원도 존재한다. 화석연료가 불에 타면 이산화황과 산화질소들이 생기는데, 이것이 대기권의 수증기와 결합하면 '산성비'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산성비는 해양·삼림·토양의 자원들을 파손시킨다.

이보다 더 간접적인 대기오염의 형태도 있다. 화석 연료가 전세계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1900년 이후로 대기 중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점차적으로 증가해왔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미 식물의 이산화탄소 처리 능력과 바닷물에 의한 이산화탄소 흡수율을 초과할 정도로 한계점에 도달했거나 곧 도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태양의 복사열을 통과시키지만, 반면에 대지가 태양광을 흡수한 후 열로 다시 방출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온실효과'라는 현상을 초래한다. 이 현상이 계속되면 해안범람(극지방의 빙산이 녹고 해수면이 높아져서 해안이 범람하게 됨)이 생길 수 있고, 기후나 식량생산에 큰 변화가 생긴다.

분무기나 냉장고에서 방출되는 프레온 가스의 화학작용 또는 로켓이나 초음속비행기에서 방출되는 오염물질은 오존층을 고갈시키는 주범이다.

오존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해로운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에 오존이 파괴되면 지구상의 생명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예를 들면 작물의 성장에 피해를 주고 사람들 중에는 피부암 환자가 증가하게 된다.이러한 문제들이 적절히 해결된다 할지라도 인구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전세계적인 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구문제가 아주 심각해지기 전에 인구가 안정될 전망은 없다.

급속한 인구증가가 순조로운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인간 환경을 파괴하며, 사회제도에 심각한 장애를 가하고, 야생 동·식물을 더욱 위협하게 될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마땅히 환영할 일이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기술을 악용하는 잘못은 인류가 사용하는 도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성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이나 환경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채 살고 있으며, 이러한 근시안적인 태도는 인류의 자멸을 초래하는 길이 될 것이다.→ 중국기술사, 한국기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