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

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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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3. 7. 30, 미국 미시간 웨인
사망 1947. 4. 7, 디어번
국적 미국

요약 포드는 대량생산방식과 일관작업공정이라는 대대적인 생산혁신을 도입하여 미국의 자동차 산업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을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거대한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1903년 일반 소액주주들과 함께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1908년 T형 포드를 선보였고 이 모델은 그 후 19년 동안 미국, 영국, 캐나다 등지에서 전세계 차량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1913년에 도입한 일관작업공정으로 T형 포드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중산층들도 구매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양과 효율에 기초한 저렴한 판매로 시장구매력을 높여 판매량을 증가시킨다는 포드의 경영철학은 규모의 경제에 기초해 단위생산비용을 낮추고,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생활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잠재적인 구매력을 높임으로써 사회구조 자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포드(Henry Ford)
포드(Henry Ford)

대량생산방식과 일관작업공정이라는 대대적인 생산혁신을 도입하여 미국의 자동차 산업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을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거대한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포드는 디트로이트 근처의 한 농가에서 아일랜드계 이민 2세로 태어났다.

16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디트로이트의 한 기계제작소의 도제로 들어가 3년 동안 내연기관 제조를 배웠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와 웨스팅하우스기관회사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서 농장 한 구석에 작은 기계수리점을 내어 농장기계들을 수리해주거나 낡은 잔디깎이 기구를 농장용 트랙터로 개조해주는 일로 생계비를 벌었다. 8년 뒤 디트로이트로 돌아가 에디슨사의 주임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연구하던 끝에 1896년에는 4륜마차 차체에 가솔린 기관을 장착한 '쿼드리사이클'이라는 자동차를 완성했다.

그후에도 몇 대의 자동차를 더 제작했으나 그때마다 자동차 제작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팔곤 했다. 1899년 몇몇의 후원자들과 함께 디트로이트자동차회사를 설립했으나 의견차가 심해 마침내 1902년에는 회사를 떠났다. 그후 모델 999을 포함하여 몇몇 스포츠카를 제작했다. 1903년 일반 소액주주들과 함께 2만 8,000달러의 자본금으로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1908년 T형 포드를 선보였고 이 모델은 그후 19년 동안 미국·영국·캐나다 등지에서 총 1,700만 대를 판매하여 전세계 차량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1913년에 도입한 일관작업공정으로 T형 포드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으며 그결과 중산층들도 구매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1914년 포드사는 최저임금을 1일 5달러(당시 자동차업계 평균최저임금은 2.34달러임)로 정하고, 기존 1일 9시간 노동을 8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3교대로 공장을 가동한다고 발표했다.

양과 효율에 기초한 저렴한 판매로 시장구매력을 높여 판매량을 증가시킨다는 포드의 경영철학은 규모의 경제에 기초해 단위생산비용을 낮추고,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생활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잠재적인 구매력을 높임으로써 사회구조 자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1920년대초 자동차 생산 관련 전 산업을 수직적으로 통합하여 완전 자립을 목표로 한 리버루지 공장을 건립하기 시작해, 1927년에 완성했다.

규모의 방대함과 전무후무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고한 경영방침과 자만은 시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다른 자동차제조업체가 기어 변속기나 제동기의 혁신 및 도장 색상의 다양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사의 T형 포드는 여전히 단순한 실용성만을 시장경쟁의 무기로 삼았다. 5개월 동안 공장을 재정비한 후 1927년 모델 A를 시장에 선보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독재적인 경영방식으로 곧 제너럴모터스사(GM)의 시보레나 크라이슬러사의 플리머스 등에 추월당했다.

1932년 V-8 엔진을 선보였으나 판매량에서는 업계 3위에 머물렀다. 경영방침의 완고함은 고용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노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포드는 GM사나 크라이슬러사가 연합자동차노동조합과 유니언 숍 및 조합비 일괄 공제문제를 타결지은 후에도 직장 폐쇄 등으로 대치하다가 결국 1941년 동의서명했다. 1918년 우드로 윌슨의 후원으로 미시간 주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방했으며, 한때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새뮤얼 크로서와 함께 공동집필한 〈나의 생애와 일 My Life and Work〉(1922)·〈오늘과 내일 Today and Tomorrow〉(192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