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뤼크 고다르

장뤼크 고다르

다른 표기 언어 Jean-Luc Go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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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0. 12. 3, 프랑스 파리
사망 2022. 9. 13, 스위스 보 니옹
국적 프랑스

요약 1950년대말과 196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로 두각을 나타낸 프랑스의 영화감독. 1950년대 말 기존의 영화 문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영상미를 제시한 누벨 바그 사조를 이끌었다. 대표작 <네멋대로 해라>는 누벨 바그란 어떤 사조인지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었다. 말년까지 왕성하게 영화 작업을 진행했으며 2018년에는 칸 국제영화제 특별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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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
  2. 초기 생애
  3. 영화계 활동
  4. 평가
장-뤽 고다르
장-뤽 고다르

정의

프랑스의 영화 감독. 1950~60년대를 풍미한 누벨바그(Nouvelle Vague)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각본없이 촬영한 그의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1960)로 장 비고 상(Prix Jean Vigo)을 수상했다. 서사 중심의 기존 영화의 관행을 해체하여 예측할 수 없는 구성과 장면으로 연출한 새로운 영화 문법을 창안했다.

초기 생애

고다르는 아버지가 진료소 소장으로 있던 스위스의 제네바 호숫가에서 자랐다. 그는 파리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는데 학생전용 카페에서 끝없이 이어진 대화, 댐 공사장에서의 육체노동 등 그 시기의 경험들에서 영감을 얻어 첫 단편영화 〈시멘트 작업(Opération Béton)〉(1954)을 만들었다. 인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다큐멘터리 양식의 영화) 를 제창하고 그 이론을 세운 인류학자 장 루쉬와 관계가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영화계 활동

시네마 베리테 유파에 속한 영화제작자들은 가벼운 텔레비전용 장비를 사용했는데, 이는 형식에서 최대한 벗어나 선입견 없이 대상을 다루고 영화의 주제 및 의도를 촬영이나 편집단계에서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고다르(한스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글을 쓰곤 했음)는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프리츠 랑과 같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감독들처럼 스튜디오 안에서만 제작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1960),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1960),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그의 즉흥적인 영화제작 방식인, '철저한 거리 두기'로 알려진 특징들은 장 비고 상 수상작인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제작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지의 동료 프랑수아 트뤼포가 맡았다. 고다르는 이 작품을 각본 없이 촬영했는데, 밤새 대사의 줄거리를 대강 정해두었다가 리허설 도중이나 사이사이에 고쳐쓰기도 했다.

〈네 멋대로 해라〉는 험프리 보가트를 동경하는 한 좀도둑(종종 스크린에서 고다르의 영화적 자아로 나오는 장 폴 벨몽도가 연기함)의 불운을 자세히 그려낸 영화인데, 결국 그는 미국인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한다. 이 작품에서 좀도둑의 여자친구는 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과연 그를 신고할 수 있을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밀고한다.

이후에 만든 영화에서는 심지어 촬영 도중 카메라 뒤에 서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시점을 드러내기 위해 즉흥적인 기법들을 이용했고, 때로는 기묘한 관념적 표현을 위해 그 2가지 방식을 결합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소설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원작을 영화화한 〈경멸(Le Mépris)〉은 주류 영화제작 방식으로 비교적 경비를 많이 들여 만든 유일한 영화였다. 그 이후로는 경비가 극히 적게 드는 야외촬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국제 예술영화계에서 잇달아 성공을 거두어 독립적인 영화작가로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수년 동안 고다르는 남녀가 모두 갖고 있는 변덕스러움이나 천박함·자유분방함이라는 주제와 타인이나 자신 혹은 이데올로기나 예술이 저지르는 사기행위를 의미심장한 진실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제에 더욱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다르는 몇몇 영화에서 당시 자신의 아내였던 여배우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스핑크스 같은 상으로 보여주어 이와 같은 실존적 이중성을 표현했다.

그중 유명한 작품이 〈작은 병정(Le Petit Soldat)〉(1960)이다. 비극적인 내용을 반어적으로 경박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고문과 그에 대한 보복고문이라는 소재 때문에 수년 동안 상영이 금지되었다. 파리의 한 젊은 매춘부에 대한 연구 보고서라 할 수 있는 〈그것이 내 인생 (Vivre sa vie)〉(1962)에서 고다르는 유아론(唯我論)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을 모방하는 한편 임상용어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 1965),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 1965),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그는〈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1965)로 성공한 뒤 미국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지만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방식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나중에 이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고다르는 삶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의미를 상실했거나 아니면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시각적·언어적 이미지들을 이러한 삶의 조잡한 모조품으로서 제시했고 자신의 폭넓은 교양으로 이 이미지들에 깊이를 더했다. .

