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러시아 내전

다른 표기 언어 Russian Civil War

요약 10월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전쟁(1918~20).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적군'(赤軍)은 러시아 국내외 반(反)볼셰비키 군대의 공세로부터 갓 출범한 소비에트 정부를 수호했다.

러시아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서명은 볼셰비키(공산당)와 사회혁명당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고, 양자의 연계는 무너져버렸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그후 몇 개월 동안 러시아의 양대 반(反)레닌주의 세력은 눈에 띄게 가까워졌는데, 그 하나는 헌법제정회의 해산을 계기로 레닌에게 등을 돌린 비볼셰비키 좌파세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쿠반 초원의 의용군을 주축으로 한 우익 백군세력(白軍勢力)이었다.

백군은 1917년 겨울 모진 고난을 겪고난 뒤 1918년 4월 안톤 데니킨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된 군대로 비록 수는 적었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데니킨, 소련 공산당, 좌파공산주의자).

한편 1918년 봄 독일의 진격으로 혼비백산한 서방 연합국들은 최소한 러시아 군대의 일부나마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동부에 또다른 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1918년 3월 소규모의 영국군 부대가 지방 소비에트의 동의하에 무르만스크에 상륙했고, 4월 5일에는 일본 군대가 아무런 승인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또다른 반볼셰비키 세력으로 제정 러시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체크 및 슬로바키아 탈영병들에게 독자적인 부대형성을 허가함으로써 형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있었다. 1918년 3월 공산당 정부는 이들 부대가 극동지방을 거쳐 철수하도록 하는 데 동의했으나 5월의 철수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으며, 5월 29일 육군인민위원 레온 트로츠키는 이들에 대한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명령을 거부했고 무장해제를 시도한 지방 소비에트를 격퇴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2개의 반볼셰비키 세력이 수립되었다. 그 중 하나는 옴스크를 거점으로 한 자유주의적 성향의 '서부 시베리아 인민위원부'였고, 다른 하나는 사마라에서 사회혁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헌법제정회의 위원단'이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중앙정부로 하여금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게 했다.

멘셰비키 및 사회혁명당의 대의원들은 중앙과 지방 소비에트에서 축출되었으며, 조직적 정치활동에의 참여 또한 금지되었다. 9월이 되자 정부는 이른바 '적색 테러'를 선포했다. 적색 테러는 인질의 총살, 용의자의 약식 체포, 재판, 처형 등에 관한 체카(Cheka:정치경찰)의 권한을 증대시켰다.

1918년 6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내전의 초기 희생자 가운데에는 황제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및 자녀들은 1917년 8월 토볼스크로, 그리고 1918년 봄에는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시베리아에 반볼셰비키 세력이 횡행하자 니콜라이가 구출될 것을 우려한 지방 소비에트는 1918년 7월 16일 밤 연금된 가옥의 지하실에서 황실 가족 모두를 총살시켰다. 그해 늦여름 서둘러 적군을 재정비한 공산당은 러시아 대부분의 탈환에 성공했다. 반공산주의 세력의 거점이 된 옴스크에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영국과 미국 군사위원단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었으며, 무르만스크에 주둔해 있던 영국 군대는 공산당과 접전중이었다(콜차크). 8월에는 영국군 보충부대가 아르항겔스크에 상륙했으며, 극동지역의 일본군 또한 크게 증강되었다.

콜차크(Aleksandr Vasilyevich Kolchak)
콜차크(Aleksandr Vasilyevich Kolchak)

옴스크에서는 사회혁명당과 콜차크 제독 사이의 관계가 점진적으로 악화되어갔다.

콜차크와 부관들은 좌익의 정치적 견해 일반을 혐오했으며, 모든 '붉은 세력'을 적대세력인 공산당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1918년 11월 18일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자신의 독재정권을 수립하자 그들의 내분은 극에 달했다. 이때부터 동부의 반공산주의 세력은 극우파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 혁명보다는 구제도의 복고를 선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콜차크의 쿠데타는 독일의 패전 및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1919년초 적군 병력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시몬 페틀류라 중심의 사회혁명당 잔존세력은 서부로 후퇴,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과 합세했다.

이후 몇 개월간 페틀류라-갈리치아 연합은 우크라이나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기타 지역은 네스토르 마흐노가 지휘하는 무정부주의 세력의 지배하에 놓였다. 주요도시들은 공산당의 통치를 받았는데 모스크바로부터가 아니라 하르코프의 우크라이나 괴뢰정부에 의한 간접지배였다. 독일의 패배는 연합국측에 흑해를 열어주어 1918년 12월 중순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모종의 혼성부대가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이어서 헤르손과 니콜라예프에 상륙했다.

