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조지 웰스

허버트 조지 웰스

다른 표기 언어 Herbert George Wells
요약 테이블
출생 1866. 9. 21, 잉글랜드 켄트 브럼리
사망 1946. 8. 13,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웰스는 <타임머신>(1895),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같은 공상과학소설과 대중을 위한 역사서 <세계문화사 대계>(1920, 개정판 1931)로 이름을 떨쳤다.
조그만 시골학교의 교생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학위를 따지는 못했지만, 3년간의 학창시절은 그의 작가적 상상력에 낭만적인 과학개념을 새겨놓았으며, 훗날 소설을 쓰는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895년 <타임머신> 발표와 함께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사이에 〈우주전쟁〉을 비롯한 공상과학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문명비평에 대한 관심으로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질서의 불안정함을 일깨우는 활동을 시작했고, 1930년대 내내 문명이 파괴될 수 있을법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격동의 현장에 있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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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페이비언 협회의 참여
  4. 세계평화 운동
웰스 (Herbert George Wells)
웰스 (Herbert George Wells)

개요

특히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1895)·〈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1897)·〈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1898) 같은 공상과학소설과 대중을 위한 역사서 〈세계문화사 대계 The Outline of History〉(1920, 개정판 1931)로 이름을 떨쳤다.

초기생애

웰스의 부모는 남의 집 하인으로 일하다가 독립해 작은 상점을 운영했다.

14세 때 포목상의 도제로 들어갔으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두고 17세 때 조그만 시골학교의 교생이 되었다. 이곳에서 마침내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결과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학위를 따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보낸 3년은 웰스의 작가적 상상력에 낭만적인 과학개념을 새겨놓았고, 이것은 훗날 그가 장편소설을 쓸 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교사자격증을 따지 못한 그는 학교를 옮겨다니며 보수가 가장 낮은 일자리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교외에서 학위를 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무렵에는 몸무게가 90파운드(40.8㎏)도 채 안 될 정도로 몸이 여위었고, 이미 몇 년 전부터 결핵을 앓아온 상태였다. 그러나 은근히 뻐기는 듯한 태도와 유머는 런던 사투리와 왜소한 체구가 주는 인상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급우들은 그가 뛰어난 작가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처음 시도한 장편소설은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역시 하층계급 출신인 사촌 이자벨과 결혼했는데, 결혼생활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따분했다.

출혈 증세가 나타나 생명에 위협을 느낀 웰스는 요절하기 전에 작가가 되려는 마지막 시도를 해보고, 또 이상적인 상대와 성적(性的)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르고 싶은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교사라는 따분한 직업과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나중에 2번째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게 되는 제자와 함께 도망쳐 자유기고가로 나섰다. 두 가정을 먹여살려야 하는 처지라 절박해진 그는 모방을 버리고 독창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곧 성공적인 저널리스트 겸 단편작가, 생기있고 해학적인 문체의 소유자, 과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소설로 다룬 대표적 작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도망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내놓은 〈타임 머신〉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몇 년 사이에 가장 유명한 작품 〈우주전쟁〉을 비롯한 공상과학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얼마 뒤에는 저널리스트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소설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맑은 공기와 적당한 운동 및 돈 걱정에 대한 해방으로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제 그의 소설에는 자기와 대등한 지성을 갖춘 아름답고 정열적인 여성을 만나고 싶어하는 바람이 담기기 시작했다. 영혼의 동반자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는 〈바다의 귀부인 The Sea-Lady〉(1902) 속에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채터리스는 성공에 눈이 멀어 과욕을 부리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다.

페이비언 협회의 참여

그가 처음으로 예언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예상(豫想) Anticipations〉(1901)이 성공을 거두자, 런던의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가 웰스에게 가입을 권유해왔다.

그는 즉시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는 페이비언 협회 회원들과 어정쩡한 시간을 보낸 뒤 조지 버나드 , 시드니, 비어트리스 웨브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신랄한 언쟁을 가속화시켰다.

그는 과감하게 성적 자유를 부르짖음으로써 젊은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이론만 앞세우는 지식인의 집단에 불어넣은 활력, 노동자 계급의 젊은이가 겪은 궁핍과 굴욕을 결코 알지 못하는 배부른 인간들에게 느낀 분노 등의 경험은 모두 에드워드 시대의 사회사에서뿐만 아니라, 웰스의 개인사에서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이고 뜻깊은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페이비언 협회의 후배회원으로서 웰스의 아이를 낳게 된 앰버 리브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서술한 장편소설 〈앤 베로니카 Ann Veronica〉(1909)에 가식 없이 투영되었다.

또한 웨브 부부를 베일리 부부로 희화시킨 〈새로운 마키아벨리 The New Machiavelli〉(1911)에서도 이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1914년 전쟁이 터지면서 웰스는 애정행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인정한 대로 그의 작품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웰스는 영국의 젊은 작가 리베카 웨스트로부터 자신이 찾던 이상형을 발견했으나, 두 지성인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뿐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이 시기에 쓴 〈브리틀링 씨 Mr. Britling〉에서는 그의 해학성이 되살아났으나, 이러한 생기와 더불어 심술궂은 장난기도 고개를 들었다. 웰스가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를 악의적으로 흉내낸 부분이 들어 있는 〈소원 Boon〉(1915)은 웨스트가 제임스에 대한 첫번째 책을 완성할 무렵에 쓴 것으로 〈브리틀링 씨〉보다 몇 달 앞서 출판되었는데, 문단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평화 운동

국제연맹의 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했던 웰스는 정치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하자 이에 분노해, 직접 인류에게 세계질서의 불안정함을 일깨우는 활동을 시작했다.

100만 단어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세계문화사 대계〉는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써낸 것이었다. 그뒤를 이어 〈생명의 과학 The Science of Life〉(1929~30)·〈인류의 노동과 부와 행복 The Work, Wealth and Happiness of Mankind〉(1932) 등을 출판했는데, 2권 모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쓴 것이다.

이로써 가난에 시달리던 교사가 전인류의 교사로 변신했다. 1934년에 펴낸 〈자서전 실험 Experiment in Autobiography〉은 웰스의 지성이 투영된 자기계시의 걸작이다. 1930년대 내내 웰스는 문명을 자멸로 몰아넣고 있는 듯해 보이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격동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국가 자본주의와 사적 자본주의 사이의 위험한 분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스탈린과 루스벨트를 만났다.

또 영국의 소설가 존 골즈워디의 뒤를 이어 국제 펜클럽 회장이 되었다. 인류를 파멸로 몰고가는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공개적인 모의가 필요함을 역설하던 웰스는 80세에 런던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