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와트

제임스 와트

다른 표기 언어 James Watt
요약 테이블
출생 1736년 1월 19일, 스코틀랜드 렌프루셔 그리녹
사망 1819년 8월 25일, 워릭 버밍엄 근처 히스필드홀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산업혁명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와트 기관은 제지공장·제분공장·면직공장·제철공장·증류소·운하·급수장 등에서 활용되면서 산업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7살에 수학도구 제작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이후 뉴커먼 증기기관의 모형을 수리하면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와트의 업적은 생존하는 동안 널리 인정받아 1785년 왕립학회 회원, 1806년 그래스고대학교의 법학박사, 181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준회원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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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교육과 훈련
  3. 와트 기관
  4. 후기
와트(James Watt)
와트(James Watt)

개요

제임스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했으며, 그는 1785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과학사).

교육과 훈련

그리녹의 회계사이며 하급판사인 제임스 와트의 아버지는 조선과 건축 사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섬세한 성격을 가진 소년 제임스 와트는 얼마 간 집에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에서 라틴어·그리스어·수학을 배웠다. 와트의 교육에서 중요한 근원이 된 것은 아버지의 작업장이었는데, 그곳에 자신의 공구·작업대·단조로(鍛造爐)를 갖추고 기중기와 배럴오르간과 같은 모형을 만들었고 점차 선박에 친숙해졌다. 17세에 수학도구 제작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먼저 외가친척 중 한 사람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던 글래스고로 갔으며, 1755년에는 런던으로 가 자신을 가르칠 선생을 만났다.

1년 사이에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이때 제임스 와트는 뛰어난 장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그 일을 충분히 습득했다. 글래스고로 돌아온 와트는 1757년 대학에 가게를 열어 사분의(四分儀)·컴퍼스·눈금자 등과 같은 수학도구를 만들었다. 와트는 많은 과학자들을 만났으며, 잠열(고체·액체 같은 물질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열)의 개념을 발전시킨 조지프 블랙과 친구가 되었다.

1764년 사촌인 M. 밀러와 결혼했으나, 9년 뒤 그녀는 6명의 자녀를 남기고 죽었다.

와트 기관

1764년 뉴커먼 증기기관의 모형을 수리하는 동안 이 기관의 증기 낭비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개선하는 문제와 씨름한 뒤 우연히 제임스 와트의 첫번째이자 위대한 발명품인 분리복수기(分離復水器)라는 해답을 발견했다. 와트는 잠열의 손실이 뉴커먼 기관의 최대 단점이므로 실린더와 연결되지만 따로 떨어진 실(室)에서 응축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았다. 그뒤 바로 와트에게 기관을 제작하도록 권한 캐론 공장의 창업자 J. 로벅을 만났다.

1768년 제임스 와트와 동업자가 된 뒤 조지프 블랙의 대부금으로 소형 시험기관을 만들었고, 다음 해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 소비를 줄이는 신개발법'으로 유명한 특허를 얻었다. 그동안 와트는 1766년에 측량사가 되었으며, 그뒤 8년 동안 스코틀랜드에 건설된 운하의 경로 작성에 계속 분주했는데, 이 일은 그가 증기기관을 진척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1772년 로벅이 도산한 이후 버밍엄에서 소호 공장의 제조업자 M. 볼턴이 제임스 와트의 특허권을 획득했다. 측량과 스코틀랜드에 싫증을 느낀 와트는 1774년 버밍엄으로 이주했다.

제임스 와트의 특허권이 의회의 판정에 의해 연장된 뒤, 1775년에는 볼턴과 함께 향후 25년간 지속된 동업관계를 시작했으며, 볼턴의 재정지원으로 기관이 급속히 진척될 수 있었다. 1776년 2대의 기관은 스태퍼드셔 탄광의 양수용과 유명한 제철업자 J. 윌킨슨의 로에 송풍용으로 설치되었다.

그해 제임스 와트는 2번째 아내인 A. 맥그리거와 재혼하여 2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그뒤 1781년까지 5년 동안 콘월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구리와 주석 광산에 많은 펌프 기관을 설치·감독했는데, 그곳의 경영자는 연료비의 절감을 원했다. 사업가가 아니었던 제임스 와트는 새로운 기관에 대한 적당한 사용료를 받기 위해 격심한 교섭을 견뎌내야 했다. 1780년 와트는 재정적으로 무난했지만, 볼턴은 자본축적에 문제가 있었다.

다음해 옥수수·맥아·면직 공장의 새로운 시장을 예견한 볼턴은 제임스 와트에게 기존의 왕복운동을 대치시키는 증기기관의 회전운동을 고안하도록 권유했다. 1781년 기관의 각 사이클마다 축이 2회전하는 이른바 유성 기어 장치를 고안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1782년 와트의 발명 능력이 한창일 때 피스톤이 동시에 밀고 당기는 복동식(複動式) 기관으로 특허를 받았다.

이 기관은 가동보와 피스톤을 단단히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제임스 와트는 이 문제를 1784년 수평운동장치(피스톤 로드를 수직운동으로 안내하는 로드를 결합시킨 장치)의 발명으로 해결했고, 그는 이것을 "내가 발명한 장치 중 가장 천재적이고 간단한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4년 후 볼턴의 제안에 따라 기관의 속도를 자동제어하는 원심조속기의 활용과 1790년 발명한 압력계를 이용해 실제적인 와트 기관을 완성했다.

1774년에 볼턴앤드와트에서 제작한 증기기관의 판화
1774년에 볼턴앤드와트에서 제작한 증기기관의 판화

후기

와트 기관의 수요는 제지공장·제분공장·면직공장·제철공장·증류소·운하·급수장에서 급속히 나타났다.

1790년까지 11년 동안 특허권 사용료로 7만 6,000파운드를 받아 부자가 되었지만 증기기관이 제임스 와트의 모든 관심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와트는 과학과 예술의 진보를 바라는 작가와 과학자들의 모임인 버밍엄의 루너 학회 회원이었다. 와트는 재료의 강도를 실험했고, 그의 소송절차는 특허권 보호와 자주 연루되었다. 1785년에는 볼턴과 함께 런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와트는 래드노셔의 돌다울로드의 토지를 사들여 휴가를 갖기 시작했으며, 1795년부터 사업에서 서서히 은퇴했다.

1800년 제임스 와트는 특허와 동업의 만료이기도 하면서 은퇴가 다가옴에 따라서 1794년에 새로운 와트앤드볼턴사를 설립하는데, 이 회사는 증기기관을 좀더 완벽하게 제작하기 위해 소호 주물공장을 지었다.

이 시기에 제임스 와트의 적자(嫡子)인 제임스가 문제를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의 젊은 동조자인 제임스는 맨체스터 헌법위원회에서 파리의 헌법위원회에 보낸 칙어봉답문을 공개한 것에 대해 의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2년 후 정치적 혐의를 벗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볼턴의 아들인 매슈와 함께 신설회사의 경영권을 인수받았다.

제임스 와트의 오랜 은퇴생활은 서자(庶子)인 그레고리와 많은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우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2년 아미앵의 강화 조약이 조인되자 와트는 아내와 함께 스코틀랜드·프랑스·독일을 여행했고, 그가 작업장으로 만든 자신의 집 다락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그곳에서 친구의 흉상을 재현하는 조각기계를 만들었다. 또한 그래스고워터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와트의 업적은 생존하는 동안 널리 인정받아 1806년 그래스고대학교의 법학박사학위, 181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준회원이 되었고, 준남작이 수여되었지만 이를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