연합국 정부들은 이러한 시점에서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정책적인 결단을 내려야 했다. 원래의 개입 목적, 즉 대(對)독일 동부전선의 부활은 의미를 상실했고 망명 러시아인들은 제정 러시아가 연합국에 충실했으므로 이제는 연합국이 러시아를 도와야 할 차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의적인 명분 위에 정치적인 고려가 첨가되었는데, 모스크바의 공산정권이 혁명의 확산결의와 파괴적인 선전선동으로 전유럽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19년초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백군을 지원한 반면 영국과 미국 정부는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 양대 진영의 화해를 획책했다. 그해 1월 미국 등의 연합국은 러시아의 모든 교전세력에게 프린키토 섬에서의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공산진영은 평화협상을 수락했으나 백군은 거부했고 3월에는 공산당측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한 윌리엄 C. 불릿에게 평화제안은 전달했으나 이번에는 연합국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공산당과의 타협시도를 중단했으며, 콜차크와 데니킨에 대한 원조를 강화했다. 그러나 연합국의 군사개입은 규모에 있어 대단히 소극적인 것이었고, 모두 합쳐 약 20만 정도의 병력이 투입되었을 뿐이었다. 공산당·백군·민족주의자들 간의 혼란스러운 전투에 당황한 우크라이나의 프랑스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1919년 3월과 4월중에 잇달아 철수했다. 아르항겔스크와 무르만스크의 영국군은 실제로 접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담당하고 있던 북부전선은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유일하게 진정한 위협이 되었던 간섭세력은 극동지역에 체계적으로 주둔해 있던 일본군뿐이었다.

1919년 상반기의 교전은 주로 동부에서 이루어졌다. 콜차크 군은 우랄 산맥으로 진군, 4월경에는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4월 28일 적군의 반격이 개시되어 6월에 우파(Ufa)가 합작되자 게릴라에게 시달리며 시베리아를 거쳐 퇴각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 그들의 퇴각은 대패로 종결되었다.

11월 이르쿠츠크에 수립된 콜차크 정부는 12월에 사회혁명당원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콜차크는 1920년 공산주의자들에게 인계되어 2월 7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1919년 늦여름 데니킨은 유럽 러시아에서 최후의 공세를 폈고, 8월말에 이르자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이 백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공산당은 퇴각한 뒤였으며,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데니킨에 대한 입장에 있어 둘로 분열되었다. 페틀류라가 데니킨에게 적대적이었던 반면 갈리치아 군은 자신들의 주된 적인 폴란드 군보다도 데니킨을 선호했다.

9월에 백군은 우크라이나 북부로 진군했고 볼가 강 하구로부터 모스크바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10월 13일 이들에 의해 오룔이 점령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은 에스토니아로부터 페트로그라드 외곽까지 진격해왔다. 그러나 두 도시는 적군의 반격으로 수호되었으며 유데니치는 에스토니아로 퇴각했다.

지나치게 확장된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던 데니킨 또한 오룔에서 후퇴했다. 퇴각행군은 점점 산만해지다가 1920년 3월 군대의 잔존세력이 노보로시스크에서 소개(疏開)됨으로써 마침내 종결되었다.

1920년에는 아직도 표트르 브랑겔 장군이 지휘하는 백군세력이 크리미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의 적군을 공격하여 한동안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일부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결국 적군에 의해 격파되었고, 적군은 충분한 후위부대의 확보 덕분에 15만 명의 병사와 민간인을 해로로 소개할 수 있었다.

내전은 1920년 11월에 막을 내렸다.

표트르 니콜라 브랑겔(Pyotr Nikolayevich, Baron Wrangel)
표트르 니콜라 브랑겔(Pyotr Nikolayevich, Baron Wrangel)

공산당의 승리는 비러시아계 민족주의운동의 패배를 의미했다. 카잔과 남부 우랄 사이의 타타르인, 바슈키르인들의 희망은 내전기간 동안 무너지고 말았다. 민족자결을 선포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러시아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그들에게 강요했다. 타슈켄트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러시아 공산당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몇 해 동안 '바스마치'라고 알려진 민족주의 게릴라 부대가 공산당 당국을 괴롭혔다(→ 바스마치 반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한 결과 카프카스 지역의 3개 공화국 즉,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가 소생되었으나 중앙정부는 그들의 독립을 오랫동안 존중해줄 의도가 없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적군의 침공과 바쿠에서의 폭동 등 이중의 위협에 굴복했고, 1920년 9월에는 과거에 러시아 영토였던 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이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의해 터키의 영토로 승인되었다. 1921년 2월부터 4월에 걸쳐 적군이 조지아를 침공, 1920년 봄부터 바이칼 호 주변 및 그 동부 지역에 '극동공화국'이 유지되었으나 사실상 전적으로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921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연안 국가회의에서 일본은 미국 정부에 러시아에서의 전면철수를 약속했고, 10월말에 약속을 이행했다. 11월에 공화국 의회는 소련에의 합병안을 가결시켰고, 극동공화국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내전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부상한 정치체제의 명칭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었지만 소비에트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권력은 공산당에 귀속되었으며 공산당원들이 인민위원 소비에트(소브나르콤)의 모든 관직 그리고 그보다 하위인 정부기구의 모든 요직을 차지했다. 당 자체는 중앙위원회의 통제를 받았으며, 중앙위원회를 지배한 인물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 다음 가는 세력가였고, 레닌은 육군인민위원으로서 적군의 최고 통수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군수품 보급과 인력동원에도 책임이 있었다.

1919년경에는 적군이 백군 반대파보다 훨씬 우세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군의 기지가 변경에 흩어져 상호연락이 어려웠던 반면, 줄곧 유럽 러시아의 심장부를 장악했던 적군은 작전계획과 병력이동에 있어 보다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