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식

트레비식

다른 표기 언어 Richard Trevithick
요약 테이블
출생 1771. 4. 13, 잉글랜드 콘월 일로건
사망 1833. 4. 22, 켄트 다트퍼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기계공학자·발명가.

그는 고압증기를 동력화했으며, 1803년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다.

1805년에는 고압증기기관으로 압연공장을 작동시키고 바지선을 추진했다. 그의 기술업적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트레비식은 유년기를 콘월의 주석광산지역인 일로건에서 학교를 다니며 보냈다. 이 학교의 교장은 그를 "복종심이 없고 둔하고 고집이 센 아이"로 표현했다. 일생 동안 문맹자로 지냈으나 어려서부터 공학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공학자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그의 타고난 직관력 덕분에, 1790년 19세의 나이로 코니시에 있는 광산의 기사가 되었다.

1797년 그는 뛰어난 공학자 집안의 J. 하비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 중 프랜시스는 런던-노스웨스트철도회사의 기관차 관리인이 되었고 후에 부친에 대한 자서전을 썼다.

콘월에서는 석탄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산경영자들은 광산채광에 소모되는 연료를 수입하는 비용으로 격심한 경영난을 겪었다. 따라서 코니시의 기사들은 증기기관의 효율을 향상시켜야 했다. 그당시 사용되던 기관은 거의 J. 와트가 발명한 저압형 기관이었다.

창의력이 풍부했지만 소심했던 와트는 강력한 증기가 기계장치에 유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레비식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고압증기를 만들어 실린더 내에서 팽창시키는 원리를 이용하면 저압식 기관의 힘에 뒤지지 않는 소형이면서 경량인 기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797년 트레비식은 고정식 기관과 기관차 기관의 실용모형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광산채광용으로 실물크기의 고압기관을 30개 만들었다.

이 기관들은 매우 작아 일반 마차로 코니시의 광산까지 수송할 수 있었다. 그의 기관은 증기를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특징 때문에 그곳에서 '푸퍼 휨'(puffer whim)이라고 했다.

트레비식은 그의 첫번째 증기차를 제작해 180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콘월의 캠본에 있는 언덕까지 운전했다.

다음해 3월 사촌 A. 비비언과 함께 고정형과 기관차용 고압기관으로 역사적인 특허를 획득했다. 1803년 그는 2번째 증기차를 제작해 런던에서 운전했고 사우스 웨일스에 있는 S. 홈프레이의 페니대런 제철소에서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다. 1804년 2월 21일 이 기관은 10t의 철과 70명의 장정을 태우고 목제궤도(木製軌道) 위로 약 16㎞의 거리를 운행했다. 1805년에는 런던 유스턴가 근처의 순환선로에서 '캣치미후캔'(Catch-me-who-can)이라는 3번째 기관차를 선보였으나, 주철제 선로가 그의 기관차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실용계획을 포기했다.

1805년 트레비식은 압연기계와 바지선의 외륜을 구동하는 데 고압기관을 이용했다. 그의 기관은 세계 최초의 증기준설선(1806)의 원동기가 되었고 탈곡기(1812)를 구동시켰다. 이러한 기관들은 향후 개선되지 못한 채 소멸되었다. 트레비식은 보일러와 기관을 하나의 장치로 제작했으나 동시에 코니시형이라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1개의 내부 가스 도관이 설치된 가공된 철제 보일러를 설계했다. 이것은 트레비식이 그 지방의 공학자의 도움으로 완성시킨 유명한 코니시 양수 기관과 함께 사용되었다.

코니시 양수 기관은 와트의 것보다 2배나 경제적이어서 빠른 속도로 대체되었다(코니시 엔진).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인 트레비식은 사업적인 감각이 거의 없었다. 그가 특허를 획득한 철제 탱크형의 기관제작을 위해 1808년 시작한 런던 사업은 동업자의 배신으로 1811년에 파산했다. 3년 후 페루비언의 은광에서 3개의 트레비식의 기관을 주문했고, 그는 안데스의 무한한 광물자원을 꿈꾸며 1816년 남아메리카로 이주했다.

1827년 많은 모험을 겪은 후 무일푼으로 영국으로 되돌아와 다른 공학자들 특히 G. 스티븐슨이 그의 발명품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J. 와트는 내가 고압기관을 실용화시킨 죄로 교수형을 받아 마땅하다 했고, 내가 대중으로부터 받은, 고압기관을 제작한 데 대한 보답도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원리와 장치를 제안하고 완성시켜 조국에 큰 도움이 되는 기계를 제작했다는 사실로부터 가슴 속에서 느끼는 커다란 나만의 기쁨과 자부심에 만족할 것이다". 그는 가난하게 죽었고 무덤에는 묘비 하나 세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