그의 영화에는 펼쳐진 책장을 보여주거나 더 나아가 그 책을 읽어주는 장면,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 도로 표지판이나 포스터를 그대로 비춰주는 장면, 그리고 연기자들이 배역에 빠져들지 않고 단순히 각본을 읽는 것처럼 감정 없이 대화하는 장면들이 점점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실제로는 있을 수 없거나 다소 비현실적으로 설정된 장면들을 나란히 배치하여 매체 자체에 대한 인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예컨대 그의 영화 중 2작품에서는 주인공 벨몽도가 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한다. 또한 고다르는 다른 감독의 영화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영화를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작은 병정〉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성(姓)은 고다르가 존경했던 감독 칼 드라이어와 같은 '드라이어'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에서는 여주인공이 드라이어의 영화를 본다. 〈알파빌(Alphaville)〉(1965)에는 프리츠 랑이 감독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6)에서 따온 장면들이 나오는데, 프리츠 랑은〈경멸〉에서 영화감독 역을 맡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다르의 영화들은 지적인 에세이가 되었고, 사실적이거나 꾸며낸 이야기였던 초기 영화들은 그의 영화 속에서 1960년대말의 관념적인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1966년에 만든 두 영화, 즉 미국 사회를 조명한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 S. A.)〉와 파리 사회를 조명한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2~3가지 것들(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을 보면 당시 고다르가 인간관계 및 사회에 대해 극도로 절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인 〈중국 여인(La Chinoise)〉(1967, 이 제목은 파리의 마오쩌둥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임)은 좌익 사상에 대한 그의 점증하는 관심을 암암리에 보여 준다. 그는 또한 1968년에 일어난 파리의 학생봉기와 그 밖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67년에 만든 〈주말(Weekend)〉 역시 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었다.

〈주말〉(Week End, 1967),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주말〉(Week End, 1967),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그 무렵 그는 여배우 안네 비아젬스키와 결혼했으며 허구와 미학에 쏟았던 관심을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등의 마르크시즘에 쏟았다. 〈음유시(Le Gai Savoir)〉(1968)는 에밀 루소와 패트리샤 루뭄바라는 두 대학생의 담담한 설명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1970년대에 만든 영화는 대중에 대한 호소력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채 지적인 선전·선동을 의도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영화들은 '쇼가 아닌 투쟁'이었다.

사람들이 고다르에게 특히 열광했던 까닭은 영화 형식의 기민함이나 지적 영화(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에 의해 이미 한 세대 전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냄)의 제2창조자라는 명성, 복잡하고 난해한 문화적 문제들을 제시하는 노련함, 서구인들에게 닥친 정체성(正體性)의 위기에 대한 그의 냉정하면서도 비애에 찬 기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그를 칭송해 마지않던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다르의 변화는 유아론자(唯我論者)나 허무주의자, 혹은 혁명의 그늘 아래 부르주아들의 추잡한 행위를 은근히 찬양하고 있다면서 자신을 중상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문제 제기였다. 심지어 그의 초기 영화들이 명예로운 실패작이라거나 지식인의 무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언했던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그가 영화감독들 중에서 가장 무모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며 그가 보여준 발전은 흥미진진한 만큼이나 예측불허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 그는 정치적으로 공격적인 텔레비전 방송에 점점 더 개입했는데, 그 예로 〈2번(Numéro Deux)〉은 현대 프랑스의 가정생활과 이데올로기·매체의 힘에 관한 영상실험이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고다르는 1979년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인생(Sauve Qui Peut : La Via)〉을 시작으로 다시 설화적 장편영화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3명의 스위스 청년들이 겪는 일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었다. 1980년대초에는 캘리포니아, 모잠비크에서도 영화기획에 관여했다. 고다르는 말년에도 영화 작업을 계속했으며, 2018년에는 영화 <이미지북>으로 칸 국제영화제 특별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평가

1950년대 말 프랑스 누벨 바그의 주요 영화제작자가 된 〈카이에 뒤 시네마〉지의 비평가들 중에서 고다르는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학적 신념 못지않게 정치적 견해 또한 대담하고 급진적이었던 그는 매우 개성있는 각본들을 쓰고 그것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 속에서 양심을 위해 자신의 영화와 삶의 방식을 모두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표현했다.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비평은 다양하고 폭넓지만 그의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영화제작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