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포리스트

디 포리스트

다른 표기 언어 Lee De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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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3. 8. 26, 미국 아이오와 카운실블러프스
사망 1961. 6. 30, 할리우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발명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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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오디온 진공관의 발명
  4. 기타 발명

개요

오디온 진공관을 발명하여 라디오 생방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1947년에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까지 모든 라디오, 전화, 레이더, 텔레비전, 컴퓨터 시스템의 주요 부품으로 이용되었다.

생애

그는 미국 의회의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앨라배마로 이주했고 거기서 거의 도산상태에 있던 흑인을 위한 탤러디거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흑인을 교육하려는 노력에 대한 백인 주민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들처럼 마을의 흑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린시절에는 기계에 심취했고 19세기 후반의 기술적인 진보에 대해서 듣는 것을 즐겼다.

13세가 되자 그는 소형 용광로, 기관차, 실용적인 은도금 장비 등을 발명했다.

아버지는 목사가 되기를 바랬으나 그는 과학 공부를 주장하여 1893년 당시에 과학교육에 대한 고급 과정을 제공하던 몇 안되던 기관 중의 하나인 예일대학교 세필드 과학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그는 어려운 생활로 인해 학부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899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전기, 특히 이때 당시 독일의 H.R. 헤르츠와 이탈리아의 G.마르코니가 연구하고 있던 전자기파의 전파에 대해서 특별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평행 전선의 선단에서 발생하는 헤르츠파의 반사〉는 후에 무선통신(radio)이라고 알려진 주제에 대해 다룬 최초의 논문이었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웨스턴전기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발전기부에서 시작하여 전화기부를 거쳐 실험연구소에서 일했다. 퇴근 후에 독자적인 연구를 하여 헤르츠파의 전해질 검출기를 발명했다. 이 기구는 교류송신기로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1902년에 그는 재정적인 후원자와 함께 디 포리스트무선전신회사를 설립했고, 사업, 언론, 군사용으로서 무선전신을 공개적으로 실연하여, 새로운 통신매체의 잠재성을 발휘했다.

오디온 진공관의 발명

디 포리스트는 사업가적인 자질과 인간을 판단하는 능력 부족으로 자신의 동업자로부터 2번이나 사기를 당했으며 1906년에 이르러 그의 회사는 채무 불이행 상태가 되어 파산했다.

하지만 1907년 그는 오디온이라고 불리는 검출기(1906 발명)로 특허를 취득했다. 이것은 무선 신호에 대해 당시에 사용하던 전해질 형태나 카보런덤(Carborundum)형태보다 양호한 감도로 탐지할 수 있었다. 오디온 진공관은 영국의 존 앰브로즈 플레밍 경이 1905년에 특허를 받은 이극진공관과 유사한 구조로 된 열이온 그리드식 삼극진공관이었다.

그해에 디 포리스트는 뉴욕 시에 있는 일반 대중에게 음성과 음악을 실험적으로 방송할 수 있었다(열이온 전력변환기).

2번째의 회사인 디 포리스트무선전화회사는 1909년에 파산하기 시작했다. 1912년 오디온 진공관과 같이 '무용한 기구'의 사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우편을 이용했다는 연방 법원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후에 면제됐다. 1910년 그는 새로운 매체를 더욱 일반화하기 위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있었던 엔리코 카루소의 공연을 생중계했다(방송). 1921년 그는 단순히 하나의 진공관에서 전압을 증가시키는 방법만으로는 할 수 없었던 고주파의 신호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오디온 진공관을 다단계로 사용하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증폭기). 이 방법은 진공관 양극의 출력을 변압기를 이용하여 다음 진공관에 입력하고 두번째 진공관의 출력을 세번째 진공관의 그리드로 입력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초기에 매우 미약했던 신호를 고배율로 증폭되게 했다.

이것은 장거리 유·무선 통신을 위한 필수적인 개발이었다. 1912년에는 삼극진공관의 출력의 일부를 다시 자체의 그리드로 재입력시켜서 회로 내에서 발진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트랜스미터). 이 회로의 신호를 안테나에 입력하면 당시에 일반적으로 채용되던 방법보다 훨씬 높은 출력과 효율로 작동할 수 있다. 이 발명을 적절하게 수정하면 무선 신호의 송신·수신, 증폭이 모두 가능하다.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발명품의 독창성은 과학자와 변리사 등에 의해서 활발하게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사업이나 제작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특허를 주요 통신회사에 낮은 가격으로 팔았다. 오디온 진공관은 이 회사에서 장거리 반복기(repeater)회로의 증폭 부품에서 중요 기구로 사용되었다.

기타 발명

1920년 그는 유성 영화의 기록과 재생이 가능한 실용적인 시스템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포노필름(phono-film)이라고 부르는 음성기록필름식 광학기록시스템을 개발하여 1923~27년에 극장에서 시연을 했다. 이는 원리적으로 옳았으나 동작이 조악하여 영화 제작자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자 영화 산업은 디 포리스트의 시스템과 유사한 음성기록필름을 사용하는 유성영화로 변하게 되었다(녹음, 옵티컬 사운드 레코딩).

1930년대 의료용으로 오디온-다이아서미(Audion-diathermy)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벨전화회사를 위해서 군사적인 연구를 했다.

자신의 발명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 금전적으로 이용한 것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라디오의 아버지', '텔레비젼의 할아버지'로 널리 존경을 받았으며 여러 번 노벨 물리학상을 추천받았다.

그는 생애 동안에 여러 기관에서 일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였으며, 발명품의 대부분을 자유연구가로서 이룩했다. 성격이 까다롭고 비사교적이었으며 우유부단함과 이기심으로 주의의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